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한국진보연대가 대북삐라를 살포하는 ‘자유북한운동연합’ 등의 보수단체(?)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있었다는 소식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여러사람들의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한가지 의견을 보태자면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한국진보연대가 너무 민감하게 대응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건속에서 드러난 보수운동권단체와 진보운동권단체간의 대립과 갈등을 일반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념성과 정파성이 강한 운동권끼리의 먹고 살기 위한 밥그릇싸움(?)또는 선명성경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황이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하다고 생각된다. 일반국민들이 보기에 문제는 북한관계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의식과 정서와 무관하게, 보수적 또는 진보적으로 이념적 정파성이 강한 운동권만의 편향성이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권끼리의 진보/보수의 대결구도는 일반국민들의 정서와 무관한 자기들만의 독백적인 행동이라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다. 따라서 진보/보수라는 운동권끼리의 대립구도는 일반 국민들에게 배척당하기 십상이고, 이것은 더더욱 운동차원이 아닌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하는 정당정치차원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진보운동권이든 보수운동권이든 ‘운동권’이긴 마찬가지고 이들간의 대립구도는 국민들과 소통을 통해 집권하고자는 정당정치가들에게 별로 이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이념적으로 정파적으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똘똘뭉쳐 자기들끼리 진보라고, 자기들끼리 보수라고 주장하면서, 한마디로 자기독백적인 행동으로 국민들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일체의 시도는 바람직하지도 못하고 비전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떡하면 좋을까? 특별한 해답은 없다. 다만 한 집단안에 여러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어느 권위있는 하나의 목소리로 제압당하지 않고 살아나면서 활력과 창조가 생기도록 하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이 특별한 배려에 대해서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강요했던 스탈린 독재체제에 저항했던 대문호이자 문학이론가인 도스도예프스키와 바흐친이 창시하고 발견한 ‘다성악’(polipony)적인 소설기법을 정치의 일반원리로 응용해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다성악은 하나의 목소리만을 반영하는 單聲樂(모노로그)적인 소설창작기법과 다르게, 즉, 작자가 창조한 주인공과 인물들을 작가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주인공의 목소리와 개성이 작가의 권위에 통제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작가가 창조한 다양한 인물들에게 자유의지와 개성을 부여하게 되면서, 소설의 활동무대가 인물과 인물들간에, 인물과 작가간에 그리고 작가와 독자간의 다성악적인 대화와 소통의 공간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다성악적인 원리를 허구가 아닌 현실 정치와 정당공간에 응용해보면, 단성악은 이념성과 정파성이 강한 소수의 정파활동가나 그 그룹이 지배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반대로, 다성악은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개성이 표현되고 서로 어울리는 카니발같은 활력있는 공간을 말할 것이다. 진정으로 다성악적인 공간이 될 때, 이념성과 정파성이 강한 운동권집단이라는 부정적인 레떼르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