'바다이야기'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
전현준
“복권은 … 프롤레타리아가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의 대중 이벤트였다. …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즐거움이고, 어리석음이고, 진통제이고, 지적 자극이었다.”
-조지 오웰, 『1984』
여름도 다 끝나가는 요즈음 때 아닌 '바다이야기'로 연일 온 나라가 시끄럽다. 사행성 성인오락게임 '바다이야기'를 둘러싼 공방은 대통령의 조카, 청와대 비서관 및 대통령 측근들의 연루 의혹 등으로 청와대와 당사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논란은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이번 '바다이야기'사건을 YS정권 때의 빠찡코 대부 정덕진 게이트와 차남 김현철 비리사건 및 DJ 정권 때 신용카드게이트와 ‘홍삼트리오’ 사건(DJ 아들 삼형제의 비리)에 맞먹는 노무현 정권의 "대형 정·관·폭(政·官·暴) 게이트"로 규정하며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 ‘정책실패’라며 대 국민사과를 완강하게 거부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8월 31일 바다이야기 사태와 관련해 "국민에게 너무 큰 걱정을 끼쳐드린 데 대해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한나라당과 제도권 신문·방송들의 보도 이전에 '바다이야기'사건은 현 정권과 노사모 합작으로 거대 비자금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여의도 정가와 증권가 그리고 인터넷에 나돌고 있었다. 소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노사모를 이끌었고 ‘국민참여 1219’를 만든 배우 명계남 씨가 현재 성인오락실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해서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고 있다. 성인오락은 대형 도박장이고 성인PC방은 소형 도박장인데 소형 도박장인 성인PC방은 권력층에서 경찰에 단속을 지시하고 있는 반면, 대형오락장인 성인 오락실은 문광부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이 비자금은 어디에 사용될 것인가? 여기엔 두 가지 설로 나뉜다. 일부에서는 노대통령의 퇴임 후 비자금으로 쓰일 것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내년 초 정계개편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할 때 진성 노무현당 창당자금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바다이야기'프로젝트의 주연 배우는 명계남이며 조연은 문광부장관이고 상품권 유통은 문성근이 맡고 있다는 게 소문의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바다이야기'는 과연 어떤 게임이기에 이렇게 난리인가? 검찰이 20일 제조사 대표들을 전격 구속기소한 사행성 게임인 `바다이야기'와 `황금성', `인어이야기'등은 성인게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제품들이다. 특히 `바다이야기'는 2004년 12월 처음 등장해 작년 중반 이후 대히트의 기록을 세우며 전국적인 붐을 일으킨 게임기다. `바다이야기'와 유사 게임들은 슬롯머신과 같이 돌아가는 그림을 맞추면 점수를 얻는 릴게임(reel game)의 일종으로 4개의 원판에 나타나는 그림에 따라 당첨 여부가 결정되는 프로그램이다. 이 게임 프로그램들은 “4초 안에 승부가 나고 1시간에 9만 원 이하의 게임 비용이 지출되며 한 게임에 상품권으로 지급되는 경품의 최대액수가 2만원을 넘지 않으면 사행성 게임기로 보지 않는다.”는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영등위)의 이른바 `4-9-2 룰(rule)'을 지키는 게임기로 분류돼 영등위의 심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4-9-2 룰(rule)'은 요식행위였으며 실제 전국의 상당수 업장에선 불법 개ㆍ변조돼 수백 배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도박으로 이용되어 왔다. 사실상 이 룰은 이들 게임기가 기계식이 아닌 전자식이어서 누구나 손쉽게 조작이 가능해 이 룰을 제대로 지키는 업체는 거의 없는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드러나고 있다. 또한 어떤 ‘정직한’ 업소가 4-9-2룰을 지킨다고 가정하더라도 게임기 1대에 시간당 9만원, 하루 24시간이면 216만원까지 투입이 가능하므로 게임기 1대당 20만 원 이상의 환전수입을 업소들이 챙길 수 있어 시민을 대상으로 한 합법적인 도박임이 분명한 것이다.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의 핵심 비밀은 바로 경품용 상품권이다. 바다이야기의 경우 게임에서 돈을 딴 사람에게 지급하는 상품권에 대해 수수료 10%를 떼고 현금으로 바꿔줬다. 일부 게임장은 승률이 100%가 넘었다고 한다. 손님을 끌기 위해 승률을 높이더라도 상품권 환전 과정에서 수익이 저절로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편법 탈법으로 게임기의 사행성을 높인 덕분에 이용자는 단기간에 급증했고 환전수수료 수입도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러니까 땅 짚고 헤엄치는 '봉이 김선달'식 장사를 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봉이 김선달'들을 양산한 대부는 누구일까? 두 가지 규제완화가 그 주인공이었다. 2001년 9월 성인오락실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한 것과 2002년 2월 경품용 상품권 발행을 허용한 조치다. 이 과정에서 외압이나 로비가 있었는지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다.
`바다이야기'를 비롯한 이들 사행성 게임들은 이른바 `메모리 연타' 및 `예시' 기능을 통해 카지노 슬로머신의 `잭팟'(횡재)을 가능케 함으로써 한번 게임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로 중독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게임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예시 및 연타 기능이 있어 법정 경품 한도액인 2만원보다 훨씬 많은 액수가 당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한 게임에 200만~400만원까지 잭팟이 터질 수 있게 만드는 것으로 잭팟이 터진 사실을 게임기 메모리에 저장해 2만원씩 따는 것을 20여 차례 반복해서 할 수 있다.
