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진원(6.19)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정치 시위를 ‘직접민주주의’라고 아전인수로 평하는 것은 지식인 관념의 넋두리이고, 이번 기회에 현재의 민주주의를 넘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정국에 강령을 갖다붙이는 운동권의 버릇이다. 한편, ‘제도정치가 중요하다.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단순 반복은 구체적 정세와 현실 주체를 묻어버린 일반론일 뿐이다." 이재영, “[최장집 비판] 진보정당이 거리에 남아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레디앙(6.19)
위 이재영의 최장집 비판의 글을 역으로 해석해보면, 요즘 운동권과 좌파지식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촛불시위 이후 정국과 역할과 관련하여 요즘 운동권과 좌파지식인들은 본성상, “좌파(左派)는 좌파(座波)로 끝나선 안된다”, “정당정치를 강화해야 한다”, “정권퇴진으로 나가야 한다”, “주체의 재형성이다” 등의 논리를 피는 것 같다.
이런 고민들과 제안들은 옳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적절한 것인지를 판단하는데, 필자가 본 것들을 고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촛불시위에 3번 참가했었다. 촛불시위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중요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은 촛불집회에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열리고 형성된 시민들의 ‘자유발언대 운영’과 관련된 부분으로, 필자는 이것을 소통으로 표현되는 대안권력의 맹아(즉, 소통권력)라고 보고 싶다.
유심히 보니까, 자유발언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사회자가 필요한데, 광우병대책위에서는 사회자를 선출하는 데 까지만 관여하고, 나머지는 시민들에 의해 추대되거나 뽑힌 사회자의 운영에 따라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필자는 광우병대책위가 사회를 보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와 판단으로 시민들에게 자율권을 넘긴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본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부분이 광우병대책위가 가장 잘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것을 필자는 학술적인용어를 빌어 ‘거버넌스’라고 부르고 싶다.
전문가의 조언이 있어야겠지만, ‘거버먼트’(통치)에 대비되는 ‘거버넌스’라는 용어는 우리말로 협치(協治), 공치(共治)라고 말할 수 있다. 거버넌스는 쉽게 말해서, 정부나 정당 등의 공적기구가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독점적으로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시민사회 등 다양한 행위자에게 권한과 권위를 분산시키고 위임하여 참여시킴으로써, 운영을 공동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새로운 통치양식이다.
즉, 바다위의 배를 움직인다고 했을 때, ‘노젓기’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하는 것이며, ‘방향제시’는 정부와 정당이 하는 식으로 협동하는 것이다. 거버먼트가 아닌 거버넌스를 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민주화 이후 우리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숙에 따른 ‘통치방식의 변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숙은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통치를 어렵게 하고 있다. 단적으로 드러난 통치의 어려움은 촛불시위의 발단이 된 이명박정부의 통치실패에 있다. 정부의 국정운영과정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시키지 않고서는 정부를 운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우다. 좌파든 우파든 어느 파가 정권을 잡아도 마찬가지이다. 정당도 마찬가지이고, 대중조직도 시민단체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운영에 참여시키지 않고서는 성공적인 운영을 보장할 수 없다.
촛불집회에서 꽃핀 자유발언대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광우병대책위도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자유발언대의 운영권을 시민들에게 넘김으로써, 거버넌스를 하였다.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함으로써, 그나마 촛불시위를 이끌면서 지도력과 신뢰를 인정받았다고 생각된다. 만약에 거버넌스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운동권들은 소통부재로 위기에 빠진 이명박정부와 비슷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고,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퇴진당했을 것이다.
촛불시위 이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좌파든 우파든, 운동권이든, 정부든 정당이든, 민주노총이든, 시민단체든, 무엇을 고민해야 할 것인가? 필자의 생각은 거버넌스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자신의 독점적인 권한과 권위를 다양한 행위자에게 위임하고 분산시킴으로써, 다양한 행위자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광우병대책위가 마련한 시민대토론회는 의미가 있다. 그곳에서 향우 전망이 나올 것이다. 선험적이고 폐쇄적인 운동권과 좌파지식인들만의 이야기는 더 이상 매력이 없다.
특히, 정당의 거버넌스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정당 거버넌스이 핵심에는 정당의 기존에 누려왔던 권위와 권한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의사결정과 후보자선출방식을 당원이 아닌 일반시민들에게 개방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장집 사단이 강조하는 ‘강한 정당’ 또는 ‘정당정치의 강화’라는 슬로건은 ‘정당 거버넌스’라는 개념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