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사법화', '정치의 철학화’, ‘정치의 ‘공학화’ 그리고 좋은 정치평론가
채 진원 경희대 시간강사
1. 잠시 동안의 성찰, 계속되는 남 탓하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정치의 비정함뿐만 아니라 정치의 성찰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즉, 잠시 동안이지만 노 전대통령의 서거 전에 그렇게도 그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거리를 두려고 했던 정당 및 정파와 사람들이 그가 죽자 언제 그랬느냐 할 정도로 정쟁을 멈추고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였다.
수 백 만 명의 추모행렬은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을 죽인 무지몽매한 시민들의 자기반성처럼 다가왔다. 한마디로 그에 대한 애도는 정치의 비정함과 잘못된 관행에 대한 성찰이자 자성으로, 일종의 카니발적인 성격이 가미된 부활절 행사였다. 추도식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죄를 씻고자 했으며, 그의 죽음을 통해 새 생명과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고자 하였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애도와 자기성찰은 지나갔고, 또다시 사람들과 정파들은 그의 죽음을 잊고 싸움을 시작했다. 자기 탓보다는 남의 탓하기를 더 선호하는 듯 했다. 이 남 탓하기의 모습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우중과 우중정치가 자신의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판단한 플라톤에게 말과 설득의 정치보다는, 말과 설득에 대한 경멸과 불신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이데아’와 ‘절대 진리로 무장한 철인정치’를 더욱 고집하도록 하면서 ‘정치를 철학의 수단으로 종속시키는’ 즉, ‘정치의 철학화’를 추구하려는 했던 모습과도 유사하다.
남 탓 하기는 지난 시기 그토록 노무현을 비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없이 MB를 비난하는 지식인의 일부 시국선언에서도, 야당들의 MB정권 비난에서도, ‘변화 없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 유지에서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행렬은 한나라당의 6월 국회 단독 개회와 미디어법 강행처리 의도로 더욱 고착화되는 것 같다. 마침내 여야는 사즉생의 임전무퇴정신으로 만날 조짐이다.
2. 남 탓하기의 사례들: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개념 중에 ‘귀인착인식(attribution theory)의 오류’라는 게 있다. 한마디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처럼 보이는 인식구조다. 쉽게 말해서 어떤 상황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원인 찾기’를 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의 실패’에 대해서는 ‘자기 탓’보다는 ‘상황 탓’을 더 크게 과장함에도 ‘타인의 실패’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과장하는 현상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는 ‘상황 탓’보다는 ‘자기 자신의 능력 탓’으로 크게 과장해서 보면서도 타인의 성공에 대해서는 ‘타인의 능력 탓’보다는 ‘상황의 탓’을 크게 과장함으로써, 타인의 능력을 축소하려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보면,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의 좋은 쪽을 과장해서 절대화-신격화하기를 좋아한다. 차베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역시 차베스를 절대화-신격화한다. 맑스주의도, 사회주의도, 트로츠키주의도, 주체사상도 절대화-신격화될 수 있다. 일본의 천황주의도, 중국의 중화주의도 절대화될 수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오류의 실례는 부시정권 때 한반도의 운명을 쥔 ‘북핵 위기’의 원인과 책임 논쟁에서 보다 잘 드러났다. 핵실험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미국 탓을, 미국의 네오콘들은 북한 탓을 한다. 북한은 미국의 선제공격과 레짐체인지에 대한 자기방어라고 한다. 미국은 북의 핵무기제조는 ‘악의 축’임이 드러난 실례로, 신의 이름으로 이를 응징하고 민주주의라는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심리학에는 ‘인식의 일관성(cognitive consistency theory)의 오류’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독트린에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인식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시하고 회피하고 사실을 허위-축소-왜곡하려는 현상이다.
한마디로, 현실 정보의 합리적 해석보다는 자신의 도그마적인 믿음과 이념적 신념체계에 의존하여 판단할 때 발생하는 오류를 말한다. 이런 오류의 대표적인 예는 세계를 적과 친구, 선과 악으로 이분화 하는 네오콘들과 그 유사집단들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이념적 독트린을 절대화하기 위해, 없는 ‘적’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적’을 만들기 위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허위정보를 조작, 왜곡, 과장하였다.
3. ‘정치의 사법화’, ‘정치의 철학화’, ‘정치의 ‘공학화’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로 드러난 갈등과 증오의 한국정치는 ‘정치의 사법화’, ‘정치의 철학화’, ‘정치의 공학화’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대의적 공론장을 활성화할 주체인 정당의 의원들이, 특정 보스나 지도자 개인의 정치성향과 정치활동에 속박되어 자율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적 갈등을 정당들 간의 충분한 토론과 합의에 따라 새로운 정책과 판단기준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기존의 관행을 중시하는 검찰과 사법부에 넘김으로써 여야관계를 ‘적대관계’로 변질시키는 것을 말한다. ‘정치의 사법화’의 배경에는 ‘정치의 철학화’가 관련되어 있다.