그래서 운이 좋아 잭팟을 계속 터뜨리면 한 시간에 최대 300만원까지 상품권을 딸 수 있다. 때문에 잃을 땐 적은 금액을 잃지만 딸 때에는 한꺼번에 대박을 터뜨릴 수 있게 해서 사용자들이 한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 상품권은 대체로 10%의 수수료를 떼면 곧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 따라서 업소들은 승률을 높여 `대박이 잘 터지는 곳'으로 소문이 나면 손님이 많이 몰리고 그럴수록 상품권 환전 수수료를 더 챙길 수 있어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업소들이 불법 영업을 하다 적발돼 영업정지를 받더라도 법원에 영업정지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벌이며 불법 영업을 계속해 왔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언론을 중심으로 세간에서 다루는 '바다이야기' 사건은 1)영등위· 문광부· 국회를 상대로 한 사행성 오락기 ‘바다이야기’ 인허가 비리 의혹, 2)오락실 경품용 상품권 발행업체 지정 과정의 특혜 및 로비설, 3)대통령 조카 및 여권 실세의 ‘바다이야기’ 지분 보유 및 비호설 4) 폭력 조직의 개입여부 등 네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당초 당첨금 제한 변조 등 성인오락기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데 초점이 맞추고 불거진 의혹과 관련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던 검찰 수사도 특별수사팀을 꾸려 관련자 수십 명을 출국 금지시키며 전방위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하지만 과연 제기된 이 정도의 수사쟁점으로 모든 것이 다 밝혀질 것인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는 `바다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도박의 광풍과 투기 열풍은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학적· 문화사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의 검토를 필요로 하는 사회현상이다. 따라서 이런 점들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바다이야기'사건 역시 우리에게 ‘사회적 망각력’에 일조하여 시간이 가면 잊어질 그렇고 그런 사건·사고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바다이야기'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투기와 ‘투자’는 명징하게 가를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류경제학의 사전적 의미로 ‘투자(investment)’는 일정기간 생산 활동의 결과로서 새로 추가된 자본스톡의 증가분으로 장차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위해 현재 자금을 지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추가된 자본스톡 안에는 공장 ·기계 ·건물 등으로 구성되는 고정자본의 증가분 외에 재고 원재료나 제품 스톡의 증가분도 포함된다. 통속적으로는 개인이나 기업이 실물자산이나 금융자산을 구입하는 것을 투자라 하나 경제학에서는 기존 자산의 구입은 소유자의 교체를 의미할 뿐, 사회 전체로서는 아무것도 추가된 것이 없기 때문에 투자라고 보지 않는다.
자본 중에서 고정자본은 그 사용으로 인하여 해마다 가치가 감모되어 가는데, 이 감모분을 차감한 자본의 순증가분을 특히 순투자라 부르며, 감모분을 차감하지 않은 것은 총투자라고 하여 구별한다. 자본의 감모분을 보전하기 위한 투자를 갱신투자 또는 환치투자라고 한다. 다시 말해 ‘순투자=총투자-갱신투자’로 정의된다. 불황과 같이 총투자가 아주 부진하고 자본의 감모분조차 보전되지 않을 때 순투자는 마이너스가 된다고 본다.
반면에 ‘투기’는 상품이나 유가증권 등에서 단기간 시세변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익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거래행위를 말한다. 투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speculation’인데 원래 이 뜻은 추측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어원론적 해석에 따르면 투기는 ‘불확실하고 고위험이 따르는 투자 행위’를 말한다. 투기를 위한 매매가 실거래와 다른 점은 그 동기가 가격의 등락 차의 취득에만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투기의 거래 대상이 되는 것은 가격 변동이 심한 것과 동시에 전망을 예측하기 어려운 주식이나 상품, 부동산 등에 집중된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교과서적 설명으로는 앞서 말한 대로 칼로 두부를 썰듯이 명쾌하게 투기와 투자가 나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주식 시장을 예로 들어 보자. 주식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제 요소 중 하나다. 또한 주식은 자본주의 하에서 주요한 경제 주체인 기업에 자본가가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류경제학 교과서에 따르면,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국의 주식 시장을 활성화시키려고 노력하며, 많은 자금이 주식 시장을 통하여 기업에 흘러 들어가서 플러스 효과를 가져오고 투자자에게는 배당 수익과 프리미엄을 안겨 주려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교과서대로 주식 시장에서 투자와 투기를 나누어 본다면, 배당 수익을 노려 자금을 투여하는 것은 투자, 시세 차익을 노려 주식을 사는 것은 투기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1년 이상의 장기 보유자는 투자자, 그 이하 보유자는 투기꾼으로 보고 특히 데이 트레이더는 전문 투기꾼으로 봐야 한다.” 는 주장을 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 누가 증권회사 앞에 가서 이러한 주장을 편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자본주의에서 투자와 투기를 명확히 가르기 힘든 점이다. 그런데 ‘투기’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학적으로 개념을 명쾌하게 규정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분명히 경제학적인 개념이다. 아니,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적으로 ‘투기적인 사회‘ 혹은 ‘투기를 제도화한 사회’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서 거칠게 투기는 시장가격이 급변하는 틈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행위며,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자본이득을 위해 정상적인 수익을 포기하는 것은 투기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투기와 투자는 양자의 차이를 애써 구분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제사학자 에드워드 챈슬러의 말대로 “투기는 실패한 투자이며, 투자는 성공한 투기”정도로밖에 구분되지 않는다.
이제 경계의 외연을 좀 더 넓혀 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기와 투자의 구분이 모호하듯 투기와 도박의 구분도 흐릿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하에서 ‘나쁜 투자는 투기이며, 나쁜 투기는 도박’이라는 역설적인 정의도 가능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가 긍정적으로 그리는 개념인 투자와 구별되는 투기와 도박의 특징을 꼽으라면 투기와 도박에는 분명히 시대와 상황을 넘어서 ‘대중의 비정상적인 환상과 집단적인 광기’, 즉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사회적·심리학적 동인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투기와 도박을 ‘비정상적인 환상과 집단적인 광기’로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체제의 성숙도나 그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학습 내지는 체화의 정도 등이 변수로 작용한다.
투기와 도박은 내기(혹은 걸기)와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그 무엇’(대부분 재화와 서비스로 환원된다.), 이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었을 때에만 투기와 도박이 되는 것이다. 가령 아무 것도 걸지 않는 모의 투자나 고스톱은 투기나 도박이 아니고 단지 놀이일 뿐이다. 또 ‘내기’나 ‘걸기’ 없이 재화와 서비스를 주고받는 것은 도박이 아니고 자선사업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듯이 투기와 도박의 종류에도 끝이 없다.
그렇다면 투기와 도박의 기본적인 원리는 무엇인가? 첫째, 불확실성이다. 투기와 도박은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맡긴다. 투기와 도박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표면적으로 필연과 확실성을 추구하지만, 그 사회 인간들의 삶을 결정한 것은 우연과 불확실성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비합리적인 것은 가령 자본주의의 ‘생산의 무정부성’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끝없는 이윤 창출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그 본질상 과잉생산으로 치달린다. 때문에 자본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비합리성을 그 본래의 특징으로 갖고 있다. 이 생산의 무정부성을 듣기 좋은 말로 하면 ‘자유경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약육강식, 적자생존과 같은 이치이어서 강한 자(부르주아)는 약한 자(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함으로 또 다른 강한 자(부르주아)와 끊임없이 경쟁한다. 자본가들이 다른 자본가들과 경쟁하여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본을 축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본은 노동자에게서 착취한 이윤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의 무정부성이 ‘깨어진 조절장치’인 시장의 무정부성과 결합하여 결국 생산과 소비사이의 불균형이 주기적인 불황과 경제파동을 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그 피해는 힘의 원리에 따라 가장 힘없는 개인들에게 집중적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투기와 도박의 두 번째 기본적인 원리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편익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먹이를 획득하려고 한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사실 이 원리의 극단적 제도화인 셈이다.
