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역류시킨 사람들

역사를 역류시킨 사람들

나는 가끔 이승만, 박정희 두 명의 전직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 그 놈의 욕심을 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이 이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으며 대통령 재임기간에 근검절약을 했고, 박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시켰을 뿐만 아니라 청와대 화장실에 벽돌장을 넣었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며 추켜세울 때는 더 화가 치민다.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를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으며, 줄기를 보지 못하고 가지만 보고 하는 말이라서 그런 것이다. 즉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두 분은 우리의 역사발전을 역류시킨 장본인들이다.

이승만 전대통령

물론 이대통령은 일본식민지시절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생활도 했으며 8․15해방후 공산주의와 싸우면서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분이다. 그렇지만 이대통령이 해야할 가장 큰 줄기는 무엇인가?
헌법과 법이 정한대로 하는 것이다. 즉, 친일파 청산과 자유민주주의 발전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에 따르는 일이었지만, 이대통령은 친일파와 손잡고 권력을 잡고 유지했다.
반민족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고 반민족특별위원회가 가동되어 친일파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경찰병력을 출동시켜 무력으로 방해하여 친일파청산은 물 건너가게 만들었다. 오히려 친일파들이 정치, 행정, 경찰, 군 등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나라의 기초를 흔들어 놓았으니. 이 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는가?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국회간선으로 대통령 재선출이 어렵게 되자 1951년10월28일 정부안으로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1952년 1월 18일 찬성 18표, 반대 143표란 압도적인 숫자로 부결되었다.
한편 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곽상훈 외 122명의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제출하였다. 정부측에서는 전에 부결되었던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5월 14일 국회에 다시 제출하였는데 세상은 요지경으로 돌아갔다.
유권자의 이름으로 국회의원을 소환하라는 벽보가 붙고, 괴청년들이 반민의(反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자며 데모를 벌이면서 날뛰고 있었다.
5월 19일에는 정체도 알 수 없는 민족자결단, 딱벌떼, 백골단 등을 자칭하는 자들이 국회해산을 외치며 거리를 누비고 다녔고, 5월 23일에는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기도 했는데, 정부는 사회혼란을 핑계로 5월 25일 경남과 전남북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5월 26일 국회개원중임에도 불구하고 국제공산당의 정치공작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국회의원 4명을 강제연행 했으며, 의원들이 오전에 국회전용버스로 출근하는데 헌병들이 앞을 가로막고 견인차로 버스를 끌어 헌병대로 집단연행한 후 또 여러 명을 구속해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와 국회가 제출한 개헌안을 절충하여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만들게 되었다. 정부측개헌안에서 대통령중심제와 대통령직선제, 국회양원제를, 국회의 개헌안에서는 국무위원의 국회에 대한 연대책임과 개별책임, 국회의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결의권을 발췌하였다. 발췌개헌안은 민족자결단이라는 괴단체가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7월 4일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립투표’로써 가 163, 부 0, 기권 3으로 심야통과 되고 말았는데, 이것을 ‘부산정치파동’이라고 한다.