‘정치의 철학화’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의견이 서로 소통되고 토론되면서 설득되는 ‘정치의 영역’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진리를 따지는 ‘철학영역’ 또는 ‘윤리영역’으로 변질되면서, 다양한 의견간의 차이가 존중받지 못하고 적대적 관계로 변질되는 현상을 말한다. 정치가 철학화 되면 대화와 소통은 중단되고 모든 문제는 사법적 판단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정치가 사법화 되고 정치가 철학화 되는 배경에는 ‘정치의 공학화’(정치의 엔지니어링화)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정치의 공학화’는 ‘정치의 제작화’와 비슷한 말로, 플라톤이 추구했던 ‘이데아론에 기초한 철인정치’를 말한다. 즉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말과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의견의 영역(doxa)인 정치'가 ‘절대 진리적인 이데아 모델’에 맞춰 현실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와 인간사가 마치 장인이 자신이 만들려는 물건의 형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제작’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로 둔갑되고 왜곡되는 것이다.
정치가 이 ‘절대 진리적인 이데아 모델’에 갇히거나 또는 정치가 자기만이 옳고 타인은 틀리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진리논쟁을 추구하게 되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과 공론들은 하나의 이데아라는 진리 앞에 다 실종되고 만다. 즉, 진리가 아닌 나머지 다른 의견들은 모두 이 진리와 적대적 관계 내지는 배타적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다.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정치의 결론은 정치와 인간사가 이데아에 의해 제작되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진리를 아는 철인왕의 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말과 의견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결국 남는 것은 갈등과 증오에 가득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뿐이다.
4. 정치세계와 정치평론가의 역할
흔히 정치세계는 순수하게 세 종류의 정치적 인간(political man)들에 의해서 구성되는데, 정치행동가(political actor), 정치사상가(political thinker), 정치평론가(political critic)들이 그들이다. 정치행동가는 정치세계의 현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며 적극적으로 현실을 움직여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정치사상가와 정치평론가는 주로 전자의 ‘행동’보다는 ‘말’로써 정치세계와 관계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이지만(물론 정치행동가도 말을 사용하지만, 대체로 그 말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의 의미이다), 사용하는 ‘말’의 종류에서 차이가 있다.
정치사상가는 보편적인 개념과 이념, 타당한 사상을 추적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논리추구적이며 진리추구적인 철학적인 언어이다. 이에 비해 정치평론가의 말은 논리추구적이며 진리추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화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알리고, 그들과 소통하며, 사회적 공분과 공론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개인적이며 주관적인(subjective opinion)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주관적 의견을 기초로 하는 정치평론이 화자의 주관적 의견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지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공동세계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정치평론은 정치행동과 정치사상의 ‘중간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치평론에서의 말은 그것이 단지 의사소통이나 정보교환을 위한 수단적 언어, 절대적인 철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말을 통해 시민들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그 개성들이 인간의 조건인 다원성(plurality)을 이루며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결국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평론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말이 주관적인 성격이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개인의 자의적인 말이거나 혹은 반대로 절대적인 진리추구적인 말이 되어서는 열려진 공동세계를 구성하는데 곤란하다는 점이다. 정치평론이 실패하는 경우는 정치평론에서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정치사상가나 철학자의 말로 둔갑하거나 정치행동가나 정치가의 도구적인 말로 왜곡될 때이다.
즉 다수의 대중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기 위하여, 의견을 드러내고 설득하고 소통하기보다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내세워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등 설득이 필요없는 ‘진리의 독재정’(the tyranny of truth)을 제시한다면, 폭력이라는 외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설득이나 주장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공론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나, 의견의 다원성과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지는 정치평론의 정치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평론가에게 주어진 임무는 막중하다. 진정한 정치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폭력과 진리의 독재정을 넘어서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설득하면서 의사소통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제공하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의사소통적 권력’(communicative power)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사소통적 권력(power)이란 폭력(violence)과 구별된다. 폭력은 자신의 추구하는 이념과 이익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물리적 힘과 진리의 독재정을 내세워 자원들을 동원하고 조작하고 강제하는 수단적 힘인데 반해, 권력이란 피지배자들이 의사소통을 통해 동의하는 힘으로 사람들이 함께 행동할 때 발생하며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힘을 의미한다.
5. 보론: 소통과 토론에 대해
서울대 정치학과 김홍우 교수는 소통과 토론의 중요한 목적은 ‘타인설득’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판단을 위해 필요한 내적 성찰이며 공동성찰이라고 하였다.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성찰과 자기정정을 해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자기주장이 세면 셀수록 타인의 의견이 들리지 않아, 타인들의 의견이 드러나면서 구성되는 ‘열린 공동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주장을 멈추고 타인의 의견을 듣기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열린 세계를 응시할 필요가 있다. 열린 세계가 보일 때,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판단과 공동행동을 할 수 있고 그럴 때 세계는 변혁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