그렇다면 도박과 자본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노동과 합리성을 표방한다. 물론 자본주의는 노동과 합리성을 명목적으로 표방만 할 뿐,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도박은 노동과 합리성을 노골적으로 생략한 채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획득하려 한다. 개인들의 도박이 사회적 비난이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다.
투기와 도박 즉, 내기의 역사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 일치할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도 이따금 복권을 사고, 경마장에서 베팅을 하고, 사무실에서 사다리 타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1등 당첨자가 나온 가게를 찾아다니며 복권을 사거나, 자신만의 행운번호를 고른다. 모든 사회에서 ‘내기(걸기)’는 일상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내기의 추구는 인간의 여러 모습들-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과 더불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면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영국 글래스고 대학의 인류학 교수 거다 리스(Gerda Reith)는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호모 알레아토르(homo aleator), 즉 도박적 인간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특히 “21세기에 사는 인간은 모두 도박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일확천금을 꿈꾸는 망상주의자나 매순간 카지노 테이블에 앉아서 스릴과 초조감을 즐기는 도박 중독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 세계가 ‘도박적’이기에 우리 모두 도박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도박에 관심을 가지고 있건 없건 상관없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미 ‘거대한 카지노’이며,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호모 알레아토르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도박은 전통적으로 해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유희’라는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호모 루덴스와 호모 알레아토르가 걸어온 길은 판이하게 다르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요한 호이징가는 1938년에 출판된 『호모 루덴스』에서 비생산적인 ‘놀이’ 활동을 인간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시키면서 놀이의 문화적 창조력을 규명하였다. 호이징가에 따르면 모든 놀이는 자유롭고, 분리되었으며, 확정되지 않았고, 비생산적이며, 규칙이 있는 허구적인 활동이자 마지막으로 서로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놀이의 특성들은 놀이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와 강하게 대립시켜 놀이가 본질적으로 별도의 활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특성들은 형식적인 것으로 놀이의 내용을 예측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후 프랑스의 인문 사회과학자인 로제 카이와는 이러한 호이징가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호이징가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놀이와 인간』이라는 책자를 저술하였다. 여기서
로제 카이와는 호이징가의 놀이를 더 세분화하여 경쟁, 우연, 모의, 현기증이라는 4개의 역할 중 어느 것이 우위를 차지하는가에 따라 놀이를 다음과 같은 4개의 주요항목으로 구분하였다. 즉, 모든 놀이는 아곤(시합,경기), 알레아(요행,우연), 미미크리(흉내,모방,의태), 일링크스(소용돌이)로 분류할 수 있다. 가령 축구나 구슬치기와 같은 경쟁 놀이(아곤),룰렛이나 제비뽑기와 같은 우연 놀이(알레아), 해적놀이를 하거나 네로나 햄릿을 흉내 내는 놀이(미미크리), 회전이나 낙하 등의 빠른 운동을 통해 자신의 내부 기관에 혼란과 착란의 상태를 일으키는 놀이(일링크스)같은 경우가 된다.
호모 루덴스가 일반적으로 모든 형태의 놀이를 인간 본성의 숭고한 요소의 발현이라는 긍정적인 요소와 함께 발전해 온 것과는 반대로 호모 알레아토르는 우연과 혼란스러움에 기대어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위협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즉, 그 시대의 사회윤리나 지배자들의 통치원리에 맞는 ‘놀이’를 자신의 특징으로 삼은 호모 루덴스는 양지에서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통제 불가능한 영역인 우연과 불확실성을 속성으로 가진 호모 알레아토르는 음습한 그늘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 명맥을 끈질기게 유지해 왔다.
인류 역사에서 비판의 용어가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도박은 문제가 있고, 죄악이고, 낭비고, 범죄고, 병적이라고 비난받아 왔다. 도박을 ‘사회문제’로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각은 이런 전통 위에 서있는 셈이다.
서양의 경우, 맨 처음 놀이를 인간 본성의 최상의 부분으로 인정한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하지만 게임에서 탐욕과 비열함을 보고, 게이머를 폭군이나 도둑으로 본 사람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중세에는 도박이 비생산적이고 대중에게 풍기 문란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교회가 도박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강하게 취한 것은 종교개혁 때부터였다. 도박에 대한 진정한 반감을 가진 집단인 부르주아의 출현이 그 이유였다. 교회와 부르주아는 도박이나 그와 유사한 게임을 거세게 공격했다. 교회는 도박을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신의 뜻과 선택을 제비뽑기식 결정으로 타락시키고, 부의 창출을 노동의 대가와 분리시켜 우연의 농간에 맡김으로써 청교도적 가치를 비웃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성과 합리를 표나게 강조했던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는 도박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도박은 비이성적인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이 시기 내내 도박꾼들은 비합리성의 화신으로 취급되었다. 인간성의 특징이 ‘이성(rationality)’이라면, 합리적 이성을 자발적으로 상실한 사람들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9세기 초기 자본주의가 시작된 서구에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시간은 금이다.”라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설파했듯이, 이제‘시간’은 돈 다음으로 귀중한 상품이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도박은 시간과 돈, 둘 다를 낭비하는 행위로 보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규범은 도박을 알코올중독이나 매춘과 함께 법으로 금했다. 도박자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범죄자가 된 것이다.
때문에 19세기 근대 자본주의 시대이래, 범죄적 도박에 대한 반감은 사라지지 않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범죄’로 보는가 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도박은 이전 세기들의 도덕적 목소리가 아닌 의과학적 목소리로 대체되었다. 현대에서 도박은 윤리적 차원보다는 병리적 차원에서 다뤄지는 여전히 골치아픈 ‘문제’인 것이다.
