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평론] 김규항과 진중권의 논쟁에서 또다른 가능성 찾기

정강길(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실장)

순혈주의적 좌파와 자유주의적 좌파가 합의할 제3의 지점은 없나
- 김규항과 진중권의 논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좌파 그룹에 속하는 진보 사회운동 진영에서 한창 김규항과 진중권의 논쟁이 뜨겁게 올라와 있다. 요지는 김규항이 진중권(혹은 그와 비슷한 부류들도 포함될 듯)에 대해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날린 것이다. 그는 레디앙 인터뷰에서도 말한 것처럼 현재의 진보신당 상황이 심각해서 쓴 거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진중권의 반론은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을 언급하며 김규항의 비판이야말로 오히려 정체성의 폭력이라고 얘기한다. 즉, 진중권이 보기에 김규항은 왜 자꾸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제 정체성“만 고집하냐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우선 이 둘의 주장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나는 오히려 아직까진 김규항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잠시 뒤에 언급할 것이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진행된 둘의 논쟁에 대해서만큼은 그러하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현재 진보신당(맥락에 따라선 민노당까지 포함된 '진보정당'으로 읽어도 무방함)의 노선과 이념이 처해 있는 대중적 현실과 맞물려 있는 지점에선 고집스런 좌파 순혈주의자로 불리는 김규항의 주장 역시 그다지 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런 점에서 김규항의 글은 그저 진중권에 대한 비판의 소임만 다하고 있는 터라 뾰족한 현실적 대안까지 제시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유효한 비판으로선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현실적 고민 자체를 놓고 봤을 땐 나 자신이 본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입장이 오히려 김규항이 보기엔 또다시 진중권의 입장으로 비춰질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번 두 사람의 논쟁을 통해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나는 좀더 유연하고 탄력 있는 융통성으로서의 좌파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는 어설픈 양비론을 전개하고자 함도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적어도 두 사람 간의 논쟁에서 만큼은 김규항의 입장이 좀 더 옳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김규항의 입장에 대해서도 좀 더 비판적으로 첨언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고 보는 것뿐이다.

본론 전에 한 가지만 더 덧붙인다면, 나는 이번에 촉발된 두 사람의 논쟁을 두 사람만의 논쟁으로 읽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진보정당의 길찾기, 나아가 좌파 사회운동 노선의 길찾기에 대한 논쟁으로서 읽고 있다는 점도 유념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제 정체성”이냐? “제 취향”이냐?

진중권이 보기에 진보신당에 가입한 사람들 중에 촛불정국으로 인해 들어온 사람들(일명 촛불당원)은 노선이나 이념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마 그럴 수도 있으리라 본다. 진중권은 말하길, 이들은 “진보정당이 제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입당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진중권의 표현은 “제 취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앞서 김규항이 언급했던 “제 정체성”과는 그 뜻은 달라도 이에 상응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진보신당 같은 정당 가입과 활동이 취향의 문제로만 여겨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솔직히 다소 의문스럽게 느껴진다. 오히려 실제적으로 이념에서 자유할 수 사람은 아무도 없잖은가. 그런데도 자기가 가입하고자 하는 정당의 노선이나 이념에 대한 관심도 없이 진보신당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이는 아직까지 개념 없이 정당에 가입했다는 얘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때 이 지점에서 나의 이런 얘기에 일말의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나는 촛불당원이든 심지어 MB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노선이나 이념에 대한 관심이 없어도 일단 진보신당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는 별문제가 되질 않는다고 본다. 문제는 가입 이후에도 여전히 그러한 행태를 보이고 있을 때다. 왜냐하면 가입 이후는 더더욱 대사회적 행보로서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에 자칫 이러한 자들이 득세할 경우 진보신당의 애초 당결성 취지와 노선 및 그 이념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당연히 김규항 같은 논객들의 날선 비판들이 적절히 필요하다고 본다.

다양성(혹은 차이 및 다름에 대한 문제)도 양립가능한 다양성이 있고, 양립불가능한 충돌나는 다양성이 있다. 만일 양립이 불가능한 충돌나는 차이/다양성/다름에 대해서만큼은 진보신당의 애초 노선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진보신당이 민주화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도 분명한 반대를 취하는 노선이라고 할 경우, 진보신당 안에 알게모르게 잠식해 있는 신자유주의 요인들과는 불가피한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는 애초 결성된 정당 존립의 이유마저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일 진중권의 말대로, 제 정체성이 폭력이고 동일성이 된다고만 본다면 그런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개념을 상실한 진중권의 뇌가 저지르고 있는 폭력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무(無)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설마 다(多)정체성이 진보신당의 노선과 이념적 색깔인가? 어떤 면에서 정체성 자체는 부득이한 것이기도 하다. 왜 제 정체성이 폭력이 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엔 정체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열린 정체성이 아닌 <닫힌 정체성>이 될 때 문제가 된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진보신당도 얼마든지 자유주의자들과 대화할 수 있고 소통의 길을 항상 터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진중권의 행보가 결국은 진보신당이 지향하는 노선과 이념 자체에 대한 한계와 오류와 맞물려 있는 것이라면 이는 얘기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왜냐하면 애초에 시작했던 진보신당 자체를 아예 뒤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규항 같은 사람들도 있는 한, 애초 시점의 취지들을 무시하기보단 그것은 차라리 나가서 새로운 모임을 꾸려야 하는 문제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번 논쟁의 출발이 김규항이 진중권을 공격한 데서 촉발한 것으로 생각할테지만, 실은 김규항의 입장에서 볼 땐 최근 진중권의 행보가 오히려 진보신당의 노선과 이념에 대한 위협적 공격으로서 받아들여졌기에 역으로 방어적 공격을 취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하다고 본다. 즉, 김규항이 보기에 실제적 선빵은 진중권이 먼저 가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노선과 이념의 문제는 결코 취향의 문제로만 귀결되지 않는다(흥미롭게도 김규항은 예전에 심형래의 <디워>영화에 대해 이를 취향의 문제로 언급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같은 김규항의 논지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예술 역시 정치적 이념적 맥락 속에 놓여지기에. 특히 대중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그래도 예술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좀 더 느슨하게 자유로울 순 있겠으나 이미 사회적으로 담론화되고 있는 사태라면 이는 얘기가 달라진다. 솔직히 당시의 <디워> 논쟁에서는 오히려 진중권의 입장이 훨씬 더 옳았었다고 본다). 취향이 출발일 순 있어도 그것으로만 귀결된다고 보는건 오히려 취향으로서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취향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일 뿐이다.

