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각해야 할 과제

1.내가 겪은 6.25전쟁, 2.군대는 공동체생활의 훈련장, 3.한많은 간도땅 우리 모두 생각해 보자.

함께 생각해야 할 과제

1. 내가 겪은 6 . 2 5 전쟁

피난길

1950년 6월12일, 인천중학교에서 공부가 시작되어 운동은 유도부에 지원하고, 영어 알파벳을 외우며 쓰고, 음악실에 들어 가 처음 보는 피아노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도 열심히 불렀다.
정말로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공부에 빠져들어 학교와 집만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6월 25일 새벽에 일어나니 북한 괴뢰군이 남침했다고 야단들이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북한 인민군이 새벽 4시에 일제히 38도선을 넘어 총격을 가하여 국방군이 적군을 격퇴 중이라며 걱정 을 하지 말라는 투의 말을 계속했다. 쌍비행기 두 대가 아침부터 종일 인천 하늘을 순회하며 비행 중이었고, 사람들은 갈팡질팡 이었다.
다음 날, 인천여중 앞을 지나 학교에 가는데, 여중의 규율부누나들은 평소와 같이 등교하는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학교에 갔지만 수업도 하지 않고 무기한 휴업령을 전달하며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쉬라고 했다. 숙부님 댁에 돌아오니 숙부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심하고 계셨다.
그런데 6월 28일 이른 아침에 막내 숙부가 나를 부르시더니 전쟁이 심상치 않아 너 먼저 고향에 가라며, 숙부님은 가족 때문에 전세를 봐서 행동하겠다고 하셨다. 아침밥을 빨리 먹고 숙부님과 함께 상인천 역에 가보니, 서울 쪽 운행은 금지 되었다는 광고판만 대문짝만하게 만들어서 세워놓았다. 새벽 2시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였다.
할 수 없이 숙부님 따라 하인천역에 이르니 하얀 옷들로 가득히 넘쳐나고 있었다. 그 시절은 백의민족(白衣民族)답게 하얀색의 옷을 많이 입었다. 10시가 되어도 수원에서 오는 기차는 보이지 않았다. 수 만 명의 하얀 인파가 술렁이더니 수원 쪽을 향해서 동으로 동으로 굽이쳐 나갔다.
숙부님은 따라 가라고 나에게 권하지만, 이제 13살 어린 나이에 혼자 간다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숙부님은 가방만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또 채근하며, ‘나는 가족 때문에 지금 못 간다. 아무튼 여기 사정을 봐 가며 급하면 나도 고향에 갈테니, 너부터 가야한다. 용기를 내야 해. 알았니?’ 라고 설명하셨다. 떠나야 하는 나와 어린 조카를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피난길에 내모는 숙부가 서성거리다가 숙부가 내 등을 인파 쪽으로 밀었다. 할 수 없이 나는 학교의 배지를 달고 학교 마크가 붙은 검정 모자를 쓴 채 하얀 물결 속에 묻히며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니 막내 숙부님은 혼자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셨다.
큰길로 가다가 빨리 가려고 돌아가는 굽은 길을 피해서 기찻길로 가는데, 어떤 때는 철길다리를 건너며 밑을 보면 수십 미터 밑에 물이 흐르고 있어 아찔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고, 철도 침목 사이가 넓어서 발걸음을 크게 벌려야 했다. 거기다가 태양빛은 강력하게 내리꽂아서 땀은 나고, 갈증이 나서 애를 먹었다. 수인선은 서해안의 바닷가에 인접해서 철교다리가 여러 군데 있었다. 몇 시간을 걸었을 무렵, 내 또래 중학생 5명을 만나 알고 보니 내 고향을 거쳐서 그들의 고향인 당진까지 가는 길이었다. 서로가 반가웠다.
그런데 한참 걷다보니 높은 산이 있고, 지형이 험한 곳에서 국방군 수천명이 소총에 대검을 꽂고 맨 앞에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산으로 오르는 것이 보였다. 전투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잠시 더 가니까 수원 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와 반대쪽으로 가던 40대의 남자가 수원 비행장이 북한 전투기의 공습으로 불타고 있다고 한마디만 던지고 가버렸다. 우리 일행과 함께 가던 40대의 남자는 저런 사람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며, 바로 저런 사람이 오열(五列)이라고 일러 주었다. 오열이란, 적의 내부에 침투하여 모략하고 파괴하고 간첩활동을 하는 비밀요원을 뜻한다.
어둠이 짙어지고 나서도 얼마나 걸었는지 몰랐다. 모두 지쳐서 어느 민가에 중학생 6명이 들어서니 저녁밥을 지어줘서 정신없이 퍼먹고 마루에 그대로 쓰러졌다. 다음날 눈이 떠져서 밖을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동쪽을 바라보니 화물열차 지붕 위에 사람들이 하얗게 타고 있었다. 바로 거기가 수원역 이었다.
어제 저녁에 수원역 근처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우리 일행 6명은 밥을 먹자마자 수원역으로 달려갔지만 화물열차 지붕에는 올라갈 틈이 없었고, 위험했다. 우리 6명도 파고들었지만, 나는 지붕에서 내려와 잠시 서 있는데 어떤 젊은 여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신음소리도 움직임도 없는데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비정(非情)한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지붕 위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석탄으로 불을 때는 기차 화통칸에 기어올라 탔다. 기관사는 막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화통칸의 바로 뒤칸은 석탄이 가득한데, 그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느 작은 공간을 보는 순간, 석탄 위로 소총의 끝이 두 개나 보였다. 잠시 후, 국방군 육군 대위가 화통 칸에 오르자 마자 소총 끝은 석탄 속으로 사라졌다.
육군 대위는 잠시 후에 허리에 찬 권총을 빼더니 하늘 높이 뻗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여기에 국방군이나 경찰은 모두 나를 따라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즉결처분합니다.’ 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장교가 떠난 지 얼마 안되어 화부가 삽으로 석탄을 푹 퍼서 화구의 발잡이를 발로 누르고 집어넣기 시작했다. 석탄을 집어넣을 때마다 불꽃과 탄가루가 튀어나와 얼굴과 팔에 날아들어 뜨거운 열기와 따가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한동안 불을 때더니 삐이익, 기적소리를 몇 번 내고 떠난 후에도 화부는 계속 불을 땠다.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나마도 수원 다음 역인 병점까지 와서 나한테 내리라고 하더니 기관차만 떼어 내어 어디론가 가버리고 오지 않았다. 겨우 7킬로미터를 타고 오느라고 불찜질만 당한 꼴이었다. 우리일행은 또 걷기 시작했는데, 트럭마다 국방군들이 나뭇가지로 위장을 하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군가를 부르면서 북으로 달려갔다.
오산에 와서 다리를 건너 길거리에서 찐 감자를 몇 개씩 사먹고 또 걸었다. 서정리에 이르러 해는 기울기 시작하여 평택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하늘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충남 아산군 영인면 어느 동네를 묻고 물어 같은 동행의 고모댁을 찾아갔을 때는 밤 9시가 넘어서였다. 급하게 새로 지은 밥을 먹고 그 자리에 6명이 죽은 듯이 쓰러져 잠을 잤다.
다음날도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해가 하늘 가운데 떠 있었다. 주는 밥을 먹고 그곳에서 이십 리가 넘는 우리 집을 향해서 또 걸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 1구 동네의 가운데를 우리 일행이 지나가는데 동네누나가, ‘만기가 와유, 만기가 와유!’ 라고 외치는 소리에 어디선가 어머니가 들으시고 뛰어 오셨다. 만기는 나의 별명 또는 호였다.
‘애야, 만기야, 어떻게 왔어? 서울 인천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야단들인데.’ 라며 어머니는 말을 더 잇지 못 하고 너무 반가워 울먹이셨다.
나는 당진을 찾아가는 일행 5명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점심밥을 먹인 후, 잠시 쉬었다가 대음리의 나루터까지 함께 가서 나룻배가 떠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당진은 아산만을 사이에 둔 곳이라 배를 타고 다니는 곳이었다. 지금은 삽교호 제방으로 몇 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여하간 2박3일간 함께 걸으며 고생한 친구들과 헤어지니 섭섭한 마음이 일었다.