도박을 병리적· 의과학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프로이트의「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 살해」라는 짧은 논문이다. 이 글에서 도박자는 상습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신경증 환자로 그려진다. 프로이트는 도박 중독을 자위행위의 중독과 같은 종류로 보았다. 그 둘을 묶어주는 연결고리는 ‘손동작(hand play)’이다. 자위라는 악이 도박의 탐닉으로 대체되고, 열정적인 손놀림에 대한 강조가 이러한 연결 관계를 드러내준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는 도박을 한 후에 갖는 죄의식은 도박자 자신이 젊은 시절 품고 있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버지의 이중적인 관계, 그리고 그의 도박 탐닉을 언급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갖게 된 죄의식이 도박을 통해 완화된다는 것이다. 도박을 하며 운명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상징적으로 아버지에 맞서게 되고, 그래서 도박은 ‘자기 체벌의 상징적 수단’이 된다. 이러한 분석은 정신분석학에서 도박자를 마조히즘 환자로 그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고스톱을 예로 들더라도 이의 기본적 원리는 ‘너의 행복(고득점)이 나의 불행(저득점)’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인 가학과 피학의 원칙이 틀림없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반되는 두 입장이 병존하고 있다. 기존의 입장과는 달리 로또나 공공 복권처럼 도박이‘해가 없는 투기’로 혹은‘고통 없는 세금’으로 경제계와 정부에 의해 묵인되고 장려되는 반면 도박이 종교인, 윤리주의자, 의과학자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간의 희망과 믿음을 부도덕하게 거래하는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이렇게 도박을 바라보는 관점이 엇갈리는 가운데에도 도박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걸까? 아니, 사람들은 왜 도박에 빠져드는 걸까? 도박은 일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우연의 세계로‘무작정 뛰어드는’일이다. 어떤 면에서는 도박에서 돈을 거는 초조한 순간이 내기의 결과보다 더 본질적이다. 사실 승패는 우연의 경험에 매료된 사람들에게는 원하지 않는 방해에 불과하다. 거다 리스에 따르면 “도박은 사람들을 우연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도박하는 사람들에게 도박의 우연은 왜 멋진가? 그것은‘우연의 절대적 민주주의’때문이다. 우연은 기술의 효능을 무력화하고 개인적 자질, 인내심, 노력 또는 교육에 기초한 모든 차이를 무효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차별로 가득한 현실과 달리 순수한 도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멋져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원리가 부르주아들의 필연의 질서이기만 하다면 나에게는 기회조차 없단 말인가?”라는 심정으로 도박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그러기에 러시아 작가 고골리는 “게임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카드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도박의 이 차별 없는 민주주의는 기실 불평등한 변덕이다. 도박에서 한 개인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고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우리가 앞서 살펴 보았듯이 투기와 도박에는 인위적인 개입으로 한몫을 거머쥐려는 각종‘작전세력’들의 존재와 함께 도박기계 역시 손쉽게 조작이 가능해졌다. 우연은 세계의 존재론적 특질이며, 우연의 영향은 도처에 널려있고 도박의 결과는 항상 우발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가 도박을 포용한다는 것은 수없이 지적되어 왔다. 아니,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도박은 흘러 넘쳐난다. 도박은‘심심풀이’-이것의 한계가 어디인지 의문이다- 를 넘는 순간 불법이 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왜 도박을 불법화하는 것일까? 과연 자본주의 체제는 도박 자체를 용인하지 않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수익이 큰 이 장사를 무엇 때문에 외면하겠는가. 자본주의 국가는 오로지 자신이 도박을 독점하기 위해서 자신이 허락한 도박 외에는 모두 금지하는 것일 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복권’과‘경마’다. 국가는 고스톱은 금지하지만 복권과 경마는 장려한다. 복권은 체제에 의해 합법화된 도박의 전형이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불과 한 달 사이에 몇 천만 원어치의 로또복권을 샀다는 젊은이가 출연했다. 그는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돈을 모두 복권에 쏟아 부었지만 1만 원 이상 당첨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앞으로도 계속 복권을 사겠다는 뜻을 비쳤다. 과연 그 젊은이가 복권을 산 것을 ‘투자’로 보아도 좋을까. 복권의 경우 투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도박’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다만 정부가 발행하고 오히려 구매를 독려한다는 점에서 불법적인 도박과는 차이가 있다.
서양에선 16세기에 식민지 개척자금을 위해 복권이 처음 등장했는데, 이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 판매를 촉진하려고 종교까지 동원됐다. 1612년 영국에서 나온 복권의 홍보 전단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왕국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라네, 미개인들이 사는 땅에. 신은 기독교인들을 여전히 도우시리, 그들의 목적을 기꺼워하시리.” 또 프랑스의 자선복권 1등 복표에는 “하느님이 당신을 선택하셨다”라고 적혀 있었다.
18세기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복권을 발행했지만 19세기 들어 복권 사기가 성행하는 등 부작용이 심각해지면서 복권을 금지했다. 그 이후 급속히 번진 복권이 하층민들의 투기와 도박심리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그러나 복권을 금지한 진짜 이유는, 금융기관의 발전으로 자본형성 수단이 다양해져 복권의 필요성이 줄어든 데 있었다.
미국의 경우, 복권은 1960년대 뉴햄프셔 주를 시작으로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다. 복권이 다시 등장한 것도 역시 재원 때문이다. 1964년 큰 논란 속에 복권을 부활시킨 미국의 뉴햄프셔 주는 소득세와 판매세가 없는 탓에 교육예산이 전국에서 가장 적었다. 당시 다른 주에서 복권에 대한 반감은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로드아일랜드 주의 경우 경찰관들이 잠복했다가 복권을 사서 주 경계를 넘어오는 주민을 체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한 교육예산을 충당한다는 이유로 복권은 부활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주정부들은 복권을 팔아 교육예산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배정된 교육예산을 대체하는 데 사용해왔다. 결국 교육 예산의 증액은 없었으며, 복권은 불안정한 예산 충당책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복권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는 1970년대 들어 오일쇼크로 인해 경기가 나빠지면서 이내 사라졌다. 모든 주에서 복권과 세금 인상 가운데 복권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복권제도는 데이비드 니버트(미국 위튼버그 대학 사회학과 교수)의 말대로 국가가 나서서 부유층이 책임져야 할 세금 부담을 저소득층에 전가하는 도구다. 국가가 ‘저소득층을 상대로’ 공격적인 복권 판촉을 하는 것은 조세 정의에 어긋나는 짓 아닌가.
