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시작된 ‘3불론’ 논쟁이 4월에 접어들어서도 꺼지지 않고 있다. 몇몇 대학총장들이 3불(不), 즉 대학 본고사와 고교 등급제와 대학 기여입학제를 금지해온 정책을 폐지하라고 들이대자 노무현 대통령이 ‘몸소’ 방어에 나섰다.
이에 대해 전교조는 “대학은 3불 폐지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 3불 폐지 공세가 벌어진 것은 노정권이 미온적으로 대처해온 후과”라면서 “입시경쟁 교육을 퇴출시킬 근본적인 교육개혁을 서둘라”고 정부를 채근했다. ‘문화연대’의 강내희 교수는 “노정권은 3불 정책의 진정한 옹호자가 아니다. 3불 정책은 일부 대학과 교육부 정책에서 이미 일정하게 해체되고 있어서 지키기가 쉽지 않다. 교육운동 진영은 그동안 논쟁이 일어날 때에나 수동적으로 반발해 왔는데 3불 수호를 넘어설 ‘입시 철폐’의 구도를 내걸고, 서열화된 대학체제에 반대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필자는 전교조와 강내희 교수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미세한 대목을 조금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 분명한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주장은 ‘3불 고수’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본다. 물론 당장 고교 등급제와 대학 본고사를 허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겨날지 그들이 예측하는 내용은 거지반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어도 교육 불평등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리라. 그러나 평등의 문제와 더불어, 수월성을 북돋는 일은 어찌하며 시험다운 시험은 어떤 것일지를 아울러 따지자면 논의가 그리 간단치 않다.
보수 세력의 관심은 오로지 일부 엘리트 계층의 수월성을 어떻게 북돋울 거냐는 쪽에 고정돼 있다. 그러기 위해 일찍부터 학교교육을 엘리트의 길과 일반 민중의 길, 두 경로로 갈라치기(Two Tracking)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뿌리 깊은 욕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노에서 ‘3불만큼은 법제화를 해서라도 꼭 지켜야 해!’ 하고 나서는 것은 사태의 일면만을 주목하는 일이다. ‘일부’를 위한 수월성 추구는 사회 형평의 문제를 낳지만 어쨌든 수월성의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고, 꼭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에 복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지식의 높은 발달이 긴요하다. 문제는 ‘더/덜’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학생의 지식을 다 높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대학수학능력고사와 고등학교 내신이 과연 시험다운 시험이랄 수 있는지도 돌아볼 일이다. 5지 선다형의 문제틀에 갇혀, 출제자의 의도를 알아맞히는 찍기 시험에 몰두하는 것이 과연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을 길러주겠으며, 정치적 고려로 하여 적당히 쉬운 문제로 출제된 시험이 어찌 학생들에게 높은 수준의 학습을 채근하겠는가?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하자는 요구, 다시 말해 고교 성적이 제대로 대접받게 하자는 뜻에서 ‘내신’의 비중을 강화하라는 교육계 여론이 컸다. 그러나 학생들을 한 줄로 늘어세우는 서열화의 도구로서 학교 내신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사교육 범람으로 공교육의 위신이 떨어진 것을 상대적으로 회복해 줄지는 몰라도 근본을 따지자면 고등학교가 앞장서서 입시경쟁 교육을 부추기는 꼴이다. 고교 3년 내내 학교 성적에 얽매이게 하는 것도 또다른 ‘반교육’이 아닌가. 대학 본고사가 입시경쟁과 교육불평등을 부추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 지금의 수능과 내신이 바람직한 평가 방법이라고 손쉽게 정당화해서도 안 될 일이다.
지금의 입시 체제는 교육불평등도 부추길뿐더러 학생들의 지덕체(智德體)를 전면적으로 높이 함양하는 일에도 실패하고 있다. 이 체제를 그대로 놔두고서 ‘3불’을 유지할 거냐, 말 거냐를 따져서는 생산적인 해결책을 내올 수 없다. 유지해봤자 대책 없는 현상 유지요, 본고사를 푼다 한들 일부 엘리트 학생의 길만 열어준다.
3불 논쟁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지금의 입시체제가 철폐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대학체제를 송두리째 손보는 교육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진상 교수(경상대)가 몇 해 전에 내놓은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안이 그러한 ‘시안’의 하나라 하겠다. 전교조나 진보적 학자들이나 이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당장 불가능해 보인다 해도 ‘이것이 길!’이라고 단언할 때라야 그 길을 지향하는 뜻들이 모이지 않겠는가. 올 대통령 선거에서 이 대학평준화를 의제로 들어올리지 않고서는 교육 변화의 동력을 다시 일으킬 수 없으리라.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방향 설정’만으로 문제가 풀린다고 손쉽게 단언할 생각은 없다. 입시 철폐와 대학 공공성 실현이 아무리 옳은 길이라고 해도, 그 길로 나아가자고 열렬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주체들이 생겨나지 않고서는 어떤 토론도 ‘도로묵’이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간다. 교육공공성과 평등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의 주체는 어찌해야 생겨나느냐 하는 주체 형성의 문제!
