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아샬 님의 비판에 대한 응답

이 글은 제가 지난번에 올린 「폭력/비폭력, 운동권/시민의 이분법을 넘어」라는 글에 대해 아샬 님께서 개인 블로그에 트랙백하신 내용을 보고 제 나름의 반론을 쓴 것입니다. 사적 공간의 글에 대해 이런 자리에서 언급을 하는 것이 혹 결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퍼간' 것이 아니라, 원래의 글에 '흔적'을 남기는 트랙백이라는 '공적' 방식을 굳이 택하셨고, 몇 가지 질문도 제기하셨으니, 저 역시 공적으로 답변을 드리는 것이 옳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제 글에 대해 몇몇 분들께서 덧글 등을 통해 제기하신 비판 가운데, 아샬 님의 언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폭넓은 논의를 할 수 있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족을 달자면, 이 글에 대한 아샬 님 혹은 다른 분들의 재비판은, 덧글이나 트랙백보다는, 《참세상》 내 '참새넷'의 현장기자석 등을 이용한 보다 공적인 토론의 형태를 취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덧글을 통한 짤막짤막한 문제제기보다는, 구체적인 분석에 근거한 논의가 훨씬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현안에 대한 단정적인 판단보다는, 제가 저번 글에서 '이분법'이라고 불렀던 폭력/비폭력, 시민/운동권 등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따라서 이야기가 부득이하게 추상화되거나 지나치게 길다고 느껴질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점에 대해선 양해 바랍니다.

폭력/비폭력의 문제를 일단 제껴두고, 그러니까 폭력적이든 아니든,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바꾸고자 하는 노력들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폭력적'인 어휘라서 마음에 안 드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마땅한 용어가 없어 이 말을 쓰기로 하겠습니다.) 즉 우리는 마틴 루터 킹이든 말콤 엑스든 다 같이 '투쟁'이라는 범주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들 가운데 누가 옳았든 말입니다.

그런데 대체 투쟁이라는 것, 즉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대체 뭘 의미할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6월 10일 집회에서 '명박산성'을 둘러보다가 재밌는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맨 위에 "국민들의 청와대 진격을 막는 이유?"라는 문구가 씌어 있고, 중간에 노무현의 사진이, 맨 아래에 이명박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옆에는 "국민들이 다치니까", 이명박 옆에는 "좃중동이 맹근 사생아 쥐박이 뒤질까봐" ― 비속어를 그냥 두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노무현이 시위대의 청와대 진입 시도를 만류하는 발언을 한 것과 관련되는 사진이었겠지요.

그전에 이미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웠고 이명박은 초중고와 싸운다"는 식의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나 그 사진을 붙인 분들은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이명박 대신 노무현과 같은 인물을 대통령으로 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분들은 지나간 일 하나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미 2006년 7월, 노무현 정권 당시에, 한미FTA 반대 투쟁을 위해 청와대로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수많은 참가자들을 연행하는, 심지어 최루액까지 발사하는, 현재 촛불집회에 대한 것 이상의 극렬한 탄압을 가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와대로 가자"…反FTA 행진, 경찰 극력저지」, 《프레시안》)

게다가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직접적 원인이 된 한미FTA가 한나라당이 아닌 노무현 정권의 정책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명박이 아니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몇몇 사안들에 대해서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명박과 노무현 사이에 어떤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쇠고기 문제만 해도, 한미 동맹과 국익이라는 명분으로 이라크 파병도 불사했던 노무현이 지금 대통령이라고 해서 과연 끝까지 미국의 압력을 거스를 수 있었을까 하는 점부터가 매우 의문스러운 일입니다. 제 짐작으로는 그저 결정을 몇 달 늦추는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관심사는, 저번 글에서도 말했듯이, 폭력/비폭력이 아니라, 투쟁 자체에 있습니다. 즉 실질적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지요. 폭력/비폭력이란 무 자르듯 구분하기도 어려운 문제일 뿐더러 그런 식의 구분은 사태를 도식화, 단순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주장에 대해 아샬 님께서는 "명확하게 폭력인 것과 비폭력인 것조차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저 글에서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는 예를 보자. '연행되기 일보직전인 옆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 경찰을 밀치는 것은 폭력인가 아닌가? 살수차를 망가뜨리려고 시도하는 것은 폭력인가 아닌가?' 양심에 손을 얹고 답해보자. 폭력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그렇게 어렵나?"라고 반박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구분을 하는 일이야 어려울 게 없겠지요. 그런데 아샬 님께서는 다른 대목에서 "솔직히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항 폭력을 구분 안 하는 비폭력주의자가 어디 있나?"고 묻습니다. "대항 폭력"은 부분적으로나마 용인할 수 있다는, 적어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제가 제시한 사례들은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용인될 소지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폭력/비폭력이 절대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샬 님께서는 또 "원래 폭력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폭력을 통해 우리의 욕구를 전달하는 것은 미친 듯이 어렵다. 우리가 괜히 비폭력 대화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다. 실제로 매우 효과적이며 매우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검증된 낙후된 폭력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단정적인 어투로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대항 폭력" 역시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검증된 낙후된 폭력"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모든 폭력은,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결국에는 거부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즉 어쨌거나 궁극적으로 폭력은 악이고, 비폭력은 선이라는 말씀이겠지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시 정반대로 뒤집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 가운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보수언론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매 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주제의 토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측의 논리가 매우 흥미롭더군요. 그의 주장은, 언론사에 대한 반대 운동은 몰라도, 기업에 전화를 걸어서 항의하는 등의 행동은 '영업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행위가 폭력이라고 할 때, 기업의 입장에서 소비자의 항의와 불매 운동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폭력이겠지요. 그렇다면 아샬 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그 불매 운동은 즉각 중단되어야 하는지요?