국가의 기만적 행정에다가 프롤레타리아들의 출구 없는 삶의 판타지가‘행복하게’만나면서 자본주의와 복권의 결탁은 의심 없이 이뤄져왔다. 이후 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복권반대운동으로 복권발행은 몇몇 나라에서 불법이 되기도 했지만‘대박’에 대한 유혹은 너무도 쉽게 빗장을 다시 열었다. 추첨 방식 역시 고도로 복잡해지며 1등 당첨의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과연 복권은‘해가 없는 투기’이자‘고통 없는 세금’인가? 1990년대 중반 미국 인디애나주의 소득계층별 복권 구입비 지출을 보면 복권이 얼마나 소득 역진적이지를 잘 보여준다. 연봉 1만5천 달러 이하의 저소득층 복권 구입비는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연봉 5만 불 이상의 고소득층에 비해 다섯 배나 높았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복권 판매소 역시 저소득층 주거구역에 밀집해 있으며 “(성공을 위해) 필요한 건 1달러와 꿈뿐”이라는 달콤한 광고는 1달러 인생들을 줄기차게 유혹하고 있다. 황금처럼 번쩍거리는 복권의 숫자 이면에는 부유층이 떠맡아야 할 세금부담을 저소득층에 부당하게 떠넘기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도박 현실은 어떤가? '바다이야기'나 복권만이 결코 문제가 아니다.'도박 공화국'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한국사회는 사행성 도박의 늪에 깊이 빠져 있다. 카지노, 경륜, 경마, 로또, 경정 등에 15조 원 가량이 한 해에 몰리고, 성인오락실과 PC방은 무려 2만여 곳에 이른다. 경품용 상품권의 98.5%가 오락실 주변에서 환전될 정도로 도박은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런 가운데 10% 가까운 400만명의 성인 남녀가 도박중독 증세를 보이고 청소년들도 그 대열에 속속 합류한다. '대박'을 꿈꾸다가 '쪽박'을 차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사회는 도박이 파놓은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가가 나서 '인생역전'을 은연중에 부추기며 국민들을 도박 광풍으로 내몰고 있다. 그 결과로 야기된 실직, 가정파탄, 자살 등은 사회와 아무 관계가 없기라도 한 듯이 선을 긋는다. 문제는 은폐되고 결과는 개인의 몫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사행성을 조장하기 시작한 해방 이후 사례는 1947년의 올림픽 복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 후생복표, 산업박람회복권, 무역박람회복권 등이 발행되다가 1972년 매주 정기적으로 주택복권의 발행되면서 국민들 사이에 요행심리가 활개를 쳤다.
1970년대에 합법화한 카지노 산업은 외국인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돼 오다가 2000년에 지방경제 활성화 명분으로 정선에 카지노가 설립돼 내국인도 드나들 수 있게 됐다. 그 사이에 생겨난 경마, 경륜, 경정, 로또 역시 천문학적 매출액을 올리며 향유인구의 급증현상을 낳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다이야기' '황금성' '인어이야기' 등 이번에 문제로 불거져 터진 사행성 성인오락에 이르기까지 도박은 날로 그 반경을 넓혀왔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근래 들어서는 합법적 도박과 비합법적 도박이 공존하면서 국가의 기준에 대해 의문과 혼란을 갖게 했다. 같은 도박이라도 합법적 도박은 용인되고 권장된 반면, 비합법적 도박은 엄정한 법적 처벌과 규제의 대상이 됐다. 즉, 국가가 불법적 도박은 범죄화하면서도 합법적 도박은 탈범죄화시키는 이중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확산과 처벌‘의 모순된 엇박자 행보인 셈인데 투기와 도박에 관한 한 이것이 국가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속성상 도박이 갖는 폐해는 합법성, 불법성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가의 이중 잣대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도박자와 그 가족에게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히고 갖가지 정신적 후유증까지 낳으며 도박은 합법, 비합법과 무관하게 사회에 각종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원 조성이 목적인 국가는 어떤 방법으로 비판을 누그러뜨리고 자신의 책임을 피해왔을까. 국가는 먼저 합법적 도박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을 인위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축소하거나 위장하는 방법을 쓴다. 쉽게 말하면 문제 자체를 은닉해버린다는 것이다. 국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약점을 이용해 중독 도박꾼을 만들어내고, 도박할 여유가 없는 중하층민을 도박판으로 끌어들인다.
중하층민은 행운에 의지한 채 도박이라는 요행의 사다리를 오르다가 중도탈락하며 종국에는 자신을 부양할 능력조차 갖지 못하고 나락으로 추락하기 마련이다. '인생역전'을 유혹하는 로또복권 광고처럼 투기 욕망을 최대한 부추기지만 그 결과 범죄자, 노숙자, 빈민층으로 전락한 현상에 대해서는 은폐하거나 축소해버린다.
다음으로 국가는 합법적 도박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개인 책임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킨다. 물론 도박에 탐닉하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행위와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초래된 결과이긴 하지만 그 영리추구의 근원적 주체가 그 구성원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국가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도박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귀속될 뿐이라는 사고는 국가의 궁색한 자기방어이며 국가가 도박의 직·간접적으로 간여되어 있는데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면피하려는’편의주의적 방식일 뿐이다.
또한 국가는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이런 국가의 전략에 동조시키는 전술을 쓰고 있다. 도박중독증을 충동조절 장애라는 정신장애에 귀속시키면서 '의학적, 심리학적 관리'의 대상으로 국한시키는 것. 이렇게 되면 도박중독증은 사회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질환으로 축소되며, 그 결과 국가는 책임에서 면제된 반면 개인이 그 책임을 온전히 떠안게 된다. 즉, 국가는 책임을 개인에게 넘긴 채 도박 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합리화된 명분을 축적하게 된다는 얘기다.
