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노협(병원노조협의회)의 문제는 바로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주의 문제다 .
민주노총이 혁신되어야 한다는 것은 98년 이후, 민주노총 내부에서 강화되고 있는 관료화, 보수화, 개량화된 흐름과 투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료화, 보수화, 개량화 된 흐름은 산별노조운동에서도, 총연맹의 조직구성과 민주주의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문제다.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주의가 가지는 중요성은 단순히 조직의 원활한 운영과 효율성을 기해서가 아니라,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실천으로 확보한 자신들의 가치를 -평등, 인간에 대한 존엄, 연대-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전복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노동자 민주주의에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이 세계의 미래이고, 우리들의 가능성이고, 우리들이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사랑이다.
흔히 민주집중제라는 말이 사용된다. 토론은 자유롭게, 행동은 통일되게라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이 말은 원래 맑스주의 당의 운영원리, 혹은 철의 규율을 갖는 볼세비키형 당의 조직운영원리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맑스, 엥겔스 시대나 심지어 레닌 시대에도 민주집중제라는 말은 등장하지를 않는다. 오히려 스탈린시대에 들어오면 그 말이 남발되고, 말이 좋아 민주집중이지 “집중”만이 강조된다. 이러한 풍토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없이 사회주의 운동을 받아들인 남한 운동에서 폐해로 작동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조직운영과정에서 민주집중제만을 강조할 수도 없는 것이고, 최근에도 민중연대 운영과정에서 다른 사례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2005년도 “양극화해소를 위한 국민연대 발족”과 관련해 민중연대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을 했음에도, 행동통일은 강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외국의 운동단체에서 완전합의가 아닌 이상, 행동통일을 굳이 강제하지 않는 경우는 수없이 발견된다.
노동조합운동에서 민주집중제가 강조되는 것은 자본과의 투쟁에서 단결이 요구되고, 단결은 조직의 결정을 성실히 수행하는 속에서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무차별적으로 강조하여 조직내의 이견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을 억누르려고 사용되는 것은 스탈린주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조직내의 이견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것은 사안별로 적절한 방식을 찾으면 그만인 것이다. 엄연한 갈등이 존재하는데 이를 다수의 이름으로 억누르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먼 행동인 것이다.
일국 일노조니, 일산별 일노조니 하는 말이 민주노총에서 무차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한국노총과 분리되어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민주노총의 존재는 일국 일노조를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일국 일노조라는 말에서 유추해 산별노조 결정에 이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산별노조를 결정하는 것은 대략적인 기준은 존재하지만 순전히 역사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 레모나를 생산하는 업체의 노동조합이 금속연맹을 선택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단위노조가 자신의 상급단체를 선택하는 것은 높은 교섭력에 대한 요구와 성과에 대한 기대말고는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민주노총은 장기적으로 단일노조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이미 산별노조가 성숙되어 있는 독일과 같은 곳에서 줄기차게 강조되고 있는 일이다. 따라서 산별노조의 경계를 세우는데 신경이 곤두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이를 위해 민주집중제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행동통일을 강조하는 것은 더더욱 사태를 더욱 꼬이게 할 뿐이다.
지금 병노협과 보건의료 노조의 갈등은 민주노조 운동의 내부 민주주의가 운동의 발전에 비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사례이다.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은 내부민주주의의 강화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고, 완전한 직선제와 소수자 할당의 원칙이 관철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