이와 비슷한 질문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촛불 집회 자체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차도를 가로막음으로써 시민의 불편을 유발한다 ―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지요 ― 거나 주변의 상인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 이건 위와 같이 영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요 ― 는 식의 주장들이 그 예입니다. 심지어 경제성장률 추정치가 점점 낮게 잡히는 것이 촛불 집회 탓이라는 식의 주장에 이르면, 거꾸로 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나라를 망치는 '매국노'가 되어버릴 형편입니다.

님께서는 이에 대해 "우리 지금, 조중동 논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라고 물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바로 그렇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폭력은 원칙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조중동 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논리가 궁극적으로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조중동을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과도 무관합니다. 문제는 실제의, 즉 실천적인 효과입니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신다면, 최근의 몇몇 집회에서와 같이 경찰이 "여러분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동을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운운한다면 대체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다른 시민들과 주변 상인들이 자신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무슨 말로 무마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이 "폭력" 앞에서 "감동"할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최근 들어 버스를 끌어당기는 등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비난이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비폭력의 의의를 약화시키려 한다면, 폭력이 격화된 후 불어닥친 엄청난 비난(이것은 언론의 레이어가 아니라, 시민 레이어에서도 폭발했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셨는데, 저번 글을, 또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시면, 제가 그 비난이 결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그리고 그것은 어떤 선험적이거나 초월적인 도덕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 미치는 '효과' 때문이라는 점을 짐작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미, 절반은 못 될지언정 적잖은 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시민 레이어"에서 '집회'가 아닌 촛불'문화제'에 대해서도 꾸준히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들이 비교적 '소수'라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폭력/비폭력을 엄격히 구분해서 실천하려는 사람 중에 운동권 비판하는 케이스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뚜렷이 특정 조직이 폭력적 행동을 했을 때 조직을 까는 경우면 몰라도 '폭력을 썼으니 너는 운동권'이라고 딱지 붙인 경우가 어디 있는가? 글쓴이의 망상 속에는 있을지 몰라도 현실에는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문제는 그 사람들의 '의도'나 실제로 운동권을 비판했는지의 여부가 아닌 '효과'라는, 동일한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번 글에서 저는 한 시민의, "경찰의 폭력 진압에 맞서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은 매우 소수"라는 말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어제(2일)의 미사에 대한 기사에서는 "그 동안 그렇게 무섭게 굴던 경찰이 꼼짝을 못 하니 우습기도 하다"며 "평화가 역시 승리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눈에 띕니다.(「"이명박 씨를 이곳에 초대합니다", 《프레시안》) 1일에는 사제단 분들이 "시위의 원칙은 평화다. 우리와 뜻이 다른 분도 있다. 그분들이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여도 나무라지 말고 꼭 안아달라. 한 번의 실수가 있어도 평화 행진은 꺼지게 된다"고 이야기하셨다 합니다.(「"대통령님 사랑합니다" "신부님, 못하겠어요"」, 《프레시안》)

