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일요일 밤, ‘안성 요셉병원으로 사람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가보았더니 경기도당, 경기도 노총, 택시, 평택과 안산 노동자, 일부 사회단체 사람들만 삼사십 명 병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안실에는 다들 들어가지 못해서/않아서(...나중에 일부 사람들만 ‘문상’했다), 나 역시 서성거리다가 ‘추모 집회’가 시작되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택시 구수영 동지가 ‘경과 보고’를 하는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손에 손에 든 촛불들이 위태로이 흔들린다. “가족들이 첫날이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말만 한다.”고 구수영이 한숨 섞어 말한다.
이어서 사회자가 ‘허세욱 열사에 대해 말해줄 분 없냐’고 청중에게 묻는데 민노총 여성 부위원장 김은주가 부스스 일어난다. “허세욱 동지가 집회장에서 만났을 때 우리 딸애들 손에 돈 천원씩 쥐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고 회고하는 목소리가 어느듯 촉촉하게 젖더니 잠깐 울먹인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마지막으로 전국연합 오종렬 의장이 일어나 못박듯이 말한다. “여러분, 싸움은 공개요구 투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월요일 새벽 6시 좀 넘어, 병원에서 영구차가 나갔다. 몇 사람이 차 앞에 가서 무릎 꿇어 절하고 몇 사람이 화장터로 따라갔다. 뼛가루의 일부, 한 옹큼을 얻어왔다고 한다. 그렇게 허세욱 동지의 시신은 떠나가 버렸다! 아무 일 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2. 추모 집회에서 간부들 빼고는 아무도 발언하려 나서지 않았다. 김은주가 울먹일 때 몇몇은 속으로 함께 느껴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사람은 ‘확 쳐들어 가야하는 거 아녀?’하고 울분을 토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병원 앞에 전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거”라고 구수영은 말했다. 포장마차로 향하는 택시 노동자들에게 구수영이 ‘술 먹지들 말어!’하고 다그쳤는데 집회 사회자는 ‘내일 화장터로 갈지 모르는데 그럴 경우, 화장터까지 일부가 따라갈 것’이라고 예정된 일정표처럼 발표했었다. 술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던, 도무지 긴장이 걸리지 않았던 평화로운 밤이었다.(전경이 굳이 나설 까닭이 없었다)
월요일 아침, 시신이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 서울에서는 범국본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회단체들이 수술비 책임진다”는 각서까지 썼는데도 유가족은 면회를 막았다고 범국본은 유가족을 비난했다.
3. 유가족에게 허세욱 동지는 ‘부역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생각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다 장례에서 배제되고, 생물학적인 몸뚱아리의 인연만 맺은 사람들끼리 ‘가족장’의 울타리를 쳐버렸다. 그는 ‘전체 사회’를 향하여 자기 몸을 불살라 호소하고 발언했지만, 그의 사회적 발언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사람들끼리 그의 몸을 처분해 버렸다. 기성 사회에서 그의 ‘삶과 죽음’은 한갓 시급히 잊혀져야 할 ‘추문’에 지나지 않았다. ‘국정원 출신’까지 끼어앉은 그의 ‘가족’들은 그러니까 그의 죽음을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개죽음’으로 취급해 버린 셈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 ‘안티고네’는 자기 오빠의 죽음이 기성 사회에서 ‘개죽음’으로 취급되는 것에 저항하여 투쟁하다가 죽어갔다. 안티고네가 제 몸을 던지지 않고서 기성 사회가 제 오빠의 삶과 죽음을 받아안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변혁운동 단체라면 허세욱의 유가족과 그 뒤에 도사린 자본권력에 맞서 ‘시신 사수(또는 쟁취) 투쟁’을 벌였으리라. ‘가족장’의 구역질나는 이데올로기에 굴하지 않고, 제대로 된 ‘사회장’을 치르는 투쟁에 나섰으리라. 그랬어야 허세욱의 죽음이 한미FTA 투쟁의 전열을 다시 가다듬는 힘찬 ‘새 출발’이 되었을 터이다. 변혁의 파고가 올라가던 80년대 말에는 한 달 두 달 밤낮으로 ‘시신’을 지키는 장례투쟁을 그렇게 치열하게 벌였더랬다. 이는 한갓 빛 바랜 사진 속의 추억으로 저물어간 이야기일까?
4. 허세욱이 분신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병원 앞에 텐트가 설치되었다. 투쟁 분위기도 북돋아지기 전에 ‘모금 켐페인’부터 울려퍼졌다.
대학로에서나 안성 병원 앞에서나 발언자들은 그를 ‘따뜻하고 좋은 사람’으로만 추어올렸다. ‘투쟁을 더 치열하게 일으켜 달라’는 그의 분신 충정을 파고들어 치열하게 발언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부 청중들은 눈시울을 적셨겠지만 눈물과 뜨거운 한숨이 집회장을 파도처럼 휩쓸지는 못했다. 왜 싸우러 모인 사람들 속에 눈물과 뜨거운 한숨이 퍼져 나가지 않았을까?