미국 등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도박은 국가와 사회의 재정문제를 해소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채택된다. 그와 동시에 개인의 자제력에서 원인을 찾고 도박을 '질환화'함으로써 사회ㆍ경제적 문제에서 의학적 관리의 대상으로 관리와 책임을 이관해 축소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도박의 심리』의 저자 이흥표 한국습관성도박연구센터 상담실장은 "습관성 도박은 개인 자제력의 장애이기도 하지만 욕망을 생산해내고 부추기는 것은 국가이기도 하다"면서 "국가가 도박을 탈범죄화시킴으로써 도박할 기회가 늘어나고 이로 인해 병적 도박자와 도박으로 인한 범죄자가 증가한다는 아이러니를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도박에 대한 이중 기준은 사회의 모순이지 개인의 모순이 아니다"고 전제한 뒤 "'바다이야기' 등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행성 도박실태는 잘못된 정책의 결과로서 터질 게 터졌을 뿐 오래 전부터 예측돼온 일이었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를 각종 투기와 도박에 탐닉하도록 몰아간 모종의 ‘흥분’과 절망 혹은, 불안과 공포 그리고 여기서 탈출하려고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리적 지형학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우선 지적되어야 할 것은 우리 역사에서 지금보다 투기와 도박이 성행한 시대는 없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로 우리는 먼저 앞서 살펴 본 도박의 원리 중 도박이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맡기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도박은 특정한 시대에 인간과 사회가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다. 말하자면 도박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것이 불확실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방식이다. 인간의 역사는 비합리에서 합리로, 불확실에서 확실로 진보했던가?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체제 이후 이 땅의 대중들은 그렇게 믿고 있지 않는 것이 ‘바다이야기’를 비롯한 도박 열풍인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현 실상은 걱정의 정도를 넘어서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주정부 하에서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이 더 악화되고 공동체적 기반이 해체되고 있으며 시민성의 기초가 황폐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재벌공화국의 등장’이라고나 할, 과거 개발독재시대보다 더한 사상 초유의 경제 권력이 민주정부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역설이다. 노무현 정부가 이들 슈퍼재벌이 만든 가치관과 정책프로그램을 수용하고 인적관계를 수용하고 의존해왔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법의지배를 관철하려 하면서 이 슈퍼재벌의 범법행위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하다 못해 협조적이라 할 만큼 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해 온 사실을 상기해 보자.
<표 1> 양극화 현상의 국제비교
구분국가중산층 감소빈곤층 증가, 상류층 증가빈곤층 증가 > 상류층 증가한국, 노르웨이빈곤층 증가 < 상류층 증가미국빈곤층 증가, 상류층 감소빈곤층 감소, 상류층 증가프랑스, 영국중산층 증가빈곤층 감소, 상류층 감소빈곤층 감소, 상류층 증가호주빈곤층 감소, 상류층 감소빈곤층 감소 > 상류층 감소캐나다빈곤층 감소 < 상류층 감소 자료: 삼성경제연구소 2003년 보고서 및 2006년「소득 양극화의 현황과 원인」보고서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귀결은 한국 민주주의의 극적인 변형과 민주화 이후 사상 최악의 분배구조 악화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의 ‘양극화’- 그 본질은 ‘대량실업’과 ‘궁핍화’에 다름 아니다.- 는‘중층적 양극화 현상’이며, 이는 특히 근로소득의 양극화로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게급 내부에서도 내부자(Insider)와 외부자(Outsider)의 문제가 발생하며, 사회적 약자들과 노동시장 탈락자들은 끊임없이 빈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사회의 계층별 차이를 살펴보면, 재벌경제연구소도 시인하듯 빈곤층 증가가 상류층 증가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빈곤층과 상류층이 동시 증가하는 최악의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봐도, 중산층이 증가하는 국가는 호주, 캐나다가 해당되며,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은 중산층이 감소하여 양극화가 진행되는 국가로 분류된다(<표1> 참조).
그러나 중산층이 감소하는 국가 중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은 빈곤층이 감소하면서 상류층 증가로 중산층이 상향 이동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의 양극화가 더 문제적인 것은 빈곤층과 상류층이 동시 증가하는 경우에 발생하며, 이 경우에도 미국처럼 빈곤층 증가폭보다 상류층 증가폭이 큰 경우보다 한국과 같이 빈곤층 증가폭이 더 큰 경우가 더 심각한 양극화 양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올해 발표된 연구 결과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이후 소득 양극화 현상이 다시 심화되면서 한국의 양극화 정도가 영국·일본·독일·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보다 심해졌다고 분석했다.「소득 양극화의 현황과 원인」 보고서에서 동 연구소는“외환위기 이후 대폭 상승한 소득양극화 지수는 2000~2002년 하락 또는 현상을 유지했지만 2003년 이후 다시 높아졌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경기침체와 성장률 하락으로 중산층이 축소되면서 소득 양극화 현상이 심화됐다고 지적했다.
〈표 2〉한국사회의 빈곤층 규모 (2000년~2003년) (단위 : %)
2000년2001년2002년2003년경상소득 기준빈곤층6.45.24.25.2차상위층4.63.83.13.1합 계11.09.07.38.3공공부조 전
경상소득 기준빈곤층7.76.25.15.7차상위층4.84.33.53.1합 계12.510.58.68.8
주 : 최저생계비를 기준선으로 활용
자료 : 통계청, 도시가계조사(2000~2003) 원자료. 노대명(2005)에서 인용
<표3> 자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차상위 계층 실태조사」 중간 보고, 2005
2005년 8월 11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차상위 계층 실태조사」 중간보고에 따르면,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빈곤층’이 700만명을 넘어섰다. 2003년을 기준으로 월 평균 소득이 최저생계비(4인 가족 기준 101만9000원)의 120%에 못 미치는 빈곤층이 716만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는 국내 전체 인구 4900만명을 기준으로 14.6%에 해당된다. 국민 7명 중 1명이 ‘소득 빈곤층’인 셈이다. 이번 조사는 정부 차원에서 처음 전국 단위로 실시된 것으로, 그동안 정부가 추산해온 빈곤층 500만명보다 200만명이 더 많은 수치다.
전문가들 대부분은 이처럼 막대한 ‘소득 빈곤층’ 규모에 대해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양극화 현상 등과 관련 있다고 분석했다. 716만 ‘소득 빈곤층’ 중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정부 지원을 받는 계층은 138만명에 불과했다. 최저생계비 이하 소득인데도 복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계층은 무려 372만명으로 파악됐다. 소득이 최저생계비의 100~120%인 차상위계층은 206만명으로 추계됐다. 이들은 통상 ‘잠재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이 같은 결과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3년에 전국 3만 가구의 표본을 추출 조사하여 추산한 수치다.
또한 빈곤률 파악의 기준인 빈곤선을 정의하는 4인 가구 최저생계비(2004년 1,055,090원)는 4인 가구 가계지출액의 38.1%에 불과하며 2003년에도 38.1%에 불과하다(허선, 2004 참조). 근로자가구소득의 1/3에 미치지 못하는 저평가된 액수이다. 액수의 문제를 떠나서 계측방식이나 조작가능성도 큰 개념이다. 따라서 현대적 빈곤개념에 걸 맞는 상대적 빈곤을 측정 가능하면서도 기준의 객관성을 제시할 수 있는 OECD기준인 중위소득의 40% 이하로 추정하면 2000년 기준 11.53%, 50%의 소득기준으로 16.99%에 이른다(유경준, 2003 참조).