․살벌한 세상

7월 초가 되자 막내 숙부님이 오셨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걱정이 크셨다. 도시와 달리 농촌은 누구네의 살림살이는 물론, 사람 출입이 드러나는 곳이라서 좌익 세력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땅이 꺼지는 듯이 걱정하셨다.
‘아무개, 또 아무개는 네가 8․15 해방 후에 경찰관을 한 것을 다 아는 놈들이여, 암만해도 네가 올라가는 게 났겠다. 아는 놈들이 더 무서워.’ 라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막내 숙부님에게 얘기하셨다. 그래도 막내 숙부님은 푸근한 고향이 좋은지 망설이며, 나를 데리고 냉정리 저수지로 낚시질을 가는 도중에 산 밑을 지나가는 1개 분대 병력의 인민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런데 막내 숙부님은 기지를 발동하여, ‘동무들, 수고하십니다.’ 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무표정한 태도로 힐끗 쳐다보고 계속 걸어갔다. 막내 숙부님은 낚싯대를 잡고 있었지만 계속 무슨 생각에 잠기더니 다음날 새벽 일찍 아무도 모르게 인천으로 가셨다.
밤이면 밤마다 소년단, 여성동맹, 청년동맹 등의 여러 가지 회의가 벌어지고, 북한과 김일성의 노래 및 적기가 등 군가를 불렀다. 나는 중학생이라 학생동맹에 가입되어 매일같이 낮에 공세리 성당의 부속건물에 갔다.
중학생 이상이라고 하지만 대학생까지 모두 30명도 안 되었다. 공세리 성당은 섬같이 돌출 된 지역에 나무가 울창한 속에 있어서 아름다운 곳인데, 성당 내부의 성상도 모두 없어지고 썰렁하게 변해버렸다. 학생동맹은 별도로 지어진 적색벽돌 집에서 매일 모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 스탈린이 어떻고, 김일성이 어떻고 하며 열변을 토한 후에, 인민군이 대구를 진격하고, 머지않아 부산까지 함락시킬 것이라고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군가를 불렀다.

그리고 7월 중순부터 우익사람들이 잡혀갔는데, 아버지는 도망치듯이 집안으로 들어오시어 겁먹은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도 놀라셔서 아버지와 마주앉아 세상 탓을 하셨다.
“애비야, 왜 그러느냐?”
“밖에 못 나가겠어유. 저 놈들이 누구를 죽이려고 대장간에서 창과 칼을 베려유. 사지가 떨리네유.”
“세상이 다 된거여. 누구 또 누구, 그 놈들의 짓이지 뭐. 에이, 죽일 놈의 세상이여.”
“나가셔서 그런 말씀하시지 마시유. 다 죽어유. 정말 큰일 나유. 알으셨지유?”
“얘는 집안에서나 하는 말이지.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니. 죽으려고 그런 말을 하니. 막내가 잘 떠났어. 여기 있었으면 벌써 잡혀갔어.”
이렇게 부자간의 겁나는 얘기를 할머니와 어머니는 멍하니 듣고만 계셨다. 잠시 후에 부자간의 이야기가 또 시작되었다.
“텃밭을 공연히 대장간에 빌려주었시유. 그렇지 않았으면 창이나 칼을 만들 수 없었을 텐데유.”
“우리 탓이냐? 세상 탓이여. 우리가 시킨 것도 아니고 대장장이 김씨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강제로 시켜서 만드는 것이여.“
이렇게 집안 어른들은 겁을 먹고 걱정이 태산 같았으며, 더구나 인천으로 떠나간 막내 숙부님의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해하셨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지나서 우리 면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산속에서 볏짚 가마 속에 넣어진 채 벌집이 되어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서 모두 벌벌 떨어야 했다.
7월 중순 어느 날, 인민군이 성당의 우거진 숲의 그늘에서 학생동맹 중에서 몇 사람을 부르더니 제식훈련을 시켰는데, 나도 끼어서 배워보니 우리가 배운 것과는 반대였다. 팔과 다리의 관절을 굽히지 않고 쭉쭉 펴며 걷고, 뒤로 돌때는 왼쪽으로 돌았다. 자연스럽지 못한 제식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월 말경에는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모이라고 하더니 인주면 내를 야간행군을 했다. 나는 졸음에 지쳐서 맨뒤에서 비틀거리며 걷는데, 위원장이 졸지 말고 부지런히 가라고 야단이었다.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져 갔다. 중학교 고학년 이상은 의용군에 많이 끌려가고, 동네 젊은이들도 의용군에 끌려갔고, 거기다가 동네 산마다 아산만을 향해서 길게 호를 파나갔다. 이웃 면의 사람들까지 동원되어 우리 집에서도 점심밥을 지어주기도 했다. 전투준비 태세가 역력하여 민심은 더욱 술렁대었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나는 동무들과 함께 밀물 때면 개펄에 수영을 하러 다니고 망동어 낚시도 했다. 어떤 때는 동무들 대여섯 명과 수영을 하는데, 유엔군 폭격기 수십 대가 아산만 상공을 배회하며 수영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를 낮게 떠서 천천히 오락가락했다. 비행기의 위력에 놀라 너도나도 발가벗은 채로 개펄 제방의 아카시아 숲 속에 맨발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카시아 가시에 찔리기도 했으며, 비행기 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무서운 시간이었다. 기관총으로 드르륵 긁어대거나 폭격을 하여 억울하게 죽으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름에 밀물 때가 되면 개펄에 가서 깜둥이가 되도록 수영을 했다.
그런데 8월 말 경에 이르러 인심이 점점 사나워져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화 속에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제가 밀머리에 갔다가 아무개를 만났는데 저 보고 공산당에 입당하래유.”
“그래서 입당했니?”
“아이구, 아버지도 별 말씀을 다 하시네유. 제가 미쳤나유우.”
“그래서 어떻게 했어?”
“어떻게 할 것도 뭐 있나유우. 땅이나 파먹는 놈이 무슨 당을 한 대유우. 나는 그런 거 몰라유 라고 했지유.”
“참 잘했다. 나도 오늘 아침나절 밀머리에 갔더니 그 사람이 나한테도 공산당에 입당하라고 하더라. 형님, 이런 때 입당하는 게 좋아유 라며 독촉하더라. 그래서 나도 네 말같이 나같이 땅이나 파먹는 사람이 무슨 당이여, 나는 그런 것을 모르네 라고 대꾸하고 집으로 부지런히 왔다.”
“아버지도 말씀 잘 하셨네유.”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나는 무엇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지나 저녁밥을 먹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더욱 심상치 않은 얘기를 나누셨다. 저녁상이라야 상위에는 열무김치와 호박 된장찌개에 고봉으로 퍼놓은 꽁보리밥이 전부였다. 파리 떼를 손으로 쫓으며 식사를 하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듯 하시더니 또 세상 탓을 하시기 시작했다.
“오늘 밀머리에서 아무개를 만났는데, 또 공산당에 가입하래유.”
“그래서 뭐라고 했니?”
