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평등하게 나눌 일일까?
1. 교육불평등에 관한 글을 하나 읽었다. “학교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에 ‘수동적 복무’하는 것을 넘어서, 그 불평등을 ‘더 강화’하고 대물림 수단이 되는 것은 문제” “한국에서 교육불평등 재생산의 가장 중요한 기제는 ‘사교육 접근성’의 차별” “그래서 입시제도가 계층간 교육격차 확대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특정 학과에 들어가려는 경쟁은 삶의 대부분의 자원을 올인하는 생존경쟁이 되었다”
“대학평준화를 통한 학벌사회 타파, 학력차별 금지제도 마련”
“새로운 교육의 미래를 보여줄 전망을 내놓고, 그 현실화 투쟁에 나서야”
“민중 스스로 교육불평등 타파의 주체가 되도록.... 교육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대립전선을 강화해야...
2. 위의 글에도 함축되어 있듯이, ‘교육 불평등’은 상대적인 문제다. 학교가 ‘사회적 불평등’을 혁파해낼 수 있는 사회공간이 못되고, 다만 그러나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사회적 실천은 교사/학부모가 연대하여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 위의 글에 담겨 있다. 그 ‘과중한 교육비 부담’의 문제는 분명히 심각하고 그래서 운동이 절실하기는 하다. ‘대학평준화’ 의제가 제기될 때도 되었다.
3. 그런데 ‘평등’의 문제가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주제만 갖고서는 보수세력/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세력 간에 ‘원리적인 차이’가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진보세력은 절실함이 더 있으니까 더 열심히 변화를 원하고, 다른 세력은 그게 없으니까 ‘말잔치/말치레’로 끝난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 “대학평준화 운동 제기는 좋은 것이지만 교육운동이 그것으로 웬만큼 족한 일이냐?”
4. 여기서 단서를 달아야 한다. 위에서 ‘상대적’이라고 할 때의 ‘평등’ 개념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평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의 글에는 ‘교육기회가 평등해야 한다(평준화), 결과도 최대한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가 함축되어 있는데 (자유주의의 진정성도 소멸해버린) 보수세력이나 (자유주의 심성은 가냘프게 유지하는) 자유주의 세력이나 적어도 ‘원리’로서 ‘기회 평등’을 감히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노무현이가 ‘3불 법제화’ 갖고서 생색을 내지. 우리가 ‘평준화’를 힘주어 말한다면 실제에서 우리의 진정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원리’에서 저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노동자계급이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을 돕는다”는 게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5. 사실 우리의 실천은 더 나갔어야 한다. 현실의 계급관계로 하여 ‘기회는 평등해도, 결과가 불평등해지는’ 문제를 개선하는 교육복지의 노력!
그런데 내가 제기하려는 물음은 이것이다. ‘기회 플러스 결과’의 평등까지 제기하면 그것으로 족한가?
6. 무엇이 평등해져야 하느냐는 물음이 이어져야 한다. 가령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이 어떤 것이냐를 따져보자. ‘사회(사람)에 관한 공부’의 태반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해내는 소외된 지식이다(상품/화폐를 당연시하는 물신화된 사회교육). ‘자연(물질)에 관한 공부’에도 그 측면이 없지 않다(효율성만을 따지는 기술교육)
‘무엇’을 빼고, 얼마나 평등하게 나누느냐만을 따지면 양적인 비교가 된다. <평균주의적인 평등> 개념에, 근대 사회의 한계 내에 머무는 것이다.
7. 무엇을 평등하게/더불어 공유해야 하는가? ‘인간 존엄’의 평등함!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을뿐더러 사람들의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뜻의 ‘평등’이 깃들어야 사회의 미래를 말하는 비전이 된다. 이를테면 십만명 대학에 장애인 단 한 명이 입학한다 해도 그를 위하여 막대한 예산을 들여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 이는 단순히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는 ‘자본주의적 계산’을 넘어서는 일이다. “평등하게 살자!”는 외침이 커다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려면, 그런 주체를 형성해내려면 단지 ‘기회/결과의 평등’을 열렬히 외치는 것으로 좀 미흡하다. 기회의 평등은 부르주아들이 명분으로 거는 구호이고, 결과의 평등은 소부르주아 중산계층이 추구하는, ‘좀더 나은 자본주의’의 상이다. 노동자계급이 물론 주체가 되어 ‘결과의 평등’까지도 추구할 일이지만, 새 사회를 여는 비전이 거기서 나오지는 못한다.
(...가령 ‘반-에프티에이’ 투쟁은 그것 자체가 반자본주의 운동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극악한 모순에 대한 저항이고, 그러나 그 운동이 정말로 힘을 받으려면 ‘사회주의 대안’을 내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육불평등에 맞서는 운동이 제대로 힘을 받기 위해서도 그 ‘평등’ 사상은 ‘인간 존엄성 실현’의 사상으로까지 깊어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