위의 말들을 모두 종합하면, 지금까지 버스를 끌어당기고, 전경들과 충돌하던 이들은 촛불집회의 "원칙"을 어기고 "실수"를 한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뜻이 될 겁니다. 촛불집회의 주체를 부르는 말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시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은 "시민"이 아니거나, 혹은 본분을 망각한, 잘못된 "시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다른 신문 기사에 따르면, '폭력적' 집회가 이어지던 얼마 전 경찰이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당신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자극적 언사의 '확성녀' 지휘라인 처벌하라"」, 《프레시안》) 이 경찰들이 "당신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경찰뿐만 아니라, '전문 시위꾼', '불순한 배후세력' 운운했던 정부나 보수 언론의 어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선 것처럼 보이는, 사제단이 주도하는 최근의 시위대와 경찰 및 정부ㆍ보수언론은, 각각의 입장이 다르다 뿐, 그 논리에 있어선 굉장히 유사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과연 시위대 스스로 만들어 낸 기준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번 글에서 지적했듯이, 90년대 이후 학생이나 노동자 등이 주축이 된 '운동권' ― 다소 문제가 있는 용어이겠습니다만, 저는 이것을 현실에 대해 비교적 급진적으로 저항하는 세력들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하겠습니다 ― 이 지지를 잃어가면서 점차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 운동권을 "폭력 집단"이라고 부르며 '선량한 일반 시민'과 분리하는 담론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화염병과 같은 운동권의 '폭력'은 엄연히 존재하였고 그것에 대해 "폭력 집단" 운운하는 비난도 당연히 있었습니다만, 그 비난이 지금처럼 강한 힘을 갖게 된 건 90년대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학생이나 재야 세력의, '폭력적' 요소를 포함했던 기존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졌던 87년 6월 항쟁에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렇게 세태가 변한 까닭에 대해선 이 글의 직접적인 주제가 아니고 제가 잘 아는 것도 아니니까 각설하도록 하겠습니다만,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촛불집회의 "비폭력" 논리가 자생적인 것이 아니며, 90년대 이후 만연한 보수주의자들의 반(反)운동권 캠페인(?)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사제단이 주도하는 지금의 촛불집회는, '너희들은 폭력적이니까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그간의 보수주의적 비난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폭력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폭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국민이다'라는 식의, 상대의 비난을 단순히 뒤집어놓은 응답만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의 현재 효과는, 대표적인 '운동권' 단체라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이 촛불집회와 연계한 총파업을 벌이는 데 대해, 특히 금속노조를 대상으로 한 정부와 언론의 성토를 두고 한 노조 활동가는 "촛불의 배후를 찾던 이들이 이제는 불법과 과격 시위를 부각시키기 위해 금속노조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한 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촛불 배후 못 찾으니 노조 희생양 삼나"」, 《프레시안》) 이 글은 "금속노조의 파업에는 '쇠고기 재협상'을 바라는 국민들이 함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노조 파업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도 이제 예전 같은 극단적 혐오야 아니겠지요. 하지만 정부가 본격적으로 노조 탄압을 개시하여 노조가 어쩔 수 없이 "대항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그때도 국민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폭력을 휘두르는 시민을 열등 시민 혹은 비(非)시민으로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그게 가능할까요?

폭력이라고 무조건 매도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요. 사제단의 전종훈 대표신부도 인터뷰에서 "폭력을 제거하는 건 정부가 제대로 정부 구실을 하고, 대통령이 제대로 대통령 구실을 하면 된다"고 그 근원적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까요. (「"단순하다. 고기에도 좌우 색깔 있나"」, 《프레시안》)

그런데 그렇게만 하면 폭력이 사라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게 해주면 된다. 모든 문제의 촛점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왜 다른 것까지 다 연관시키냐는 거다",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 이것만 하면 된다"는 전종훈 신부의 말은 이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대통령을 향하고 있는 이 고언은 사실 언제든지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촛불집회는 지금까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1차적 문제 말고도 수많은 사안들을 쟁점화 했습니다. 교육, 대운하, 공기업 민영화부터 시작해서 비정규직과 같은 문제들까지 직간접적으로, 집회장에서 혹은 다음 아고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다루어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 문제들은 흔히들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재협상을 두려워하는 이명박의 태도는, 단순한 '똥고집'을 넘어서, 현재의 세계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상식적으로, 아무리 자유 무역이 좋다 한들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국가의 검역 주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둘은 별개의 문제일 수 없는 것입니다. 주식의 반 이상이 외국 투자자들에게 소유된 기업이 부지기수인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CEO'를 자임하기까지 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나라의 검역 주권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닐까요?

물론 저는 '재협상 요구 따위는 말도 안 된다'거나 '쇠고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다른 문제들, 쇠고기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들이 존재하며, 그것들도 나름의 폭력 ― 물리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 을 통해 기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에는 등록금 천만 원 시대에 허덕이는 대학생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혹은 그 전부터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로서 낙오자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은, 아무리 주먹다짐이 오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과연 쇠고기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지요?