범국본은 예전에 ‘한미에프티에이는 IMF보다 열배 백배 더한 재앙’이라고 비판을 했더랬다. 그 말에 정말 걸맞게 투쟁했더라면 허세욱 열사의 분신을 맞아, 싸우는 민중들이 이렇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리 없다. ‘범국본이 협상 체결 뒤에는 국회내 비준반대 투쟁으로 넘어가고, 대선 쟁점 제기로 만족할 것’이라는 항간의 의구심이 사실이라면 ‘열배 백배의 재앙’이라는 그들의 선전은 진정성이 실리지 않은 ‘빈 말’인 셈이다. 안성 추도집회에서 엔엘파 원로 오종렬 의장은 “한미에프티에이투쟁은 반한나라당 투쟁입니다!”하고 얼토당토 않은 정견을 내질렀는데, 이렇게 민중운동을 개혁보수세력의 2중대로 말아먹는 움직임이 공공연히 벌어지는데 저지투쟁에 긴장이 걸리겠는가. 한나라당만 반대하면 되는 것을...
5. 허세욱을 이어받는 투쟁 분위기가 제대로 살아오르지 못하는 까닭은 첫째, ‘한미에프티에이’의 본질을 ‘큰 눈길’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제식민지화의 완결판이요, 신자유주의의 완결판이요, 아제국주의적 야욕의 표현이다. 그런데 ‘미국한테 말아먹힌다’는 선전만 많이 되었을 뿐, 신자유주의와 小제국주의 야욕의 부분은 직시하지 못했다. 그러니 ‘농민하고 영화인들이 안됐다’는 동정심만 일었지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내 문제’라는 절절한 자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비정규악법과 노사관계로드맵이 사실 ‘에프티에이의 선결 요건’으로 강행되었을뿐더러, 협상이 맺어진 뒤에도 ‘미국식 노사관계 강요(...해고의 자유, 본격 도입 등...)’가 기다리고 있다. 87년 이후 20년의 흐름을 완전히 잠재우고 ‘자본의 일방적 우위’를 완전히 못박겠다는 것이 ‘에프티에이’의 핵심이다! 이를 절절히 깨닫지 못하니, ‘사생 결단의 싸움’이 일어날 리 없다. ‘한나라당 반대만으로 족하다’는 엔엘파 주류의 꼬드김은 투쟁을 잠재우는 마술의 묘약이 된다.
둘째, 그 ‘대안’을 사회적인 힘으로 제시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신명을 내어 결사항전할 수 없다. “조금 폐해가 덜한 신자유주의만 되더라도 좋겠다.”는 식의 나약한 목소리들만 요란하니, 막상 싸우려던 사람도 주춤하고 물러나 버린다.
IMF 이후, 다시 <‘노동의 거대한 패배’>로 귀결될 에프티에이 공세에 맞서려면 어떤 비전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자체를 끝장내지 않고서 길이 없다. 그 ‘너머’로 나아가자!”는 비전을 움켜 쥘 때라야 우리는 한미 지배세력이 온통 환상을 품고 달려드는 공세 앞에서 강인하게 맞받아칠 수 있다. ‘제3의 길’과 비슷한 나약한 사민주의 담론으로 자본의 맞수가 되지 못함을 현실은 똑똑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부르주아정치세력의 대선 후보들은 너나없이 ‘민생 대장정’을 떠난다고, 갖은 꾀를 다 부리는데, 그 영향력이 한줌도 못 되는 진보세력 주류는 ‘다른 사회에 대한 비전’을 확실히 내걸 때라야 어떤 ‘승부’가 되거늘, 여전히 자질구레한 관심에 자신을 가두고 ‘2중대 노릇’에 머물러 있다.
FTA에 맞설 ‘대안’은 무엇인가? 지배세력의 소제국주의(=자본주의 선진국) “환상”에 맞설 대안은 화폐 상품 관계를 폐절하고 가치법칙을 소멸시킬 ‘자본주의 너머’에 대한 포부가 아니겠는가. 담대한 포부 없이 어찌 지배세력의 현실적인 야망에 맞서겠는가.
6. 허세욱의 투신은 ‘불발탄’으로 끝날 것인가? 그의 육신은 이미 땅에 묻혔다. 한 웅큼 적선을 구하여 얻어온 뼛가루로 발인을 하고 노제를 지내고 해서는 ‘시늉 뿐인 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 애시당초 그의 육신은 반동세력의 손아귀에 강탈당했다. 그의 육신 한 웅큼을 향하여 애도하지 말라. 그의 넋일랑 우리네 가슴 속에 묻어야 하리라. 그가 제 몸을 불살라 조금 밝혀낸 공간을 死守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