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의 인식과 노동자 계급의 실천
천 덕
들어가며
평양 중앙통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핵실험 계획을 발표한 지 엿새 만인 10월 9일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단행했다. 보도문을 옮기면 :
“온 나라 전체 인민이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에서 일대 비약을 창조해 나가는 벅찬 시기에 우리 과학연구부문에서는 주체 95년(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과학적 타산과 면밀한 계산에 의해 진행된 이번 핵시험은 방사능 유출과 같은 위험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핵시험은 100% 우리 지혜와 기술에 의거해 진행된 것으로서 강위력한 자위적 국방력을 갈망해 온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커다란 고무와 기쁨을 안겨준 역사적 사변이다. 핵시험은 조선반도와 주변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동당 총비서 추대 9주년이 하루 지나고 노동당 창건 61주년을 하루 앞둔 시점에 핵실험을 전격 실시함으로써 체제와 정권의 우월성을 대내적으로 한껏 과시했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상황은 딴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대응 기조에 대해 아베 총리와는 이견이 없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북한 핵실험 실시와 관련 한 특별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핵실험 실시는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안정을 위협하는 중대사태”라면서 “정부도 이 마당에 포용정책만을 계속 주장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앞서 청와대 윤태영 대변인은 정부 성명을 통해 “정부는 북한의 핵보유를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며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할 것이며 특히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즉각 논의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우상호 대변인은 북한의 핵실험 사실 발표에 대해,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행동을 한 데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이 져야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와 관련,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적 행동이자 한반도 전쟁에 버금가는 위협적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나경원 대변인은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 정권을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규탄한다.”고 말하면서 “정부는 비상사태 돌입을 선언하고 즉각 안보내각을 구성하라.”고 촉구했다.
민주당 이상열 대변인도 “국제사회의 거듭된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것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 행위”라며, “이로 인해 발생할 모든 책임은 북한이 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이어 “북한의 무모하고 무책임한 핵실험은 용납될 수 없다.”며, “정부는 민족의 명운이 걸린 사안인 만큼 북한의 핵실험 동향을 신속히 파악하고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비판 대열에 민주노동당도 열외가 아니었다. 당 박용진 대변인은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것은 유감스럽다.”면서, “그러나 군사적 행동을 유발 또는 유도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에도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른바 ‘국제사회’의 반응도 비난일색이다. 미국 백악관은 북한 핵실험에 대해 ‘국제사회에 도전하는 도발적 행동’이라고 규정했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9일 노무현 대통령과 만난 한일 정상회담 자리에서 “국제사회가 북한의 행동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중국도 북한이 “국제사회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핵실험을 벌였다.”며, 종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비난을 담아 성명을 냈다.
러시아도 9일 발표한 성명에서 “북한이 NPT 체제 복귀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행동을 조속히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면서, “우리는 유엔 안보리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함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강력한 대응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뉴욕 현지시간으로 8일 밤늦게 북한의 핵실험 소식이 전해짐에 따라 정확한 정보수집에 나선 뒤 9일 아침 긴급회의를 소집키로 했다. 회의가 시작되면 바로 대북 제재 논의에 들어갈 것으로 보이며, 제재 결의 채택도 큰 논란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유엔 헌장 7장에 따른 제재가 결정될 것인데, 다만 7장 42조의 무력제재까지 결정할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에 앞서 유엔 안보리는 의장성명을 채택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의 요구를 무시하고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유엔 헌장에 따른 책무에 맞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혀 핵실험 시 강력하게 제재를 가할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한편 이에 앞서 북한은 지난 10월 3일 핵실험(북조선식 표현으로는 핵 시험)을 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북한은 외무성이 발표한 성명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연구 부문에서는 앞으로 안전성이 철저히 담보된 핵시험을 하게 된다.”고 선언하고, 그 이유로 “미국의 반(反)공화국 고립 압살 책동이 극한점을 넘어서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오고 있는 제반 정세 하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태발전을 수수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성명의 내용을 간추려 옮기자면 : “첫째, 미국의 극단적인 핵 전쟁 위협과 제재 압력 책동은 우리로 하여금 상응한 방어적 대응조치로써 핵 억제력 확보의 필수적인 공정상의 요구인 핵시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 둘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절대로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핵무기를 통한 위협과 핵 이전을 절대 불허할 것이다. ... 우리의 핵무기는 철두철미 미국의 침략과 위협에 맞서 우리 국가의 최고 이익과 우리 민족의 안전을 지키며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믿음직한 전쟁억제력으로 될 것이다. ... 셋째, 우리의 최종목표는 조선반도에서 우리의 일방적인 무장해제로 이어지는 ‘비핵화’가 아니라 조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모든 핵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비핵화이다. ... 우리는 온갖 도전과 난관을 과감하게 뚫고 우리 식대로 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이다. (이상 중앙일보 10월 4일자 참조)
이 갑작스런(?) 북한의 핵실험 발표로 이 나라의 정치권과 언론은 크게 당황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 또한 크게 놀라는 듯한 말들을 쏟아내었다.