“뭐라고 할 것도 있나유. 지난 번 같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자리를 얼른 떴지유. 그런데 제 뒤통수에 대고, 이 사람아 어디 두고 보게 라고 하대유. 큰일났유. 어떻게 하면 좋아유?”
“애비야. 잘했다. 그 사람이 오늘도 나한테도 또 공산당에 가입하라고 하더라. 나도 지난번 같이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형님 어디 두고 봅시다.’ 라고 엄포를 주는 거여. 그래서 속으로 이 놈들아 마음대로 해봐라 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왔다.”
“세상이 너무 무서워유. 제대로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유.”
“세상이 말세다. 점점 악해져가니 큰일이다.”
이렇게 공산당 입당독촉에 집안 어른들은 마음 졸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캄캄한 밤중에 잠을 자다가 밖이 훤해서 동쪽을 보니 영인산 쪽 하늘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알고 보니 조명탄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들판에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는데, 신작로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서 급히 뛰어나가 보니 국방군의 트럭이었다.
내가 만세를 부르며 뛰는데, 어머니가 부르셔서 태극기를 가지고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따라서 안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다 낡은 옷장의 맨 밑바닥에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주셨다. 나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 무서운 세월 속에서 어떻게 감출 수 있는 마음이 생겼을까?
언제고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마당가에서 뒹구는 아카시아 막대기에 태극기를 질끈 동여매고 트럭을 향해서 달려나갔다.
트럭이 쇳대백이 동네 앞의 신작로에 서 있는데, 트럭 위에는 밀두리 인민위원장이 실려 있고, 그 옆에 낯모르는 이들도 잡혀 있었다. 나는 인민위원장을 본 순간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내 동무인 석윤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무식하듯이 석윤이 아버지도 무식한 사람이라서 동정이 더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좌익에 활동한 사람들이 모조리 잡혀갔다.
그날 저녁 밥상에서 아버지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걱정을 하셨다. 염전에서 지게를 지고 나오는데 석윤이가 염전으로 숨는 것을 보셨다며 무사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이셨다. 잡혀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10월 초순쯤, 성당 부속 건물에 이제는 학생동맹이 아닌 인주면 학도호국단이 모였다. 나는 맨 앞에 앉아 있었다. 잠시후에 초등학교 선배 두 명이 김명수 선배의 양쪽 팔을 양쪽 어깨에 걸치고 들어오는데, 김선배는 눈도 감긴 채로 몸뚱이가 축 늘어져서 질질 끌려왔다. 이미 다 죽은 모습이었다. 우리들 앞에 뉘어 놓고 몽둥이 10여 개가 준비되었다.
A선배가 ‘이 새끼야, 왜 그렇게 까불었어? 너희 형제들이 다 그랬지?’ 라고 하고 B선배는 ‘이 새끼야, 선배도 몰라보고 항상 네 세상인 줄 알았지?’라고 하더니, 두 선배는 몽둥이 하나씩을 들고 배와 허벅지를 마구 쳤다. 오뉴월에 개 패듯 한다는 속담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선배의 귀에 담뱃불을 대니까 김선배는 그래도 의식이 있었는지 머리를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A선배는 ‘이 새끼가 아직도 살았어.’ 하고, B 선배는 ‘더 쳐야해!’ 하더니 보리타작하듯이 마구 치지만 신음소리마저 나지 않는데 몽둥이가 정강이를 힘껏 내리치자 다 죽은 듯 하던 김선배의 몸뚱이 상체가 벌떡 일어났다가 무슨 짐짝같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매질을 하지만 신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얼마를 쳤던지 소나무 몽둥이는 모두 부러지고 참나무 몽둥이 두 개만 남게 되었다.
두 선배가 담뱃불을 귀에 대면 김선배는 또 머리만 간신히 돌리고, 그러면 두 선배는 욕을 퍼부으며 참나무 몽둥이로 정강이를 또 내리치면 신음소리도 없이 상체만 벌떡 일어났다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기를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참으로 끈질긴 목숨을 보는 순간이었다. 사실은 다 죽은 것이었다. 이때 뒤를 돌아보니 모두 말도 못 하고 정신 나간 사람들같이 앉아서 바라볼 뿐이었다. 어떤 대학생 선배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김명수 선배는 형들과 함께 너무 날뛰다가 이런 변을 당한 것이었다. 자기의 부모형제가 희생된 사람들은 복수심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다.
이렇게 개 패듯 하고 있는데, 공세리에 사는 30대 후반의 선배가 들어와서 ‘이 사람들아, 이제 이런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자네들은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 공부해야지.’ 라고 한마디했다.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끔찍한 일을 보고 집에 돌아오니, 공세리에 사시는 집안 아저씨가 동네 인민위원장을 해서 잡혀서 죽고, 물 건너 집안 아저씨도 동네일을 보다가 변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물 건너에 사시는 막내 이모네는 이모부가 부역을 했다고 이모와 아이들까지 몰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어른들은 멍하니 정신 나간 사람들같이 앉아만 계셨다. 어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계실 뿐 말문이 막혀 있었다. 얼마 후에는 인천으로 가셨던 막내 숙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끌려가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어른들은 밤잠을 못 자며 시름에 빠졌다.
이렇게 우익으로 몰려 죽고, 좌익으로 몰려 죽어야 하는 세월이었다. 그리하여 산에 파놓은 호 속에는 시체들이 널려지게 되고, 이래저래 떼과부만 생겨나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차마 보고들을 수 없는 일들이 삼사 개월 사이에 벌어졌다.
생각해보면, 사상이 무엇이기에 죽고 죽어야 하나? 사람이 사상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사상이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지. 그렇게 했으면 희생이 없었을 텐데. 확실히 거꾸로 된 세상을 살고있는 것이었다.