한편, 근로빈곤층의 취업실태를 ‘소득계층별’로 살펴본 한 연구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노대명, 2005), 임금근로자 중에서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높으며, 실업자 비율 또한 비빈곤층(가구소득이 최저생계비 이상인 가구)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빈곤층의 실업률은 24.2%로 비빈곤층의 4.7%에 비해 약 5배가량 높다. 이어 근로빈곤층 중 임금근로자와 비임금근로자의 비율은 각각 60.9%와 39.1%로 나타난다. 끝으로 근로빈곤층 임금근로자 중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율은 각각 12.2%와 87.8%이며, 일용직 임금근로자의 비율이 54.5%로 과반수를 넘어서고 있다.
<표 4 노동빈곤층의 취업실태 (단위 : %)
근로빈곤층2002년도 빈곤층 빈곤층 차상위층 비빈곤층 전체주된활동임금근로자35.7 13.028.741.637.7비임금근로자22.916.417.015.115.2실업자 18.7 8.9 7.9 3.1 3.9비경제활동인구41.460.445.635.038.4임금 vs 비임금임금근로자60.942.462.066.865.1비임금근로자39.157.638.033.234.9임금근로자
종사상지위상용직 12.2 5.5 15.3 48.2 45.6임시직 33.3 24.6 34.5 31.0 30.8일용직 54.5 69.9 50.2 20.8 23.6비임금근로자
종사상 지위고용주 2.9 1.8 1.5 14.2 12.5자영자 62.0 66.6 70.3 60.4 61.4무급종사자 35.1 31.6 28.2 25.4 26.1실 업 률24.2 22.4 14.5 4.7 6.4
자료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2년 저소득층 자활사업 실태조사』
주 : 빈곤층은 노인, 장애인 등 근로무능력자를 포함하여 취업실태를 나타낸 것임
이 점에서 사회양극화 현상은 최근 회자되고 있는 ‘신빈곤(new poor)’ 문제를 설명하는 유용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빈곤이란 동일한 빈곤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일을 하는데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노동빈곤층(working poor)’이라는 새로운 빈곤현상 또는 빈곤 생산메커니즘에 대한 해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니(GINI) 계수, 소득분배율 등 모든 정부 공식 통계에서 우리 사회에 최소 4백만~최대 1천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빈곤층이 있음을 보여줘 IMF 이후 한국사회의 소득분배구조의 악화를 실증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최근의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빈곤이‘구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급속한 산업·고용구조 변화로 노동빈곤층의 구조화 가능성과 고임금 정규직 핵심노동자층과 저임금 비정규 주변노동자층으로의 양극화 현상이 우려되는 현실이다.(<표4>,<표5> 참조)
또한 그렇게 된 원인으로서 민주주의의 본질이 왜곡된 채 보수적으로 흘러왔으며 87년 우리가 기대했었던 민주화의 꿈이 한 순간의 짧은 봄처럼 끝나버렸다는 허탈감이다. 대신 김명인의 (『황해문화』주간)말대로 " 민주정부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오면서 민주화와 정권교체가 곧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가를 확인했“을 뿐이다.
현실의 비정함에 대중의‘환상’이‘환멸’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노동소득 분배구조의 악화 → 저소득층 생활난 가중 → 경제의 위협 →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기반 잠식 →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오고 있다(최장집 2005).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진전되었으나 경제적 평등의 정도로 평가되는 사회적 민주화, 실질적 민주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는데, 특히 신자유주의적 시장숭배주의가 기존
<표 5> 노동빈곤층 규모 (단위 : 빈곤가구 및 빈곤가구원의 %)
협의의
근로빈곤층광의의
근로빈곤층근로무능력
빈곤층합 계최저생계비 기준
빈곤층가구47.252.8100.0개인(명)31.961.838.2100.0중위소득 60% 기준
빈곤층가구55.244.8100.0개인(명)36.869.630.4100.0
주 : 최저생계비와 중위소득 60%기준을 <경상소득 - 공공부조성 이전소득>에 적용하여 추정한 전체 빈곤층 비율에서 근로빈곤층의 비율을 가구 및 개인단위로 추정, (노대명,2005)
양대 보수정당 넘어 사회 구성원모두에게 점차 신념화되어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대다수 노동자가 배제된 한국 민주주의의 협소성은 지역대립이나 과거사 청산 등을 둘러싼 보수정당간의 파당적 경쟁만 심화시킨 가운데, 빈곤해소 등 사회정책은 전면으로 의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노동자민중들의 대량실업과 궁핍화속에서 가진 자들의 투기열풍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가령 부동산 문제만 해도 노 정권 출범이후 3년여 동안 정부 보도자료 1만건, 부동산 정책 971건에 걸쳐 각종 부동산 대책을 내놨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 정권은 그 동안 크게 2003년 발표한‘10·29 주택시장 종합대책’, 2005년 ‘8·31 부동산 종합대책’, 2006년 ‘3·30 부동산 후속대책’으로 이어지는 각종 대책을 내놓았다.
<표 6> 참여정부의 주요부동산 대책
그러나 부동산시장과 투기세력들은 대책이 나올 때마다 일시적으로 움츠리다가 이내 상승세로 돌아섰다. 예컨대 참여정부 집권이후 아파트시가총액은 276조원 상승했다. 판교개발이 시작되면서 주변지역인 용인분당의 집값은 11조, 강남권은 23조원이 폭등하였다. 결국 참여정부 3년 부동산정책은 역설적이게도 투기 억제 효과보다는 투기개발 욕구만 자극한 결과만 초래했다. 더구나 행정수도 이전이다, 지역 균형발전이다 해서 전국토를 온통 들쑤셔 놓아 전국적인 투기 광풍에 이제 노동자민중들은 분노를 넘어 절망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에 국민대중들은 그 정도 실력으로는‘백약이 무효’라는 반응과 함께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다 . 그도 그럴 것이 2003년 이후 한강을 기준으로 한강 이북 지역의 집값은 8%이상 상승했으며 전세값의 상승률은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8.31 정책 이후 1년간 전국 아파트 값은 5.5%, 서울은 9.7%, 수도권은 8.6%, 강남 11구는 평균 12.2% 상승했다.
더욱 압권인 것은 최근 발표된 판교신도시 아파트 분양가는 8억원대라는 사실이다. 이는 연봉 3천만원의 서민이 이를 매입하려면 도시가계 저축률 25%를 적용해 연 750만원, 월 62만원씩 106년을 저축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수도권 집값 안정을 위해 강남 대체도시 로 개발한다는 판교의 실제 모습이다.