우선 정치권의 경우부터 보자. 정부는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북한 외무성의 성명이 발표된 직후인 3일 저녁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 주재로 관계부처 고위급 대책회의를 열어, 정부 차원에서 준비해 온 기존의 ‘북한 핵실험시 대처방안’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검토하고 대응방향을 점검했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우선 북한의 핵실험 징후를 탐지하기 위한 경보체계를 강화하기로 했다”며 “노무현 대통령은 수차례에 걸쳐 북핵 불용 원칙을 표명해 왔고,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이 핵실험을 할 경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될 것임을 언급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4일 아침 청와대에서 열린 장관급 안보정책 조정회의에서 방침을 조율하고 이를 오전 외교통상부 대변인 성명으로 발표했는데, 이 성명에서 노무현 정부는 핵실험 계획을 즉각 취소할 것을 촉구하면서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모든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북한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4일 오전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근태 의장은 “북한은 상황을 오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당 안보특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하며, 남북문제에 대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 안보특위는 별도의 성명을 내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포함한 모든 경협 중단 등 대북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주문했다.
이상열 민주당 대변인은 “핵실험은 북한의 고립을 결정적으로 자초할 것”이라며, “북한은 6자회담의 테이블로 조속히 복귀하라”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도 성명을 내어 “군사적 해결방식을 부추기는 어떠한 행동도 강력하게 규탄할 것”이라며 “정부는 남북대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핵실험 행동 돌입 방지 노력을 해야 하며, 미국 당국 또한 북미 직접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상 한겨레 10월 4일자 및 5일자 참조)
언론들의 주장도 강경 비난 일색이다. <한겨레>는 5일자 사설에서 북한의 핵실험 계획을 ‘핵 모험주의’로 규정하고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라면 국제사회 흐름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 사고체계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북한은 즉각 핵실험 선언을 철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9일자 사설에서 중앙일보는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북한 핵실험 뒤의 대책이 아니라 핵실험 방지다. 그러려면 지금까지와 같은 소극적·유화적 대응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 개성공단·금강산 관광을 포함한 일체의 대북지원이 중단된다는 입장을 북한에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북한의 핵실험 공갈과 대한민국의 선택’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사설에서 “북한의 재래식 전력을 대상으로 한 현재까지의 한국의 모든 국방 시나리오는 북한이 실제로 핵무기를 손에 쥐는 순간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 이제 이 정부는 북한이 핵실험 예고를 통해 핵 공갈 수위를 한 단계 올리겠다는 이 순간에도 미북 사이의 중재 역할이나 ‘민족끼리’라는 허황된 노선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했다.
문화일보는 “북핵,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는 북핵 불용 원칙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북핵은 용납할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고 밝혔다.
관련 국가들의 반응 또한 다르지 않다. 미국은 북한의 핵실험 발표에 대해 즉각 ‘도발적인 행동’이라고 규정하며 적극적인 대응방안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핵 기술을 확산하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북한 주변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핵 실험에 반응하고 우려할 것”이라며 “그러한 반응이 북한으로 하여금 6자회담에 돌아오도록 하는 데 충분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존 볼턴 유엔주재 미 대사는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핵무기와 결합하면 국제평화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안보리가 단지 성명발표가 아닌 ‘예방외교’ 전략을 마련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와 더불어 미국은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국제사회가 공동대응을 할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단호한 대응을 주장했다. 6일에는 마침내 북한 핵실험 계획 포기를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 채택을 관철시켰다.
