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상업오락물이 매장해 버린 역사적 진실, 1 ── 5.18광주의 언론 ‘투사회보’
첫 번째는 ‘암매장’ 당한 것은 518이라는 10일간의 항쟁을 始作(시작)시킨 인쇄물인 ‘투사회보’다. “살인마 전두환이 찢어 죽이자.”는 구호가 나오고 그 구호가 손 글씨로 제작한 현수막에까지 사용될 정도로 잔혹·참담했던 ‘국군에 의한 시민 학살’에 대해서 가장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응했던 ‘투사회보 제작·배포 그룹’이 통째로 역사적인 암매장 당한 것이다. “6.25전쟁 때도 이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는 할머니들의 증언만큼이나 무시무시했던 ‘시민들에 대한 국군의 무차별 도륙’을 광주시민들에게 폭넓게 인쇄물을 통해서 알려내고, 동시에 부당하고 반인륜적인 폭력에 대한 자위권 발동을 주장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했던 ‘투사회보’가 518이라는 처절한 항쟁을 ‘始作(시작)’시킨 것이다.
지금 광주광역시의 ‘시외·고속버스 종합터미널’과 ‘현대-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이 있는 곳이 광천동인데 1980년 당시 이곳은 영세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영세한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많았던 그곳에 전남대 출신의 윤상원·정재호·박기순 등이 운영하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이 있었다. 그리고 그 ‘들불야학’의 강학(야학에서 가르치는 사람)과 학강(야학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녹두서점’이라는 사회과학서점을 ‘편집실’로 삼아 ‘등사기(수작업 인쇄기기)’로 찍어낸 ‘투사회보’는 TV도 전화도 모두 끊겼던 1980년 5월 광주의 유일한 ‘언론’이기도 했다. 참고로 이 ‘투사회보’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던 윤상원은 당시 비합법 사회변혁운동조직이었던 ‘전민노련’의 조직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중 상업오락물이 매장해 버린 역사적 진실, 2 ── ‘수습위원회’와 ‘투쟁위원회’
야만의 학살에 대하여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의 무장과 저항을 주장한 ‘투사회보’에 의해서 시작된 5.18의 광주에는 2가지 세력이 있었다. 그 하나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였고 다른 하나는 ‘민주시민투쟁위원회’였다.
경찰서나 예비군 무기고에서 획득한 화기를 가지고 공수부대와 교전을 벌이기 시작한 시민들은 전남도청에서 상당히 가깝고 당시로서는 광주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전남대병원 옥상에 2대의 중기관총을 설치하여 전남도청을 향해서 일제사격을 가함으로써 결국 공부부대를 전남도청으로부터 퇴각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공수부대가 물러간 ‘해방광주’에서 목사·신부·교수·명망가 등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였다. 글자 그대로 ‘수습’을 목적으로 했던 이들이 주로 했던 일은 ‘투항’을 조건으로 계엄군 측과 협상을 진행했고 그 내용은 주로 ‘체포·구속된 사람들이나 무장한 시민군들에 대한 선처’ 수준의 것들이었다.
투항을 조건으로 선처를 할 계엄군이었다며 처음부터 도륙·학살을 시작하지도 않았었겠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투항’이라는 카드 이외에는 달리 무엇인가를 해낼 생각도 자신감도 없던 그들의 눈에는 그런 엄혹하고도 준엄한 현실이 눈에 보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을 전제로 한 선처 요청’은 그들의 몽상과는 달리 계엄군으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전남도청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조용히 조용히 전남도청에서 증발해버린 그들의 공백을 매운 것이 바로 이른바 ‘항쟁지도부’로 불리는 ‘민주시민투쟁위원회’였다. ‘투사회보’ 제작진의 윤상원은 TV는 물론 전화까지도 단절되어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외국언론’ 뿐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이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맞는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 속에 광주의 진실을 남겨두기 위한 죽음 저항’을 준비한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야기되어지고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한 미녀 연예인을 앞세워서 묘사한 ‘한 여성의 가두방송’도 바로 이 ‘민주시민투쟁위원회’라는 ‘항쟁지도부’ 활동의 일환이었다.
생각해 보라! 공수부대가 전남도청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텅 빈 도청 건물’만이 양민을 학살하고 도륙한 공수부대를 맞았다면, 5.18은 ‘간첩과 부랑자들의 폭동’으로 역사에 기록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가 힘들지 않은가? 이미 김영삼 정권 때부터 복권되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518은 빨갱이들의 폭동’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일해공원’의 시민들이 있는 2007년의 현실을 볼 때, 1980년 당시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결단은 역사적 진실이 암매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처절한 역사의식의 발현이었다.
5.18진상규명투쟁과 ‘운동권’의 대중화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그렇지 않았지만, ‘민주시민투쟁위원회’는 1980년 5월 27일 새벽에 그들의 선택대로 공수부대에 의해서 사살 당함으로써 ‘5.18광주민중항쟁’을 역사에 아로새긴다. 그리고 ‘5.18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투쟁이 1980년대의 대학가와 거리와 광장을 뜨겁게 달군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대학생들은 대부분이 이런 ‘5.18의 세례’를 받았고 이른바 ‘운동권(원래는 사회변혁운동권이었으나 민주화운동권으로도 해석됨)’이라는 단어가 일반대중들 누구나 사용하는 용어가 되게 했다. 물론 그들 중에도 ‘민주시민투쟁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전남대생 ‘박관현’이다. 그는 1981년 ‘광주교도소’에서 43일간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사회민주화’를 요구하며 4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다 결국 목숨을 내놓는다. 한국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심장에는 언제나 518 광주의 ‘민주시민투쟁위원회’가 새겨 놓은 피 묻은 역사와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중적으로 대중적으로 퍼져나가던 ‘5.18진상규명투쟁’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5.18 당시에 부산 앞바다에 항공모함을 배치하면서까지 광주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묵인(또는 승인)했던 ‘미국’에 대한 반대운동도 일어났다. 결국 이러한 고민과 사고들은 ‘사회과학’적 사고의 대중화를 불러 왔고 대학가에는 많은 경우 대학교 한 곳에 2~3곳의 사회과학서점이 성업하기도 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안병직’씨의 ‘식민지半(반)자본(봉건)주의론’과 ‘反(반)자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박현채’씨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생겨나 논쟁하기에 이른다. ‘미국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이라는 주장을 따르던 絶對多數(절대다수)의 이른바 NL주사파 학생운동권들은 북한에서 수입된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으며 ‘자주·민주·통일’을 외쳤다. 반면에 ‘反(반)자본주의의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주장을 따르며 100년 전의 유럽·러시아 혁명사에 빠져들던 少數(소수)의 학생운동권들은 ‘소비에트연방’의 모델을 지향점으로 삼으며 ‘민중·민주·통일’을 외쳤다.
── 글은 ‘3/3’로 이어짐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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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전교조 조합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