이대통령은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회를 1년만에 사면 석방하여 군대로 복귀시키고 계급까지 진급시켰으며,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국회조사단을 저격했던 김종원을 내무부치안국장으로 기용했다.
집권여당인 자유당이 제 3대 국회에서 개헌선을 넘게 되자 종신집권을 위한 작업이 벌어졌다.
1954년 9월 8일 자유당은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철폐와 경제조항수정을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표결한 결과 가 135표, 부 60표, 기권 7표, 결석 1이었다.
헌법개정의 의결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당시 국회재적의원은 203명이었으므로 개헌정족수는 135.3(203×2/3=135.3…)이어야하는데, 개표결과 찬성은 135표가 되어 개헌정족수(135.3…)에 미달되어 사회자인 자유당의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개헌부결을 선언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사꾼들이 농간을 부린결과 11월 29일 야당이 국회의사당을 전부 퇴장한 가운데 부결선언을 했던 최순주 부의장이 사회석에 등단하여 “27일 개헌안부결선언은 개헌정족수에 대한 수치계산의 착오에 의한 것이며, 개헌정족수는 수학의 사사오입론(四捨五入論)에 의하여 충족된 것이므로 27일 개헌표결은 통과된 것.”이라고 번복선언하였다.
수학의 사사오입법칙은 소수점이하의 수치가 0.5이상이면 정수1로 가산하고, 그 미만이면 계산에 넣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국회표결에서 135.3은 소수점이하의 수치가 0.5 미만이므로 0.3를 버려야 되는 것으로 203의 3분의 2는 수학상으로 보면 135가 된다.
아무리 수학적인 논리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수학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헌법에 규정된 개헌정족수의 문맥은 ‘3분의2이상의 찬성’이지 ‘3분의2의 찬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부결되었던 것을 번복 선언한 것은 완전히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이 대노할 짓을 저질렀다. 이렇게 종신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어놓고서도 1955년 3월 5일 자유당전당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3대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자 “두 번까지 나라에 봉사한 뒤에 물러앉는 것이 민주정치에 있어서 좋은 줄은 내가 아는 바이므로 대통령출마를 사양하겠다.”고 이대통령은 능청을 떨었다
서울과 지방에서는 불출마선언을 번복하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리고, 시민대회와 데모가 빈발하고, 강원도 같은 산간시골에서는 소와 말이 끄는 마차까지 동원하여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서 출마선언을 요구하는 데모까지 했다.
이런 결과 민의에 따라 재출마를 결심했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다.
이것을 일러 우의마의(牛意馬意)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를 계속하면서 1960년 3․15부정선거로 4․19학생혁명이 일어나게 하여 많은 피를 뿌리게 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이와 같이 이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는 정반대로 권모술수에 의한 독재정치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만약 이대통령이 헌법과 법에 따라 정치를 했다면 순리적으로 50년대 안에 여야간 정권이 교체되어 민주발전의 기틀이 잡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정, 군대 등 각 분야의 질서가 잡혔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으면 군대의 불만세력이 폭발하는 쿠데타도 없었을 것이다. 감히 할 수가 없다.
또한 법대로 친일파를 청산했더라면 정치, 경제, 행정, 군 등에 친일파가 일소되어 온갖 부정부패의 뿌리가 발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고, 민족정기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질서한 속에서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했으며, 친일파들이 사회 각분야를 섞게 하다보니 우리사회가 더욱 부패하게 된다. 이승만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시작을 잘못해서 오늘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부패의 그늘 속에 살게 만들었다.
박정희 전대통령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군에 복귀한다고 공약을 발표했다.
박대통령은 1969년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국회의원들을 회유와 협박하여 국회에서 3선개헌안을 통과시켰으며 국민투표도 통과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관권개입, 흑색선전, 금품살포 등 온갖 부정으로 세 번째 대통령에 당선되고 1년만인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미명하에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읍, 면, 동마다 대의원 1명씩 뽑아 장충체육관에서 단독 후보로 나와 대통령을 뽑게 했으니 종신대통령으로 군림한 짓이다. 이렇게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국민들이 유신헌법과 유신체제를 반대하자 긴급조치 1, 2, 3, 4호 등 초법적인 조치로 자유와 인권의 탄압을 제멋대로 하여 세상천지가 벌벌 떠는 사람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1973년 8월에는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김대중 선생을 납치해서 죽이려고 했으며, 1979년에는 김영삼 신민당 당수가 국회에서 제명까지 당하자 여론이 악화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반정부 항쟁까지 발생했다.
79년 9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산시위현장을 다녀와서 보고하자, 박대통령은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한다고 했으며,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는 3백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1백만이나 2백만 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고 했다. 이렇게 박통은 종신권력에 눈이 어두어 국민의 자유와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박통은 한 달에 열흘, 즉 3일에 한번은 궁정동에서 주색에 빠졌으니 더 말해서 뭣하랴. 그런 결과 부마항쟁의 여파로 그해 10월 26일 박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의 손으로 사살된 것이다.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3선개헌 문제다.
박대통령이 8년 동안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해서 경제발전의 열풍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했으니 헌법이 정한대로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물러났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여야를 불구하고 누가 당선되던지 간에 경제발전의 열차를 몰고 가게 되어 있다. 일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3선개헌을 한 것은 개인의 과욕이었으며, 이 과욕은 유신 체제로 발전한 계기를 만들었다.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니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결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음했었는가?

그러므로 박대통령은 3선개헌과 유신체제를 하지 않았으면 김대중 납치사건과 김영삼 제명사건 및 많은 인권유린, 부마항쟁, 김재규 정보부장의 시해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또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총살하지 않았으면 12․12 사건과 5․17 및 5․18 사건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5공 6공 정권이 독재하면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고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박대통령의 3선개헌과 유신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뿐인가? 경상도에서는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경상도 대통령이라고 내세워 지역감정과 지역갈등을 만들었다.
심지어는 그 당시 국회의장이 대구에서 연설할 때 박정희 씨는 경상도 대통령이라고 말했다가 언론에서 문제되자 잘못 와전되었다고 변명까지 한 일이 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지역감정과 지역갈등을 엉뚱한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을 보면 우습기 한이 없다.
또한 박대통령은 재벌중심의 경제발전을 시키다보니 중소기업의 발전이 미약하여 오늘날까지 경제기반이 약하며, 더구나 농촌투자가 미약하여 농촌이 가난하고 빈부차가 심하게 된 것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앞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두 분의 얘기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그 영향이 오늘까지 왔으며, 그 영향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다는 것을 얼른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고 또 유지하는 권모술수 속에 세상의 모든 일들이 비틀려 버렸다. 거기에 더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재는 정치군인들이 그것을 본 받아 박통보다 더 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게 바로 5공과 6공정권이 아닌가? 그런 것도 모르고 박통의 경제발전 공적으로 모든 잘못을 덮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1960년 민주당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을 세웠으며 1961년 5․16후에 그것을 가지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경제발전을 박통만이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국민들을 모독하는 발상이다.
이 나라에 인물이 그렇게 없는가? 궁측통이라는 말과 같이 누구든지 이리 저리 뛰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원망스러운 인물이 이승만 박사이고 그 다음이 박통이라고 생각된다. 웬 놈의 욕심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두 분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생명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이 자유와 인권인데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니 국민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가 아닐까?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는 한문책의 맨 처음에도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사람이 제일 귀하다’고 되어있다. 우리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독재자들의 과욕은 마지막을 슬프게 장식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분의 종말을 보아라. 한 분은 망명가서 죽고, 또 한 분은 부하의 총탄에 죽었으니 이렇게 슬픈 인생을 살아 무엇하랴!
또 그런 것이 성공한 인생일까! 절대로 아니다. 실패한 인생이다. 역사를 역류시키고 슬픈 종말을 맞이했으므로 더더욱 실패한 인생이다.
여보시오, 두 위인들이시여! 어찌 그렇게 사셨소?
나는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깊은 산속에서 지게목발에 작대기 장단을 맞추며 소리하는 나무꾼이 되겠소.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잠자며 처자식을 알뜰살뜰 보살피고 민족과 국가도 생각하는 그런 나무꾼이
되겠소.
2008년10월7일
김 만 식 (사단법인)평화통일시민연대 지도위원
(사단법인)동아시아역사 시민네트워크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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