한편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3일 “북한이 만에 하나 핵실험을 실시한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국제사회가 단호한 대응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3일 미국과 워싱턴에서 양국 국가안보보좌관 회동을 가지고 “북한의 핵실험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비상사태에 대한 상호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또 8일에 있은 중일 간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북한의 핵실험 움직임에 깊이 우려한다,”고 하면서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도록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후진타오 주석에게 요청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우리는 북한의 안보 우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만 이 문제는 6자회담에서 다뤄져야 한다.” 면서 북한 측의 자제와 ‘올바른 선택’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중국 외교부는 우다웨이 부부장 주재로 4시간 넘게 마라톤 대책회의를 열었으며 4일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북한이 핵실험 문제에 있어 반드시 냉정함과 자제심을 유지할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핵실험 선언과 관련, 3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을 강력히 규탄하는 의장 성명 또는 언론발표문 채택 문제를 논의했다.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 문제는 6자회담에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6일에는 북한의 핵실험 포기를 촉구하는 의장성명 채택에 동의했다. 이 성명은 “북한의 핵실험 계획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국제평화와 안보에 명백한 위협이 될 핵실험은 물론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는 어떠한 행동도 자제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또 “만약 북한이 국제사회의 합의를 무시하고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유엔 헌장의 책무에 부합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북한은 핵실험 계획 발표 이후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어디에도 우군은 없다. 굳이 찾자면 러시아 정도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은 4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평의회(PACE) 회의에 참석해, “금융문제를 포함해 6자회담 재개를 방해하고 있는 남은 문제들을 지체 없이 해결해야 할 시간이 됐다.”고 말하면서 미국과 북한이 직접대화에 나서라고 촉구했다는 것이다.(<한겨레> 10월 5일자 참조)
추석을 보내는 지난 며칠 사이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이처럼 엄청나게 소용돌이를 쳤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9일 오후 10시), 북핵 문제에 관해 미 부시 대통령이 곧 기자회견을 한다고 한다. 또 유엔 안보리에서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제재를 포함한 제재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엄중하고 숨가쁜 사태 전개를 남한의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한겨레> 신문이 주장하는 대로 간단히 ”악의적 의도“이거나 ”비현실적 사고체계의 산물“로 치부해 버려도 될까? 민주노동당이 발표한 성명대로 "군사적 해결방식을 부추기는 어떠한 행동도 강력하게 규탄“하는 것과 북미 간 및 남북간 대화를 통한 해결을 촉구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현실인식의 점검
진보적인 언론이라고 자처하는 <한겨레> 신문이 북한의 핵실험 계획 발표에 대해 “국제사회의 흐름과 동떨어진 비현실적 사고체계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면서 이 땅의 진보세력이 얼마나 후진적인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모두들 ‘국제사회의 뜻’이라는 규범을 잣대로 들이밀고 있는데, ‘국제사회’라는 담론 자체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나라들의 관료들이 즐겨 쓰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미 제국주의를 정점으로 하는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의 압박에 맞서서 자신의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를 사수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행위에 ‘국제사회의 흐름’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판단하겠다는 것은 북한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약자인 한 피지배자가 더 약한 다른 피지배자에게 강자인 지배자의 법칙에 따르라고 강요하며 핍박하는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10월 5일자 <한겨레> 신문의 여론 란에 실린 ‘분할통치와 죄수의 딜레마’라는 글에서 그 같은 상황을 잘 비유해 주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어느 큰 집단 안에 두 개의 작은 소집단이 있다고 하자. 두 개의 소집단이 서로 힘을 합쳐 단결·투쟁할 때 집단 전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많아진다. 그러나 각 개별 소집단이 이기적으로 생각하여, 다른 소집단은 자기 소집단을 지원해 주되 자기 소집단은 상대방을 지원해 주지 않으면서 성공의 결과를 독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두 소집단이 똑같이 이렇게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면 결국 모두 상대방과 단결·투쟁하지 않게 되면서 집단 전체적으로는 최악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류동민 교수는 이 딜레마를 소개하면서 ‘부딪치며 길 자체를 만들어가는 이들에게는 출발점은 서로 협력하는 것,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류 교수의 글은 남한의 노동자 계급 안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집단을 놓고 한 이야기이지만, 한(韓) 민족 안의 남북한 두 국민을 놓고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지금 북한의 핵실험을 놓고 북한을 맹비난하며 적대하고 있는 남한 정부와 정치권은 미·일 제국주의의 지배와 착취에 맞서 자신의 민족적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서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분할통치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북한은 왜 핵실험 계획을 발표하여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가? 북한이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 핵무장은 제2의 조선전쟁을 막기 위한 최후 수단이다. 