2. 군대는 공동체생활의 훈련장

군대 지원 입대 (논산훈련소)
나는 군대 지원을 결심하고, 1959년 1월 28일, 새벽밥을 먹고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며, 면회를 오시지 말라고 당부 드린 후, 지원서류를 품속에 넣고 논산군 강경읍을 향해서 떠났다. 하늘은 눈이 곧 내릴 듯 구름으로 덮였는데, 강경초등학교 운동장에 9시 반경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꽉 차서 추위도 잊은 채 술렁이고 있었다. 지원서를 제출하니 즉시 받아주며 징집자 1,500명 속에 세웠다. 11시 반부터 주먹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속에서 인원을 파악하고 정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잠시 후에, 함박눈이 쏟아지는 속에서 보리가 섞인 주먹밥만 한 덩어리씩 나누어주었다. 국물은 물론 따뜻한 물도 없었다.
앞에서 누군가 하늘로 공을 던지듯이 주먹밥을 높이 던지니 너도나도 주먹밥을 힘껏 하늘로 던졌다. 워낙 많이 내리는 함박눈 속에 묻혀 주먹밥은 흔적도 없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가난한 시절이지만, 집에서 떠날 때는 따뜻한 국물에 따뜻한 밥을 먹고 왔는데, 추위 속에서 차디찬 주먹밥은 씹히지 않았다. 운동장에는 국밥이나 더운물도, 차도 파는 사람이 없고, 보온도시락이나 보온병도 없는 시절이었다.
해가 질 무렵, 1,500명은 3열씩 줄을 서서 논산 훈련소의 예비연대로 출발했다. 어두워지면서 예비연대에 도착하니 한개 막사(50명 정원)에 120명 씩 집어넣었다. 잠시 후에, 밥과 콩나물국이 수저나 젓가락도 없이 배식되었다. 할 수 없이 조금 전에 나누어준 건빵 봉지를 몇 차례 접고 단단하게 눌러서 밥을 콩나물국에 넣은 후 마구 퍼 넣었다. 점심밥을 굶어서 그런지 구수한 밥과 국이 그렇게 맛있었다. 상사가 들어와 나를 향도(嚮導 ;내무반 책임자)로 뽑아놓고 나가면서, 둥근 연탄난로를 발로 걷어차고 나간다. 위협을 주는 행동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 불안해하는데,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20명을 분대를 짜서 난로를 돌아가며 돌보게 하고, 불침번도 정해놓았지만, 너무 좁아서 머리를 다른 사람의 다리 쪽으로 누워서도 반듯하게 눕지 못하고 옆으로 누워 남의 다리를 껴안고 자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삭발하는데, 먼저 박박 머리가 된 사람들은 삭발이 서운한지 머리통을 자꾸 쓸어내리며, ‘이게 뭐여, 고르게 깎지’ 라고 불평을 했다. 나는 예비연대에 입소한지 이틀 만에 이발소 의자에 앉으며 ‘이제 머리빗도 필요 없으니 이거나 드리지요‘ 라며, 오래 길들어진 검정 머리빗을 내밀었다. 이발사도 군인들이지만 기분이 좋은지 빙그레 웃으며 얼른 받고 나서 머리통에 이발기를 열심히 움직였다. 내무반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향도, 머리가 너무 짧지도 않고, 고르게 깎았어.’ 라며 웃었다.
종합 신체검사를 여러 시간 하고 나서 마지막에 병과를 분류하는 판정관 앞에 가자, 무슨 병과를 원하느냐고 하기에 ‘정보’하고 했더니 판정관은 그대로 해주었다.
훈련시의 이모저모
며칠 후에 훈련연대로 넘어가 8주 훈련이 시작되었다. 군복을 받아보니 선배들이 입던 구멍이 난 누비바지가 내게 지급되었고, 어떤 훈련병은 색깔이 누런 군복이었다. 내가 피복 공장에 있을 때 사장이 몰래 끼워 넣었던 바로 그런 옷이었다. 이가 득실거려 가끔 DDT약을 옷 속에 뿌리지만, 잠자리에 누워 가려운 곳을 더듬으면 보리만한 이가 손에 잡혀 옷 속에서 손톱으로 눌러 죽이며 잠을 잤다.
매일 저녁에 건빵 반 봉지와 화랑담배 열 개비씩이 배급되었지만, 내 담배는 다른 사람에게 주고 건빵만 열심히 먹었다.
6시에 기상 나팔소리가 울리면 모두 집합하여 소대 별로 열을 맞춰서 근처 냇가에 자갈을 주우러 가서 손이 시린 찬물을 얼굴에 바르듯이 세수 흉내를 냈다. 아침밥을 먹고 소대 대대별로 훈련장으로 오고 갈 때는 군가를 불렀다. 항상 기간 사병이 이끌며 큰소리로 외쳤다.
“군가는 제 2 훈련소가를 부른다. 알았나?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시작!”