‘바다이야기’는 1997년 이후 줄곧 우리 사회를 모종의 ‘흥분’과 절망 혹은, 불안과 공포 그리고 여기서 탈출하려고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들을 ‘집단적 광기’로 이끌었던 일종의 정치사회사적 ‘사건’인 것이다.
중국의 실용경제 저술가 구구의『당신은 왜 가난한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자원이다. 부자들의 먹이가 함유된 진흙이다. 그 자원과 진흙을 통해 부자가 되는 이들은 따로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가난하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비법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솔깃 하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자 되는 법’에 관한 책은 당연히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 그런데 부자가 되는 법이라는 책을 통해 부자가 되는 사람은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책을 쓴 사람이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쓴 로버트 기요사키가 부자가 되었듯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땅을 사라고 부추기는 사람이 돈을 벌지 그 말에 현혹되어 땅을 산 사람이 돈을 벌지 않는다. 다단계를 통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 가난한 사람을 자원삼아 그들이 부자가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바탕으로 부를 다시 재생산 한다.
누구나 잘 알듯이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빚을 지고 쫓기는 사람들, 직장에서 정리해고된 채 전전하는 사람들이 주로 도박을 한다. 그들이 부자가 되는 경우는 없다. 반대로 대박을 터트리고 인생역전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먹이삼아 부자가 된다. 정말 부자들은 이러한 도박에 빠질 리가 없고 파탄 나는 경우도 드물다.
도박은 과연 질병인가? 실제로 도박 때문에 약물 치료를 받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환자는 아니다. 모든 정신 장애가 정신병이 아니듯이, 오히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심리적 약자인 것이다. 도박에 빠질 만큼 심리적으로 약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도박은 더욱 고약하다. 오갈 데 없이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흔히 남성보다 여성이 약자라고 한다. 그러나 도박의 문제에서 보자면 현재까지는 남자들이 더 약자일 수 있다. 특히 한국과 같이 패자부활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회,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왜 그런가?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 부를 가지고 있어야 대접을 받는다는 인식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남성들이 막판에 몰려 한꺼번에 이러한 점을 거머쥐려고 한다. 그 대표적 수단이 도박이다. 상품권과 함께 무수히 뿌려진 ‘바다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점을 파고들었다.
한편 도박은 가난하고 섬약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성취감, 혹은 보상을 통해 이들을 도박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현실에서 무기력한 이들일수록 이러한 약간의 성취감에 취해 도박에 빠지고 만다. 심리적으로 심약한 단계에 있을수록 이러한 중독의 메커니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가난하고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바다 이야기’는 대박의 환상을 심어주고 조폭은 떼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로비를 하고 자신의 조직을 키우면서 떵떵거렸다. 악덕업주들은 벌어들인 돈을 빼돌리고 탈세를 엄청나게 해댔다. 탈세하면 이는 곧 약자에게 돌아갈 국가 예산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므로 이들은 약자들을 이중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유명한 인터넷 기업들도 이들을 자원삼아 부를 쌓았고, 정치권에 로비를 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던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게임을 문화산업으로 성장시키고 이익을 창출한다며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돈을 통해 외유를 다녀오고 성장목표 수치를 채웠다. 상품권을 허용한 문화관광부나 증세 대신 수십여 종의 복권 발행과 과천 경마장에서 화상 경마까지 가난한 이들을 돈덩이로만 보는 논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 똬리가 사행성 오락을 통해 수많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자원 삼았다. 물론 그들이 피와 살을 가진 살아있는 생명, 감정 그리고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 바 없다. 그들은 자원이고 진흙이고 이끼이고 잡아먹히게 되어있는 1차 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70년대 세계대전이후 지속되었던 브레튼 우즈체제가 붕괴하고 변동환율제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가 탄생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가 이전의 질서와 구분되는 확연한 특징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있다 전간기의 자본의 유동성이 한 몫을 담당했던 세계 대공황의 결과 세계대전이후에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지하고 어느 정도의 무역을 장려하는 연계된 자유주의의 경제 질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위 트레핀 딜레마(1960년 로버트 트fp핀이「금과 달러의 위기」에서 브레턴우즈체제의 기축통화의 기본 요소인 유동성과 신용성 사이의 모순을 야기하는 달러교환제도의 결함을 지적한 것을 말함.)라고 하는 모순은 브래튼 우즈체제 내에서 미국의 계속된 적자재정을 낳았고 결국은 미국을 선두로 변동환율제를 실시하면서 세계 시장의 단일화를 향한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로 한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새롭게 정립된 국제 경제 질서의 가장 큰 특징은 ‘카지노 자본주의’ 즉 금융자본의 세계화에 있다. '카지노 자본주의'란 투기적 자본 활동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경제를 말한다. 즉 국가간 금융의 자유로운 흐름이 형성이 됨으로서 거대한 자본들이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을 계속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국의 언론인 출신 국제 경제학자인 수전 스트레인지가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저서에서 처음 제시한 이 개념은 주로 주식시장에서 세계 각국의 투자기업과 개인투자자들이 성장세에 있는 국가나 기업의 주식을 집중 매입했다가 차익이 가장 많이 남을 시점에 주식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남기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자본의 이동은 주가가 오를 것이 예상될 때 재빨리 샀다가 수익이 남을 때 재빨리 파는 '치고 빠지기'식으로 이뤄지는데 결과적으로 투기자본의 대상이 된 국가와 기업은 금융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본의 급작스러운 유출로 인한 모라토리움(국가부도 사태)의 현상이다. 실제 1970년대 이후 남미와 유럽 그리고 1990년대 말 아시아 거의 전 지역에서 보였던 금융위기의 모습은 이러한 금융의 세계화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큰 자본을 가진 소수만이 더 많은 부를 가져가게 되고, 나머지 투기대상들은 이득을 얻지 못하고 경제 불안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악순환을 겪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의 주사위을 던지는 자는 거대자본이고 사용되는 주사위는 소액주주들(일명 개미들)과 금융후진국인 것이다.
이럴 경우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인간 세계가 정글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다시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인간세계가 자연세계와 다른 것은 정부의 공공성,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약자를 보호하는데 있다. 그러나 정부와 제도적 장치들이 오히려 가난하고 약자인 그들의 먹이화를 부추겼고, 약육강식의 세계와 다를 바 없게 만들었다. 아니, 약자를 보호해야 할 정부와 공공 제도가 그들을 먹이 삼아 자기 성장을 했다. 그러니 정부와 공공제도의 존재 이유가 없어졌다. 지금은 약육강식의 시대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 답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