성명서는 “오늘 조선반도에서는 미국의 날로 가중되는 핵 전쟁 위협과 극악한 제재 압력 책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국가의 최고 이익과 안전이 엄중히 침해당하고 우리 민족의 생사존망을 판가리 하는 준엄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 미국은 최근 강도적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채택으로 우리에게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데 이어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제2의 조선전쟁 도발을 위한 군사연습과 무력증강 책동을 더욱 더 광란적으로 벌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이나 핵실험 계획 발표는 북미 간 직접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카드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또 설사 북한이 핵실험을 하더라도 곧바로 미국의 군사공격과 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한겨레> 신문은 이와 관련, “북한이 3일 외무성 성명대로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는 상당수 국내외 전문가들의 전망이 일치한다. 또 핵실험 강행이라는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은 한층 강화되겠지만, 그렇다고 전쟁 직전 상황으로 사태가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현실인식이 타당하다면 “자위적 전쟁억지력을 강화하는 새로운 조치”로서 핵실험을 실시하고자 한다는 북한의 주장은 순전한 허구가 된다. 핵실험을 해도 전쟁위기가 고조되지 않을 판인데 북한이 핵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전쟁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이 핵을 카드로 하여 북미 간 직접협상과 일괄타결을 이끌어 내고 이를 통해 체제전복 압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북미 수교와 국제관계에서 정상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상충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핵무기 보유는 전혀 미국을 직접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는 지렛대나 카드가 되지 못하는 반면, 오히려 군사적 제재를 포함한 제재강화를 불러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국제사회의 흐름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인 사고의 소산이다.
이런 인식은 북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북한이 선제 핵 공격을 포함한 전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다. 미국에 의해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이후 북한은 이른바 ‘깡패국가‘로, 그 가운데서도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우선적인 침공 대상인 ’악의 축‘으로 지목되었다. 그 후 이라크는 침략전쟁의 희생물로 지금도 고통 받고 있고 그 다음 순서에 이란과 북한이 올라 있다. 또한 네오콘(미국 지배층의 생각을 대표하는!)은 선제 핵 공격을 침략전쟁 전술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방전쟁까지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지경이다. 또 동북아에서 일본은 정상국가화라는 미명 아래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 침략전쟁에 적극 나서기 위해 군비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이런 움직임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헌법 개정까지 추진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을 없는 일인 듯이 치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래서 북한이 핵실험 실시 계획 발표 6일 만에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실시한 까닭은 계획 발표 이후에도 미국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직접협상에 응하지 않음에 따라 일찌감치 핵실험 카드를 협상용으로 사용할 여지를 배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즉 북한은 핵실험 카드를 자위적 국방력 강화와 전쟁억지력 차원에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핵보유 기도가 오로지 군사적인 차원의 전쟁억지 수단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협상의 카드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조선반도에서 우리의 일방적인 무장해제로 이어지는 ‘비핵화’가 아니라 조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모든 핵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비핵화이다.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원칙적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북한의 이런 의향을 엿볼 수 있다.
전쟁억지 수단인 동시에 협상의 카드 내지 지렛대로서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확보하고자 하는 북한의 움직임을 오늘날과 같은 ‘무장한 세계화’와 ‘테러와의 전쟁’ 시대에 비합리적 사고체계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란의 평화적 핵시설도 그러하고 차베스의 반미주의도 그러할 것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같은 경우는 합리적이지만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도 레바논의 헤즈볼라도 모두 비합리적일 것이다.
요컨대 미사일 및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하는 북한의 의사는 간단하게 ‘핵 모험주의’라고 매도해 버리기 어려운 현실적인 선택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관계자들이 협상을 통한 해결을 입에 올리지만 정작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일 제국주의이다. 이렇게 협상을 거부하고 각종 제재와 체제 전복기도를 강화해 올 때 어떤 다른 선택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도 북한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고 무조건 6자회담 테이블로 와서 ‘말로 씨름하라’고 하는 것은 마치 지난 군사파쇼 통치 당시에 우리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법을 어기는 전투적 투쟁을 버리고 합법적인 활동과 의회정치로 나아가라고 하던 것에 비견할 수 있다. 그 당시로 말하면 연합단체를 구성하는 노동조합의 기본적인 활동조차 합법성이 인정되지 않았었는데 합법적인 노조활동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겠으며, 또 어찌 합법적인 노동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악법을 어기고 전투적으로 투쟁한 덕분에 총자본이 타협을 제안해서 노동조합도 노동정치도 합법적인 활동의 권리를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닌가? 계급투쟁에서 남한 노동운동이 총자본의 법질서를 어길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지금 북한으로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합법적’인 국제사회의 규범을 어기는 길밖에 달리 선택지가 없는 것이 아닐까?