<제 2 훈련소 군가>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뼈가 지하에 스며나니
웅장한 호남 무대 높이 우러러 섰고
대한의 건아들이 서로 모인 이곳이
오호, 젊은이들의 자랑, 제 2 훈련소

“또 다음 군가는 전우야 잘 자라를 부른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시작!”

<전우야 잘 자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거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이와 같이 훈련이 끝날 때까지 두 가지 군가는 계속되었다.
그 넓은 옛날의 황산벌에는 여러 가지의 훈련장이 설치되어 제식훈련, 총검술, 사격술, 각개전투훈련, 소총사격장, 수류탄 투척장, 야간침투 훈련장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2월은 추운 계절이라서 벌판에 부는 찬바람은 추워서 떨게 했다. 그런 속에서 훈련병들은 사격술 시간이 재미있었다. 훈련 교관의 말이 재미를 붙이게 했다.
“지금부터 내 말에 따라 사격 연습을 한다. 엎드려 쏴, 거총, 다음에는 처녀의 젖가슴을 만지듯이 천천히 방아쇠 1단계를 당기고, 2 단계를 당긴다. 알았나?”
훈련병들은 “예, 알았습니다. 낄낄낄!” 하고
교관은 “뭐가 우스운가? 정말 우스운가?” 라고 물으면
훈련병들은 “예, 우습습니다.” 라고 합창을 했다.
“다시 반복한다. 엎드려 쏴, 거총(소총의 개머리판을 바른쪽 어깨에 대고, 왼손은 총대를 받치고 정조준 하는 자세), 처녀 가슴을 만지듯이 천천히 방아쇠 1단계를 당기고, 2단계를 당긴다.”
“낄낄낄!”
이렇게 엎드려 쏘는 사격연습을 수십 번 반복한 뒤에 앉아 쏴 자세와 서서 쏴 자세의 훈련을 수십 번씩 반복했다.
고달픈 훈련 속에서도 점심시간에 노래나 특기자랑이 재미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천 출신으로 피부색이 가무잡잡하고 외국인 같은 인상을 주는 훈련병이 ‘찌찌 빠빠 룰라 이스 마이 베이비...’를 부르면 모두 환호성을 질러대며 앵콜을 소리 높이 외쳤다. 인상과 목소리가 어우러져 더 재미있었다.
그런데 훈련연대에 온 지 며칠 안 되어 새벽마다 엿 고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내 딴에는 훈련소 주변에 민가가 많기 때문에 민가에서 엿을 고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매일같이 하루종일 배가 고팠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논산에서 입대한 사람들의 부모님들이 면회를 오면 불러주어서 쌀밥에 쇠고기국과 찰떡을 실컷 먹기도 했다.
월요일 아침마다 변소에 가면 일주일 내내 고된 훈련에 주린 배를 한꺼번에 채우려는 듯이 일요일 면회 시에 너무 먹어서 설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칸막이도 없는 변소는 통로 양쪽에 십여 개씩 뚫어 놓아서 양쪽에 일렬로 똥을 누는 장면은 정말 가관이었다. 앞사람의 엉덩이와 옆 사람들의 엉덩이에서 괴성을 내면서 쏟아지며 나오는 냄새는 코와 귀와 눈을 혹사 시켰다.
또한 실탄 사격 훈련 시에는 M1 소총으로 하는데, 동양인 체격에 너무 크고, 무겁고,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처음 쏠때는 얼떨떨한 기분인데, 십 여발을 다 쏘고나면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먹먹했다.
수류탄을 실제로 던지는 훈련은 겁이 났다. 오른손으로 수류탄을 쥐고 왼손으로 핀을 뽑아 얼른 던져야 하는데, 만일 핀을 뽑자마자 터지면 어쩌나, 옆에 훈련병이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겁을 나게 했다. 완전히 잘 던져서 저 멀리 있는 깊은 구덩이에서 펑 소리가 나도 훈련병들은 처음이라 두려워했다.
뭐니 뭐니 해도 마지막 코스인 야간 침투 사격 훈련 시가 제일 애를 먹었다. 몸뚱이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게 땅에 낮게 깔려 있는 수 십 미터의 철조망 그물을 소총 하나만 가지고 등을 땅바닥에 붙이고 그 밑을 돌파할 때, 위에서는 기관총탄이 계속 날고, 옆에는 물대포가 계속 터져 실제 전투상황 같아서 훈련병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코를 찔러댔던 엿 고는 냄새의 원인은 취사 당번이 되어 취사장에 가까이 갈수록 취사장에서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가 너무 고프다보니 밥과 국의 냄새가 그렇게 달았던 것이다.
이럭저럭 8주간의 고된 훈련도 끝나고, 4월 초에 배출대로 넘어가 25일이나 그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보병과는 소수이기 때문에 36명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육군 정보 학교
4월 말경, 오후 두 시가 넘어 육군 정보학교에 도착했는데, 점심밥이 없었다. 취사장에서 밥만 급하게 짓더니 날된장 한가지만 주어서 할 수 없이 된장으로 썩썩 비벼서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나보다. 여기도 밥이 적기는 훈련소와 마찬가지였다. 항고 뚜껑에 밥을 퍼주었다.
육군 36명에 해병대 4명(상병 1명, 일등병 3명)이 일개 반이 되어 해병대 상등병이 학생장이었다.
토요일 외출 나가 대구 역전에서 5명이 싸구려 점심을 먹는데, 헌병 두 명이 지나가다가 나오라고 하더니 일렬로 세워놓고 따귀 한 대씩을 갈기고 가라고 했다. 우리 일행 다섯 명은 음식점으로 빨리 들어가 먹던 밥을 다시 먹으며 생각해 봐도 왜 맞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졸병은 동네북이었다. 새카만 이등병들은 군대 규율도 잘 모르는데, 이렇게 저렇게 기합만 당하는 것이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에는 해병대 일병 세 명을 구대장(기간 요원인 하사)이 엎드려 뻗쳐를 시키더니, 커다란 곡괭이 자루를 높이 들어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이 새끼들아, 엎드려뻗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허리병신 된다. 알았나?”
두 대씩 펑펑 칠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신음소리가 터졌다. 마지막에 매 맞은 키가 작은 해병은 “아이고, 아이고!”하다가 두 번째 때릴 때는 “아이고 내 불알아, 아이고 내 불알아!” 하는 바람에 공포 분위기가 역전되어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해병대가 억세다 보니 구대장이 기를 꺾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외 교육 시에 점심 때 깡통에서 따르는 돼지고기 국을 보니 통째로 먹고 싶었다. 배식된 국은 돼지비계가 몇 점 밖에 안 되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국보다도 맛이 제일 좋았다.
이렇게 교육 훈련을 하다가 시간이 나면 가끔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에서 40명이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6월 중순 어느날 오후, 40명이 금호강에서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빽빽한 솔밭 속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하얀 한복을 곱게 입은 이십 대의 예쁜 아가씨가 우리들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는 한복을 많이 입었다. 40명의 행군 속도가 느려지더니 세 녀석이 아가씨의 앞을 가로막고 이러니저러니 시비가 벌어졌다. 세 녀석은 아가씨에게 노래 한 곡만 불러달라고 조르고, 아가씨는 못 한다고 버티는데, 이때 나머지 37명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탁했다. 아가씨는 다수의 힘에 눌렸는지, 수줍어하며 머뭇거리더니, ‘처녀 뱃사공’ 한 곡만 부르겠다고 했다.
1절만 불렀는데, 예쁜 아가씨가 불러서 그런지, 노래의 맛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40명 모두가 손목이 부러져라 박수를 치며 2절까지 부르라고 생떼를 썼다. 아가씨는 할 수 없이 2절도 구성진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40명의 군복들도 누가 뭐라고 한 것이 아니지만 마지막 구절인 후렴에 끼어들었다.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산속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아가씨와 40명은 어느 새 친숙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쯤 되자 또 한 곡조를 부탁해서 부르게 하고, 결국은 세 곡을 부르게 했다. 40명은 그 아가씨를 힘찬 박수로 보내주면서도 섭섭한 마음들로 가득 차서 걸어가는 아가씨의 뒷모습만 멍하니 한참 바라보았다.
부대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아가씨가 부른 ‘처녀 뱃사공’이 얘깃거리가 되었다. 금호강이 낙동강의 지류라는 점과 군인이라는 신분 등이 잘 어우러진 노래를 선택해서 가슴들을 찡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토요일에 외출해서 서울까지 다녀오는데, 부산행 완행열차를 놓치고 할 수 없이 몰래 급행열차에 올랐다. 나는 겁을 먹고 있는데 앞차에 탔던 병사들이 뒤쪽으로 자꾸 밀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군인 수송관인 상사가 앞차에서 훑어 온다는 것이었다. 나도 맨 뒤칸까지 밀리다가 수십 명이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상사는 외출증을 빼앗고 따귀를 한 대씩 갈겼다. 나는 대구에 가까이 왔을 무렵, 수송관인 상사를 만나 500원을 주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외출증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8주 교육도 끝나, 1959년 6월 27일, 졸업하는 날이 닥쳐왔다. 6시 기상 나팔소리와 동시에 내무반 밖을 나오니 본부 쪽에서 일병이 오라고 했다. 달려가자 창고 같은 곳으로 끌고 가서 이것저것을 시키므로 할 일이 많다고 하니까. ‘이 새끼가 아침부터 말이 많아’ 하며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참고 참으며 일을 도와주고 내무반에 들어서자, 인사를 담당하는 부관 과장이 호출했다고 일러주었다.
또 한 명과 둘이서 부관 과장실에 가자 과장이 “김만식 이병, 네가 일등이고, Y 이병은 이등이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하다가 군에 와서 공부하려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대답했지만, 육군 본부의 충원지시가 서울 지역은 없고, 부산에 병기기지 사령부와 공병 기지창이 있는데, 공병 기지창이 좋다며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Y 이병도 내가 가는 곳으로 지원했다.
나는 정보학교 졸업하는 날 새벽에 따귀 한 대 얻어맞고, 잠시 후에는 기쁜 마음이 되었다.
그렇지만 10시에 수료식이 열려 나는 공병 기지창으로 발령나고, Y 이병은 전방으로 배치되고 엉뚱하게 두 명이 나와 함께 가게 되었다. 몇 시간 만에 뒤바뀐 것이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었다. 그러나 1등만은 체면을 지켜 주었다.
40명이 기차로 대구까지 가는데 모두 전방으로 간다며 풀이 죽어 시무룩하고, Y 이병은 나와 헤어지기가 섭섭하여 눈물을 지었다. 나와 함께 가는 C 이병은 어느 소장의 빽이고, J 이병은 정보학교장의 빽이라고 했다.