높은 등록금 때문에 분개하는 대학생들이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반대행동을 해왔다. 이것이 그나마 학생운동이 활력을 유지하게 해준 유일한 바탕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관심과 정치의식은 ‘대학체제 전체의 공공적 재편’으로 높아지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부담을 덜기 위한 제 앞가림 행동들만 해온 것이다. 어찌 해야 학생 사회가 ‘사적 개인들의 집합’에서 ‘사회적 개인들의 모임’으로 바뀔 수 있을까? 사람들을 더 높은 행동으로 나서게 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문제는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저 사람들과 평등해지고 싶어요.”하는 사회적 욕구는 수긍할 것이기는 해도 열렬한 감성으로까지 터져나오기는 어렵다. ‘세상이 원래 그러려니’하고 스스로 풀이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것에도 눌리지 않고 생명력 넘치게 살고 싶은 인간 해방의 욕구는 다른 무엇과 저울질할 욕구가 아니다.
이 욕구에 터한 사회적 행동들만이 ‘거센’ 변화의 힘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87 노동자 대진출을 격렬하게 일으킨 동력은 ‘더 많이 재화를 얻고 싶다’는 경제적 욕구라기보다 천대받고 살았던 노동자들의 ‘인간답게 대접받고 싶다’는 외침이었듯이.
그러니 우리는 교육현실에 대해 ‘얼마나 형평에 맞게 교육하고 있느냐?’를 묻기 전에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있느냐?’를 먼저 따질 일이다. 학생들에게 ‘너희는 학교가 공평하게 대접해주기를 원하느냐?’를 묻기 전에 ‘너희는 사람답게 살고 싶으냐?’하고 물어야 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으면 온갖 억압 차별과 소외와 물신주의에 맞서 싸워라! 그 싸움의 과정에서 교육공공성의 문제와도 맞닥뜨리리라.
그래서 필자는 평등과 수월성 간의 해묵은 다툼에서 전혀 다른(?) 곳으로 ‘문제 설정’을 높여갈 것을 교육운동 세력에게 요청하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더 엄중한 교육문제는 더 깊은 곳에 깔려 있는 ‘교육관’과 ‘인간관’의 문제라 보인다.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국제경쟁력을 갖춘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당신들의 목표인가? 힘과 돈의 논리를 숭상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인간상일까? 그런 인간으로 길러내는 거대한 사회 조류를 그냥 놔두고, 그 속에서 그저 사회 양극화의 폐해를 줄여보려 애쓰는 것이 과연 얼마나 치열한 사회 동력을 일으킬까?
우리는 학교교육에 드리워진 자본체제의 어떤 그늘도 언뜻언뜻 간취한다. 한국의 입시체제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기준을 직시하자면 참 실망스러운데, 높은 지적 추구 능력과 창의적 심성을 품은 사람을 선발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 자본주의가 미 제국주의의 하위 파트너로서 굳이 ‘1류의 인재’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한국 자본주의가 한국 교육의 전면 발달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수월성’의 논리도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왜곡되어 나타난다. 그들에게 수월성은 해외로 진출하는 한국계 초국적자본에게 봉사하는 ‘인력’들에게 필요한 수월성이다. ‘친기업 경제교육’이 필요하다고 떠드는 자본 세력의 공세를 떠올려 보라. (‘삼성’ ‘현대’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봉사할 뛰어난 인재는 지배세력이 희망하는 Two Tracking의 체제에서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헤아리자.
그런데 이 흐름 자체를 돌려내는 일은 그저 교육개혁으로 될 일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문제다! 법안 개폐의 과제가 아니라 사회운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민중과 사회 전체에 봉사하려는 높은 윤리를 갖춘 인재를 길러내지 않고서는 그런 사회운동이 싹틀 수도 없다.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 허리에 맬 수 없듯이 요컨대 우리에게 더 긴요한 과업은 참사람을 길러낼 참교육이 아니겠는가! ‘인적 자원’부가 바라는 친기업 심성의 기능공 양성이 아니라 자본체제에 맞서는 인간해방 교육!
한미FTA의 체결을 고비로 하여, 한국 교육도 ‘양극화의 길’이 굳어질 위험이 높아졌다. 그런데 무너지는 둑을 ‘3불’의 미봉책으로 막을 수는 없다. 지금은 어쩌면 FTA 저지투쟁을 벌이는 것이 숱한 교육실천보다 더 소중할지 모르겠다. 지금 데모를 벌이는 사람들은 민중이 아니라 지배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해방의 청사진 없이 그 저지투쟁은 주체를 넓혀내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