정치적 입장 검토
현실인식 문제는 그렇다 하고, 민주노동당이 발표한 바대로 “군사적 해결방식을 부추기는 어떠한 행동도 강력히 규탄한다”는 입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군사적 해결방식을 부추기는 행동이란 어떤 것인가?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쉽게 말해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전쟁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행동은 어떠한 것도 강력히 규탄하겠다는 말로 이해된다. 하지만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행위도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충돌을 재촉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때 위협하고 침략하는 행동과 저항하는 행동이 동일하게 ‘군사적 해결방식을 부추기는 행동’으로 비난된다면, 그리하여 위협과 침략에 굴종하는 것이 강력한 규탄을 면하는 길이 된다면 그 규탄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평화의 가치는 아주 소중하다. 그러나 평화가 단지 물리적 충돌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데 그친다면 그러한 평화를 절대화하는 평화주의는 결국 현존의 지배질서를 영속시키고 정의롭지 못한 질서에 대한 저항을 억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배자들은 오늘날 집회와 시위를 오직 평화적으로만 하라고 한다. 그러나 미 대사관 주변에서는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행동도” “강력히 규탄한다.”는 것과 같이 단호한 방식으로 대화와 협상에 의한 ‘평화적’ 해결만을 긍정하고 그것에 벗어나는 일체의 해결에 대해 ‘강력하게’ 부정하는 데 대해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정의롭든 아니든 묻지 말고) 무조건 법질서를 따르라고 강변하는 자본에게서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은 사회적 개인, 공동체적 개인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연합을 이룰 수 있고, 그럼으로써 상품-자본관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자본과 싸우면서 자본을 닮게 된다. 치열하게 싸울수록 더욱 닮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운동은 이런 자기변화 지향을 실천의 중심원리로서 확고하게 틀어쥐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적/공동체적 개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무엇보다도 타자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때 타자란 타인의 육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과 행위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북한 동포를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들의 생각과 행위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 이런 측면이 부족하지는 않은가?
실천적 대안의 모색
이상에서 고찰한 것을 간단하게 간추려보면 : 동북아와 한반도에 전쟁위험이 현존하며 비상하게 고조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 실시와 핵무장 기도는 이런 사태 전개에 대한 나름의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생각을 비합리적인/비이성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고 치부하거나 군사적 해결방식 즉 전쟁을 부추기는 모험주의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의 규범에 길들여져 있는 남한 사람들의 일방적인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북한 사람들과 당국의 입장을 역지사지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할 바를 다했다고 하겠는가? 그 정도라면 노무현 대통령도 어느 정도는 하고 있지 않은가? 그도 핵무기와 미사일이 자위수단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거나 ”이해할 만하다“고 발언한 적 있다. (2004년 11월 13일 로스엔젤레스 연설에서)
한 때 ‘북핵 문제’냐 ‘북미 문제’냐 하는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 움직임을 둘러싼 갈등을 그것만 따로 떼어내 살필 것이 아니라 북한과 미 제국주의 간의 갈등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북핵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는 지금에야말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즉 북미 문제는 남한이라는 존재를 떼어놓고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으며, 그런 점에서 남·북·미 3자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아가 동북아 각국들과 관계가 있는 문제이며, 더 나아가서는 세계체제 전체와 관련된 문제다.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남·북·미 3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서, 북핵 문제는 북미 간의 한국전쟁의 전후 처리 과정과 맞물려 전개되고 있다. 이 문제는 또한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미 제국주의의 계속적인 한반도 지배 기도--냉전 시기에는 분단 지배를 추구했다면 지금은 분할 지배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지만--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북한 간의 통일 문제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야말로 포괄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북미 문제로서만 포괄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며, 남·북·미 간에 포괄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우리 노동운동은 이 지점과 관련하여 어떠한 비전이나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여전히 민족해방파와 민중민주파로 나뉘어 다른 노선을 고수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각기 자신의 변혁적 입장을 고수하지 못하고 개량화 되어 있지는 않은가? 민족해방파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변혁 노선은 북한 사회주의가 남한 자본주의에 대해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는 조건에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노선이다. 북한을 민주기지로 하는 전제 위에서, 남한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남북이 연방정부를 수립해서 북 우위 하에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민족을 통일해 나간다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망은 오늘날 현실성이 대폭 약화되었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남한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가 크게 약화된 데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남한에 대한 북한의 정치적 우위도 붕괴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그 변혁노선은 물리적 힘으로 전화되지 못했고, 그 결과 민족해방파는 대부분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 민족개량주의 정파로 변질되고 있다. 이른바 ‘386’이 실세인 노무현 정권의 행보와 그 핵심 지지층의 정치적 동향이 전자를 보여준다면, 민족해방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북핵 관련 성명서가 후자를 보여준다. 그 어디에도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민족의 해방과 통일에 대한 확신과 낙관적인 전망을 발견할 수 없다.