공병 기지창
나는 처음 가보는 부산이라 호기심이 생겼지만, 높이 우뚝 선 공병 기지창의 정문 앞에 이르자 기가 꺾이는 것 같았다.
세 명이 S-2 (일반 부대는 정보과라고 하지만 공병 기지창은 공병 물자를 취급하는 부대라서 경비과)에 찾아가 신고를 했다. 세 명을 세워놓고 이것저것을 묻더니 나만 경비과로 배치하고 C와 J는 위병소로 보냈다.
과장은 소령이고, 일병까지 있으며, 내가 제일 졸병이라 낮에는 모두 출장 나가고, 나만 사무실을 지키며 혼자 밥을 먹었다. 식사 때마다 작은 밥통과 국통을 가지고 취사장에 가서 2인분 씩 받아 배가 부르게 먹었다. 논산 훈련소와 정보학교 시절 5개월간 너무 배가 고파 쩔쩔 매다가 이제는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살이 오를 무렵, 과장의 심부름으로 부대 밖을 다녀오는데, 위병소 안에서 J 중사와 K 하사가 들어오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이 나를 구석에 세워놓고 주먹으로 치고 구둣발로 찼다. 도망갈 구멍도 없이 꼼짝 못하고 실컷 두드려 맞아 입술이 터지고 얼굴과 다리에 멍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만해서 때렸다는 것이다.
나의 태도가 당당하고, 걸음걸이가 힘차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억울한 매를 실컷 맞고 나니 이제부터는 때리기 전에 어떻게 하던 도망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한 끼에 2인분씩 배부르게 먹어 두 달 정도 되었을 때는 얼굴과 몸이 살덩이로 변해 투실투실해졌다. 이렇게 좋아졌을 때 과장이 부르더니 위병소에서 근무하라고 했다. 현재 경비과의 정원이 초과되어 있는데, 나와 함께 온 C와 J가 경비과로 오려고 운동을 하고 있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무엇이던지 경험을 쌓기 위해서 좋다고 대답했다. 9월 초부터 위병소로 가서 보초를 서게 되었다. 공병 기지창은 가야 분창을 빼고도, 본창에는 정문 이외도 6개 초소가 있었다. 그래서 두 시간씩 보초를 서는데, 정문에는 조장 1명, 기록계 1명, 보초 2명, 6개 초소에 1명씩, 모두 10명이 소요되었다. 거기다가 위병소 대장 2명, 중사 1명, 하사 1명이 포함되어 위병소 근무요원이 모두 60명이나 되었다. 공병물자가 많기 때문에 사방 감시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해는 바뀌어 1960년 2월 초에 오랜만에 15일 휴가증을 받았지만, K 일병이 지난 12월에 결혼하고 와서 색시 생각에 빠져 있음을 알고 위병소 대장과 상의한 후 내 휴가증과 명찰까지 K 일병에게 주어 고향집에 다녀오게 했다.
이제 4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세상이 점점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부산일보, 국제신문 등은 부대에 배달되지 않고 정부의 기관지인 서울신문만 배달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점점 이상한 바람이 불어왔다.
2월 초순에는 나에게 부대의 대표로 부산 지역 웅변대회에 나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주제는 한국의 부부제도로서 한국의 고유한 부부상을 그린 후에 끝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선생을 찬양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다음날 원고를 쓸 자신도 없고, 단상에 설 자신도 없다고 거절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박 일병은 자기가 나갈 테니 원고만 써달라고 나에게 매달렸다. 할 수 없이 한국의 고유한 부부 상만 써주고 끝 부분은 박 일병에게 미루었더니 웅변대회에서 2등을 했다며, 상으로 받은 일본제 금색 라이터를 자랑했다.
또한 3월 초순이 되자 특무대 장교 두 명이 병사들을 내무반의 침상 양쪽에 일렬로 세우더니 ‘너는 누구를 존경하나?’ 라고 물었다. 모두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공포분위기에 눌려서 이승만의 이름만 외치는 것이었다.
내 앞에도 어김없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하여 ‘세종대왕입니다.’ 라고 했더니,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영국의 처칠 수상입니다.’ 라고 했더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계속 유도 질문을 했지만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두 장교가 어이가 없는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가버리자, 병사들은 웅성거리며 ‘무섭지 않느냐, 잡혀가려고 그랬느냐 ? ’ 는 등 이러쿵저러쿵했다. 그러나 나는 담담했다.
3월 14일, 부대의 모든 병력을 운동장에 집합시키더니 3열종대로 세우고 가운데는 하사나 병장 같은 고참을 배치시켰다. 투표 시에 3인조씩 들어가 가리막 안에서 투표하고 나오기 전에 조장에게 보여주라고 지시를 했다. 투표대마다 가리막을 해야 하는데, 투표대 3개에 가리막은 하나만 한 것이었다. 세상에 별 일이 다 벌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3월 15일 투표장에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신 조병옥박사와 장면 박사에게 찍겠다고 조장에게 선언하고, 투표지에 기표한 뒤에 가리막 안에서 보여주었더니 씨익 웃으며 나갔다.
위병소에 오니 정말 가관이었다. 모두 무서워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선거가 끝났지만, 세상은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다.
3.15정.부통령선거는 3인조 투표와 사전 투표, 피아노 투표(손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투표인 명부에 지장을 찍고 대리 투표 하는 것)등, 모든 방법이 다 동원되어 유례없는 선거가 되었다.
이렇게 시국이 불안한 속에서도 위병소 대장과 조장들이 주색과 무단외박이 심하다고 수군수군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는 부창장이 부관을 데리고 위병소에 나타나 위병소 대장을 급히 부르더니, 부관에게 소대장의 입 냄새를 맡으라고 지시했다.
“소대장, 입을 크게 벌리고 힘껏 하, 해봐. 부관은 하, 할 때 냄새를 맡아야 한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잠시 후에 부관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보고하자 부창장은 믿을 수 없었던지 직접 나섰다.
“소대장, 또 입을 크게 벌리고 힘껏 하, 해봐.”
잠시 후에 부창장은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는 술을 먹지 않은 모양이라며 가버렸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소대장과 조장들은 주색과 무단외박이 계속 되었다. 나는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애 먹일 궁리를 했다.
4월 중순, 기상 나팔소리와 동시에 전원 집합이라고 큰소리치고 조장들을 잡으러 가자고 설명했다. 이심전심이었는지 초소 근무자를 제외하고 위병 50명이 모두 모였다. 맨 앞에는 나를 실컷 때렸던 J 중사와 K 하사가 나란히 서고, 모두 3렬종대로 집합되었다. 사실상 지휘자는 나였다.
“열중 쉬엇, 차렷. 지금부터 조장들을 잡으러 갑니다. 범일동 앞으로 뛰어 가 !” 라고 구령을 하자, 정문을 뒤로 하고 남천동 길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 달렸다.
이때 소대장이 누구한테 연락이 되었는지 죽을힘을 다해 뛰어와 내 옆에 따라 붙으며, ‘김 상병, 나를 살려주라!’고 애타게 호소했다. 1㎞ 이상 달렸을 무렵,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소대 제자리에 섯! 뒤로 돌아. 부대 앞으로 뛰어가!’ 라고 구령을 내리자 소대장은 그제야 아무 말 없이 풀이 죽어 따라왔다.
사실은 조장들이 어느 여관이나 어느 술집에 있는지도 모르고 한 일이었다. 공병 물자가 많은 부대의 경비 요원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어 모험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병물자의 부정유출이 많다는 정보에 따라 새로 부임한 경비과장 안 소령은 나와 박 일병에게 자기 지시만 받고 범인 단속을 하도록 비밀 명령을 몇 달 전에 내렸다.
그래서 나와 박 일병은 밤낮으로 부대 안과 밖을 자주 순찰하며 이것저것을 살펴보다가 어느 중사가 부품을 몰래 내가는 것을 잡은 뒤에는 고급 장교의 운전수가 이른 아침에 자기의 상관을 모시러 가는 길에 휘발유를 빼내는 것도 잡았다.
이렇게 소총을 메고 밤낮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나 앉아서 그런지 숫치질이 별안간 생겼다. 외출증을 받아 부산진역 근처에 있는 제 5 육군 병원의 접수구에 가니 접수하는 병사가 EBD(공병 기치장의 약어로 명찰에 새겨졌다)에서 왔느냐고 반기며 들어오라고 했다. 접수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제대할 생각이 없느냐고 유인을 해서 이까짓 치질로 무슨 제대냐며 거절하고 병실로 갔다. 무슨 돈이라도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것이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