당장 현안으로 닥친 쇠고기 수입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요청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해결하자는 당위적 주장은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쇠고기 수입이 결코 독립된, 그것만 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이상, 우리의 주장이 보다 더 뚜렷해지고 날카로워지기 위해서는 쇠고기를 넘어서 더욱 많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모두를 연결하는 맥락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투쟁에 나가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인식하고,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정부가 재협상 요구를 받아들여서 한 순간 환호하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머지않아 또 다른,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제단의 지극히 '도덕적'으로 올바른 요구에 대해 제가 '정치적'으로 의혹을 느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도덕적 요구는 감동적이고 멋진 것일 수는 있어도, 어떤 의미에선 당장 전면적인 민중 혁명을 일으키자는 주장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폭력/비폭력의 이분법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것도 바로 그 까닭입니다.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아무런 성찰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그 이분법은, 전체 사회 구조 속에서 각각의 주체가 나름대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상황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대응들을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하고, 그 다른 주체들과 연대할 수 있는 통로조차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걸맞지 않은 지나친 폭력에 대해선 마땅히 경계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폭력은 다 나쁘다'는 논리로 회귀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복잡한 상황을,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타개하고자 하는 현실의 논리에 따라, 단순화시키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1일 밤 9시 40분, 사제단이 "우리가 여기에 더 있게 되면 조·중·동이 나쁘게 쓴다. 어서 집으로 가자"고 시위대에게 당부했던 것은 그 위험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지요.

어떤 분께서 저의 글에 덧글로 링크해주셨던 로쟈의 <어떤 폭력을 선택할 것인가>(《한겨레21》 675호)에 인용된,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라는 책에 나오는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말에 대해 아샬 님께서는 "폭력을 숙명과 연결하는 것도 신화적 결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마무리는 파시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던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메를로-퐁티를 좋아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한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휴머니즘과 폭력》을 제외한 메를로-퐁티의 다른 저작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어쨌거나 아샬 님께서도 읽어보셨을 그 책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우리는 성공한 정치는 모두 좋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가 말한 것은, 정치가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라며 파시즘과 나름의 경계선을 긋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 행위는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발언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경계선이 그렇게 분명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이 아닌지요? 앞날을 예측할 수도, 현재와 과거를 완전히 알 수도 없는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일종의 불확정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요? 더군다나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라면 그 불확정성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광수와 같은 1급의 지식인이 신념에 찬 친일파가 된 것은 단순히 그의 나약함이나 비겁함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는 이상, 우리는 그 불확정성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ㆍ정치적 동물인 이상, 그 행위는 타인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며, 그 영향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행위가, 이 사회,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불확정성은 더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이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근본적 변화 ― 소위 말하는 혁명이든 아니든 ― 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 시도를 비웃거나 타매하는 등의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게 가장 쉽고도 상식적인, 즉 '안전한' 반응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안전은 과연 충분한 것일까요?

우리가 두 달 동안 집회를 계속해온 것을 자축할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랜드에서 일 년, KTX에서 800일, 기륭전자에서 천 일이 넘도록, 전반적인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싸워오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단속추방의 압력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그나마 꾸려진 이주노조는 출입국관리소의 표적 단속으로 지도부를 비롯한 귀중한 동지들이 하나하나 쫓겨 나가는 모습을 몇 년째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히 파업을 일으켰다가 해고당하고, 심지어 수 억, 수십 억의 손해배상을 청구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이 지난 몇 해간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나마 조직을 꾸린 노동자들보다 처지가 못해, 아무도 모르게 무너져가는 사람들이 과연 없을까요. 그것이 우리의 안전한 선택, 사제단이 지닌 종교적 권위와 함께 우리가 서울 시내에서 평화로운 '침묵 행진'을 벌이는 동안 그 뒤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폭력'이니 '불법'이니 '범죄'이니 하는 덮개를 씌워놨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외면한다면, 지금 이 세계에서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지 않겠다는 그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메를로-퐁티는 단도직입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에 대해 폭력을 자제하는 것은 그들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니와, 그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말로는 당위적 도덕을 강조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현실에 안주해버리고 마는, 그리하여 노동자자에 대한 착취, 식민지에 대한 수탈 등을 통해 유지되는 ― 시대가 변한 만큼, 우리는 여기에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의 존재를 포함시킬 수 있겠지요. 그때도 사실 그랬겠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계급 대립만으로 유지되는 단순한 구조는 아니라는 게 제 어렴풋한 추측입니다 ― 현실의 구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자유주의적' 태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은 되새겨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순수한 원칙이 폭력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신비화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이념들은 일상의 삶과 역사 속에서 볼 때, 이런 폭력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자유가 이념으로 응고되고 자유로운 사람보다는 자유라는 개념만을 옹호하고자 할 때, 그것은 거짓 간판, 즉 폭력의 '의례적인 보완물'이 된다."

태그

폭력 , 운동권 , 촛불집회 , 비폭력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문성욱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