반면, 민중민주파는 애당초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한 데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대부분 변혁적 전망을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 정파로 변질해 버렸다. 이렇게 민중민주파 역시 개량화되어 제국주의, 자본주의 체제내적 활동에 자신을 가두어 버림으로써 반제국주의 입장에 비타협적이고 사회주의 체제를 견지하고 있는(참된 사회주의인지 아닌지 이론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찌되었건) 북한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다.
요컨대 낡은 대안은 무너졌으나 새로운 대안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대안을 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종래의 신념과 전망이 무너졌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신념과 전망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고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예컨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은 국가사회주의적인 것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국가사회주의적인 체제의 극단에 수령제가 있다. 대안의 사회주의는 철저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형용사를 하나 붙이는 것으로 충분한 해답이 되기는 어렵다. 의회주의와 대리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 경제와 정치가 절대적으로 분리된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각기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사회적 관계로서 통일되어 통제되는 민주주의를 지향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디에 그런 모델이 있는가? 꼬뮌인가? 소비에트인가? 그것은 “부딪치면서 길 자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에는 1인 1표를 원리로 하면서 경제에는 1원 1표를 원리로 하는 것처럼 정치와 경제 영역에 각기 다른 원리를 적용하는 사회는 아니어야 한다.
다른 한편, 이제 민족의 통일은 북의 정치적 우위 하에 연방제 형태로 실현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도덕성은 북측에 우위가 있을 지라도 힘은 남측에 우위가 있는 것이 현실(그러므로 북이 정치적 우위를 가지지 못하는 상태)이고, 이 현실은 상당한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방제 통일이란 어느 한 쪽이 월등하게 우위에 있을 때 그 우위에 있는 쪽의 운행원리가 다른 쪽으로 점차 관철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 두 체제의 원리가 각기 장기간 병존한다면 그것은 연방제가 아니라 연합제라고 할 수 있다. 연합제라고 해도 무한정 병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세대를 거치면서 장기적으로는 하나의 원리로 통일되어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망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조성된 조건 하에서 한반도에서 미 제국주의의 분단/분할 지배가 타파되고 자주적인 민족국가로서 남북이 통일한다고 할 때 어떤 모습의 통일이 현실적일까? 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퇴각한다고 해도 연합제로 통일하는 것이 현실적이 아닐까? 사회주의가 확산될까 두려워하는 남측의 지배층이나 자본주의가 밀고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북측의 민중이나 모두 안전한 선택으로서 연합제를 선호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지금 통일 문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냐 연합제냐 라는 구별이 중요하지 않다. 하루빨리 “낮은 단계의 연합제”라도 이루어 미 제국주의에 의한 한반도 분할지배 기도에 파열구를 내야 한다. 그리하여 민족통일의 동력을 힘차게 발동시켜야 한다.
이 과정은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패권적 지배력을 구축하려는 미 제국주의의 기도가 좌절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또 남한에서 미 제국주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민족해방, 민주변혁 운동이 비상하게 고양되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오며
미 제국주의가 기세등등하게 군림하고 있는 오늘날, 이와 같은 전망은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하지만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살인마 통치하에서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갈파했다. 전망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근본적인 요구를 떠나서 오직 사태를 제3자의 자리에서 객관주의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므로 ‘참 세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여러 사람이 생각하면, 그 세상은 언젠가는 뒤집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보편화될 때에는 이미 그만한 물질적, 인간적 조건이 조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두 손 놓고 있어도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다수 사람이 미 제국주의가 패권을 행사하는 지금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를 ‘야만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변혁의 조건은 갖추어진 것이다. 문제는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간다운 세상으로 확실하게 변혁하는 것이다.
(2006. 10.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