의사한테 진찰을 받기 전에 병실을 둘러보니 몇백명이 야전 침대에 누워 있어 없는 병도 생길 것 같은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많은 환자 가운데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 장교들의 모습은 정말 천사같이 보였다. 진찰도 받지 않고 그대로 돌아와 며칠이 지나자 치질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또한 한밤중에 소총을 거꾸로 메고 부대 안을 순찰하는데 부대의 가운데 큰길에서 사람이 나타났다가 별안간 하수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하수도에 총을 앞세우고 들어갔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수도가 큰 원형 시멘트로 되어서 조금 구부리면 다닐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다. 부대가 산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 쪽도 위험하여 어느 날 밤, 살금살금 기다시피 순찰 중에 어느 젊은 남녀의 사랑만 방해하고 말았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데, 별안간 ‘전후방 교대’라는 미명으로 5월 25일, 전방으로 발령이 났다. 묘한 것은 내 휴가증과 내 명찰을 달고 휴가를 다녀왔던 김동수 상병도 함께 가게된 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전방부대
1960년 5월 25일, 기차로 전방에 가는 길인데, 대관령에 이르자 기차는 속력을 내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올라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칙칙폭폭 소리도 잦아들어 더욱 답답한 마음을 일게 했다.
부대에 배치된 지 일주일 만에 기상과 동시에 비상이 걸려 완전무장을 하고 산에 오르는데, 숨이 헐떡헐떡하고 철모와 M1소총과 배낭은 짓누르고 힘이 빠져 중간도 못 가서 주저앉았다. 평지생활만 해오다가 아침밥도 먹지 않고 산을 처음 오르기란 너무 힘이 들었다. 또 올라가다가 주저앉으면 정보 장교와 동료 병사들이 도와서 또 걸어 정상까지 겨우 올랐다.
산 밑을 내려다보니 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착각을 할 정도로 구름이 넘실대고 있었다. 이렇게 몇 차례 훈련된 뒤에 자신감이 생겨서 체력을 기르는 계기로 삼았다.
부대 건물은 통나무 기둥에 흙벽을 치고 볏짚으로 지붕을 했으며, 내무반은 토방이었다.
이렇게 허술한 건물을 둔 채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돌집을 짓느라고 병사들이 산에서 큰 바위를 자르고 다듬기에 깜둥이가 다 되었다. 부대 주변을 순찰하고 야산에 처 놓은 소형천막에서 쉬는데, 바로 눈앞에서 젊은 여인이 밭에서 김을 매고, 젖먹이는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었다. 하도 딱해서 어린애한테 젖을 먹이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더니 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자기 남편은 다쳐서 허리를 못 쓴다고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애기가 울던 말던 못 본체 했다.
그 해 가을채비로 땅을 파고, 나무를 얼기설기 하고, 긴 풀을 잘라서 칡넝쿨로 엮어 지붕을 만들어 덮으니 집안은 아늑하였다.
집안에서 입김이 하얗게 서리고, 땅에서 냉기가 솟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돌집이 다 되어 모두 아늑한 집으로 이사했지만, 60년도 겨울은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려 너무 힘에 겨웠다. 아침에 천막 사무실에 걸려 있는 온도계는 영하 30도를 가리키는데, 일하려고 잉크를 찍어 글씨를 쓰려고 하지만 얼어서 쓰지 못 했다. 또 새벽 4시가 되면 모든 부대원이 연병장의 눈을 치우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도 주변의 눈을 치우느라고 애를 먹었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사무실에서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고 위병소와 초소 순찰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밤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누가 등을 후려처서 통증으로 깨어보면, 고참 하사가 어디서 술을 먹었는지 만취된 상태로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잠들어 있는 병사들을 때리고 있었다. 너무 한심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유 없는 폭력이었다. 계급이 낮으면 자기의 밥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바탕 싸우고 싶었지만 군대라는 계급사회는 그게 용납이 안 되었다. 그래서 맞고도 바보같이 지내게 된다.
그런데 내가 상병 주제 무슨 일로 다른 과의 병장과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본부 중대장이 보고 나를 부르더니 구둣발로 정강이를 차려고 하는 순간, 재빨리 피해서 도망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다. 단체 기합으로 토끼 뜀뛰기를 시키고도 침대 막대기로 한 대씩 때릴 때 내 차례가 되면 무조건 도망쳐버렸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눈치를 봐 가며 가까이 가고, 시원치 않으면 도망쳐 버렸다. 군대의 사기를 꺾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폭력이었다.
그리고 눈이 하얗게 내린 추운 날, CPX 훈련 심판단 본부의 정보처에 파견을 갔다. 깊은 산속 여기저기에는 천막이 여러 개가 처 있고, 정보처에는 처장이 중령, 보좌관은 대위, 사병은 나까지 다섯 명이었다. 첫날은 인사나 하고 준비하느라고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부터 3박 4일간 전쟁대비 훈련을 했다.
다음날 아침, 처장이 모두 부르더니 대위와 사병 4명은 모두 돌아가고 나만 남으라고 지시를 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모두 보내면 나 혼자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되었다. 모두 가 버린 뒤에 처장은 “저런 것들은 게으르고 정보나 누설시켜서 필요 없어. 김 병장, 나하고 둘이서 고생하자.”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돌려보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훈련이지만 진짜 전쟁같이 하려는 의지가 중령의 말속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단 둘이서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천막 속에는 둥근 무쇠난로 속에서 조개탄이 시뻘겋게 타고, 처장과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였다. 처장이 한반도 지도를 펴놓고 지시를 하면, 나는 그 즉시 백지에 적어 정보 문서를 만들었다. 하루에 120건 내지 130건이 만들어져 그 즉시 발송되었다. 꼭 필요한 내용만 간단히 적기 때문에 한장에 2줄에서 5줄만 쓰면 되지만 두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래서 사흘 밤을 한번도 누워보지 못 하고 앉은 채로 졸면서 말하고 쓰고 발송했다. 천막 밖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다.
이렇게 고된 훈련도 끝나 정보처장이 수고했다는 한 마디 말을 듣고 악수한 후 부대로 돌아왔다.
정말 별난 장교를 만나 난생 처음 사흘 밤을 새우는 기록을 세웠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철두철미한 장교가 있기에 우리 군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도 지나 봄이 되어 부대를 이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병사들은 매일같이 길고 긴 혁명공약을 외우느라고 애를 썼다.
그럭저럭 시간이 가던 7월 무더운 여름날 밤, 병사들이 천막 속에서 곤하게 잠들었을 때, 누가 잠을 깨우며 팬티 차림으로 밖에 집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뛰어나가 보니 캄캄한 어둠 속에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사계 손 상사가 ‘양 팔 간격 좌우로 나란히!’라고 몇 차례 구령을 내리더니, ‘그 자리에 엎드려 뻗쳐!’ 라고 지시했다.
모두 질퍽거리는 땅에 엎드렸는데 앞에서 몽둥이찜질이 시작되었다. 때릴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유도 모르고 단체 기합을 받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내 차례가 되었는데 손 상사의 몽둥이가 하늘 높이 두 번이나 올라갔으나 엉덩이에 살짝 대고 말았다. 다음 병사들도 신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때리지 않은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밤은 갔다.
다음날 점심을 먹고 해발 900미터나 되는 높은 산에서 흐르는 물가에 갔다가 우연히 손 상사를 만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내 말에 이어 손 상사의 말이 걸작이었다.
“야, 감사할 것도 없어. 너는 제 몫을 다 하는 놈인데 때릴 수가 없지 않느냐.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너는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사무실에서 일을 빨리 끝내고 실탄을 장전한 소총을 거꾸로 메고서 위병소로부터 시작하여 초소 순찰을 한 뒤에 900미터 고지의 OP(관측소)까지 다녀오더라. 그것도 모르고 본부 놈들은 저희들 눈에 안보이면 너를 국제 농땡이라고 짓거리는 거야. 저희들이 국제 농땡이면서도 이러쿵저러쿵 하잖아. 매일같이 모여서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놈들이 진짜 국제 농땡이들이야.”
이 말을 듣고 간밤에 있었던 단체 기합의 이유를 알고 나서 또 다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그럭저럭 가고 초가을이 되었다. 나는 제대 날짜를 이십 여일 남겨놓고도 박 상병과 함께 순찰 중인데 노랗게 꽃이 핀 싸리 숲 근처에서 꿀통 오십 여 개를 지키던 50대가 불렀다. 다가가자 양은 대접에 꿀을 가득 담고 수저 두 개를 내놓으며, 잘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보초 서고 순찰하는 일이 본래의 일이라고 해도 그 덕분에 꿀을 잘 따게 되어 고맙다는 것이었다.
박 상병은 세 수저를 먹더니 너무 달아서 못 먹겠다고 하는데, 나는 먹어도, 먹어도 계속 입으로 들어가 혼자 다 먹은 셈이 되었다. 그때가 오후 3시경이었다. 부대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으려는데 한 숟가락을 겨우 입에 넣고 숟가락을 놓았다.
동료 병사들이 왜 그러느냐기에 사실대로 설명했더니, 진짜 보약을 먹었다며 무병장수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날 밤에는 몸이 후끈후끈 했지만 다음날 대소변에도 이상이 없었다.

군대에서 제대하던 날
32개월의 군생활도 다 가고 1961년 9월 24일 추석날, 고향으로 갔다.
6시 기상과 동시에 정문을 나서자 자꾸 고개가 돌려져서 뒤를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다.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3년간 매일같이 제대라는 말을 노래했는데, 다리가 빨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엇을 놓고 가는, 아니 그보다는 잃어버리고 가는 서운한 마음이 자꾸 피어올랐다. 버스에 올라서 내가 왜 이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하나였다.
‘그렇다. 젊음을 두고 가는 거야. 정을 두고 가는 거야. 강원도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젊음과 정을 묻어버리고 가는 거야. 그래서 서운한 거야.’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전방으로 쫓겨 온 것이 다행이야. 나는 후방보다는 전방 체질이야. 이왕 군대 생활하려면 보초도 서고, 잠복근무도 하고, 고지도 올라가야지. 그래야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군인이 되지. 나는 최선을 다했으며, 더욱 강해졌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전방부대에서 부르던 ‘전선의 밤’을 마음속으로 읊었다.

<전선의 밤>
별 빛이 맑은 전선의 밤
용사의 꿈길은 고향의 길
이겨 돌아오란 목소리
가슴에 뜨거히 치민다
우리는 용사 밤의 용사
삼천리의 밤을 지키자

눈보라 짙은 전선의 밤
용사의 꿈길은 싸움의 길
내일 새벽 적진 탈환에
가슴들은 미리 뛰논다
삼천리의 밤을 지키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고향집 마당에 이르니 가족들은 떠오르는 둥근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군대생활 3년을 해보니까 어떠냐고 물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군대의 임무는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군대야말로 공동체 생활의 가장 좋은 훈련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20세까지 부모의 품에서 자기만 위하여 먹고 공부하다가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서 봉사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므로 제일 훌륭한 공동체 생활의 훈련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핑계 저 핑계로 병역을 기피하는 것은 혼자만 잘 살아보겠다는 모래알 같은 인간의 행동이므로 우리 공동체 사회의 반역죄인이 된다. 따라서 병역 기피자는 정치와 공무원 같은 공직을 가져서는 안된다. 병역 기피를 방조했거나 알았던 부모도 마찬가지다.


3. 한많은 간도 땅

1999년 7월 20일, 낮에 세미나가 있었는데, 바로 그날 저녁 7시부터 9시30분까지 연변대학 호텔 식당에서 연변대학 정년퇴직 교수 두분을 모시고 토론을 했다. 노트에 적힌 것을 옮겨본다.

토론

노동문 교수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중국이 우리나라입니다. 모국인 조선은 본관이고, 중국은 시집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사기꾼 어르신들에게 조선족 12,000여명이 걸려들어 집을 팔고 소를 팔고 재산을 몽땅 털려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같은 동포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아니지요.

우리 조선족은 1910년, 한·일 합방으로 고국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또 살기 위해서 만주로 또는 연해주로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길림성 내 연변이 조선족의 자치주가 될 때까지 피눈물 나는 싸움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한족(漢族)이외에 56개의 소수민족이 있지만, 우리말과 전통을 지키고 살아가면서 이렇게 중국의 중앙정부가 자치를 인정한 소수민족은 우리 조선족밖에 없습니다.

한글과 한문이 병용되는 연길 시내 간판을 여러분들은 보셨을 겁니다.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피눈물 나는 싸움으로 우리 민족의 혼을 지켰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잃어버리면 우리 민족의 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한글을 지켰습니다. 시내 상가에 붙어있는 가로 간판은 위에는 한글, 그 밑에는 한자를 써놓고, 세로간판은 좌측은 한자, 우측은 한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길고 큰 가로 간판에 한글을 먼저 쓰고 한문은 다음에 써서 ‘연길공항(延吉空港)’ 이라고 만들었습니다.”

20명 일행은 가슴 속을 파고드는 얘기에 숨을 죽이고 있었고 나는 부끄러운 마음까지 일었다.
다음은 서일권교수님이 말을 이었다.

“만주에는 3개의 성(省)이 있는데 연길시는 길림성에 속합니다. 여기가 조선 땅과 가까워서 일본 식민지시대에 많은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도망을 와서 험한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처음 지어 성공하고 사과와 배를 교접한 혼합품종인 ‘사과배’의 성공으로 중국 사람들보다 더 잘 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일제시대 간도(間島)로 알려진 곳입니다. 간도라는 말을 얼핏 들으면 섬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간도로 불려진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한반도가 일본 식민지가 된 초기에는 만주 땅은 일본의 힘이 미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중국 중앙정부의 힘이 크게 미치지도 못하고 조선과 중국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족은 일제시대 독립군을 도와주면서 일본 군대나 경찰에 짓밟혀 죽고 또 중국의 마적단에 빼앗기거나 죽고, 이래저래 희생되며 살아오면서 이 곳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족의 힘으로 세운 조선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의 역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계승과 민족문화의 계승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조선 어문학부와 조선 역사가 큰 역할을 합니다. 학교재정이 어려워서 민족대학으로 계승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고, 우리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대책이 연구되어야 합니다.
우리 조선족은 바지 밑에서 태어나지 않고, 치마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말의 뜻은 이런 것 입니다. 중국의 여자들은 바지를 많이 입지만, 조선족 여자들은 언제나 치마를 입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남한은 북한을 너무 모릅니다. 흡수통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노동문교수님은 마지막 말에 끼어들어 “너무 모르지요”라고 한마디를 했다.

20명 일행은 너무 미안해서 할 말을 잃은 듯이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때 내가 고요한 정적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지금 남한에서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습니다. 공자의 사상이 다 나쁘다는 것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유교사상 중에서 가부장제와 권위주의 등의 일부를 가지고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고 그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야말로 상업주의 발상으로 책이나 팔아먹으려고 뻥튀기한 책의 제목이지요. 유교사상이 다 나쁩니까?
우리의 전통문화를 구성한 한 요소로서 우리 민족을 지켜주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만 고쳐가며 살아가야 우리의 훌륭한 전통문화를 계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교수님들의 말씀을 듣고 나니 이런 책을 써낼 수 있는 남한사회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현직 대학교수입니다. 이런 교수의 발상같이 생각한다면 불교와 기독교의 흠은 없습니까?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작은 흠은 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 예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도 나오겠네요. 지성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두 교수님들이 우리 민족의 강인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어느 나라든지 소수민족이 독립을 원한다면 독립시켜야 합니다. 자기 민족끼리 오순도순 잘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 억압하고 탄압합니까.
그래서 저는 강력한 세계 정부를 세워 강력한 군대와 법으로 모든 민족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민족마다 고유한 말과 글, 생활습관과 풍속 등을 지켜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시상(詩想)에 젖어

이렇게 긴 시간이 끝나고 20명 일행은 처음 만난 두 교수님과 헤어지면서 오랜세월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같이 서운한 마음이 가슴마다 파고들었다.
우리들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염려가 되어 뼈에 사무치는 얘기에서부터 현재 부닥친 일까지 얘기하는 것이었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면 왜 이런 말들을 할까. 국제화되고 세계화시대지만 그래도 같은 핏줄은 속일 수가 없다. 서로 당기는 것을 누가 막으랴!

우리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는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남한에서 뜻이 있는 분들이 발전기금을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쪼록 중국에 사는 조선족의 발전과 연변대학의 발전을 빌어본다. 그리고 남한의 사기꾼 어르신들에게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그렇게 사기 친 돈으로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앞으로 남북한 간에 교류협력이 깊어지거나 통일시에 또 북한동포에게 그 버릇이 도질까봐 겁이 난다.
호텔방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시상(詩想)에 젖어 시 한 수를 적어 보았다.

만주벌판에서

일본압박 못 견디고 찾은 땅이
바로 여기 만주 벌판 간도더냐

거칠은 땅 벼농사로 사과배로
개척한 땅 바로 여기 연변이네

일본군대 마적단에 죽고 살며
긴긴 세월 제2고향 지켰구나

내 조국 말 내 조국 글 쓰고 쓰고
한복입고 세배하고 성묘했네

우리 전통 대를 이어 지켜가니
우리 핏줄 길이길이 이어가리

간도는 우리 땅

그리고 이렇게 우리 선조들이 정든 조국을 떠나 거치른 만주 벌판까지 밀려와서 피와 땀으로 개척한 땅이 중국의 영토가 되어야 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조선과 청국사이에 국경분쟁이 자주 발생하므로 이것을 해결하려고 조선 숙종 때부터 양국대표들이 현지 답사하여 백두산 천지에서 북쪽으로 흘러간 송화강이 경계라고 세워놓은 백두산 정계비(定界碑)가 없어졌다고 하니 누구의 짓이었을까.

그렇지만 다행히도 전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 전신)초대총장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1872년-1946년 생존)가 1907년 통감부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으로 부임한 후 30여 년 동안 연구한 저서가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시노다 지사쿠는 그가 남겨놓은 저서인 『간도는 조선땅이다:백두산 정계비와 국경』(시노다 지사쿠 지음, 신영길 번역, 2005년1월15일, 知詵堂 발행.) 322쪽 ~326쪽에 간도를 1909년 9월 4일 「간도에 관한 협약」으로 일본이 청국에 넘겨주었다며, 326쪽~329쪽에는 “간도는 조선영토이어야 공평하다” 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난 후에도 ‘한 많은 간도 땅’을 역사 속에 묻어 두어야만 하는가.

더구나 중국이 동북공정계획으로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 속에 편입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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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윤지

    오와 이거 빼껴 야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