이는 에바 일루즈가 <감정 자본주의>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감정을 포섭하면서 결국은 여전히 소통되지 않는 채로 되려 타인의 공감과 이해를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소통되지 않는 감정의 모순점을 정확히 지적해냈던 맥락과도 흡사한 것이다. 바꿔 말해, 우리 가운데는 소통되기 힘든 취향이 저지르고 있는 모순도 엄연히 현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스트모던의 세례에 젖어 있는 진중권 주장의 한계

어쩌면 정당 가입을 취향의 차원으로 보고 있는 진중권의 시각은 매우 뜻밖일만큼 뜨아스럽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는 최근 진중권이 보여주고 있는 행보들의 정직한 결과적 시각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다. 사실 근래 진중권의 언급들을 살펴보면, 예전에 촛불정국 때 받았던 감동, 즉 일종의 사회운동마저 즐거운 놀이와 냉소적 유희로서 승화시킨 촛불세대에 대해 받았던 감동의 면면들이 매우 깊게 배여 있는 걸로 보인다.

예컨대, 허경영의 비리와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고발했던 SBS방송에 대해 진중권은 되려 SBS보도를 비난하기도 했었다. 진중권은 젊은 세대의 허경영 놀이와 유희를 왜 방송의 잣대로 비판하냐는 식이었는데, 그 맥락도 결국은 촛불세대에서 받은 감동이 계속 연장되어 나온 걸로 보인다. 사실 촛불세대(필자는 촛불정국 이전부터 이를 '광화문 세대'라고 부른 바 있음)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이 문제는 마르크스주의를 논하는 좌파 운동 진영에 있어선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율주의적 마르크주의자들(다소 용어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어쨌든)과의 논쟁과도 맞닿아 있는 점들이 있다. 후자는 전자를 근대적인 것으로서 여기며 비판한다. 그런데 그러한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진영에는 후기구조주의에 속하는 들뢰지안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된다.

어쨌든 이와 흡사하게도 진중권은 김규항의 딴지를 그저 근대적인 것으로서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진중권 역시 포스트모던의 폐해에선 자유롭지 못한 걸로 보인다. 이는 앞서 말한 그의 유희적인 허경영론에서도 살짝 드러난 바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장(場)은 그저 취향과 유희의 문제로서만 귀결되지 않는 분명한 책임성의 문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에 대한 통속적 비판이 아니라 실제적인 포스트모던의 노선들이 지니고 있는 폐해들에도 해당되기에 우리는 이를 분명하게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강조하는만큼이나 양립불가능한 다양성들 간의 충돌과 모순 역시 간과되어선 안될 것으로 본다. 분명히 말하지만, 진중권에 대한 김규항의 딴지는 내가 볼 때 근대적인 것으로 폄하될만한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 논쟁에서의 진중권은 핀트가 어긋난 대응만 했을 따름이다. 만일 내가 진중권이었다면 김규항에 대해 그런 식의 논지로서 맞서진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차라리 김규항에게 “So what?”이라고 그냥 반문해보든지. 하지만 진중권은 그저 김규항을 '좌파 바바리맨'으로 규정해버릴 뿐이었다.

좌파 진보정당의 대중성 확보의 길은..

그렇다면 도대체 좌파 진보신당의 현실적 고민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김규항은 대중성 추구와 대중성 강박은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글에서도, 이에 대한 좌파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것인진 몰라도 별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대안이란 게 결국은 민노당 시절에서도 보여줬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동시 비판을 들고 있다. 물론 나 역시 그런 행보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이를 반대하는 입장은 결코 못된다. 오히려 그의 언술대로 현재는 그런 점이 더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그가 보기에 대중성을 잃은 이유가 그같은 최소한의 좌파 정체성을 포기했기 때문인 걸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규항의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오히려 심상정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한다. 지난 선거 당시 심상정의 사퇴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진보정당의 대중성 고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나는 심상정의 선택이 진보신당의 이념과 노선에 해악이 될만큼 비난받아야 할 성질의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도 김규항은 말하길 대중성 고민을 그저 '대중성 강박'으로 처리한 채, 심상정에 대해선 차라리 민주당에서 활동하는 게 더 낫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전반적으로는 김규항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이런 점들은 다소 과잉한 것이라 생각된다. 순혈주의적 좌파인 김규항이 보기에 그런 심상정마저 대중성을 상실하게 만들만큼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는 변질로 여기는 것인가. 하지만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대중적 자리 확보를 논하기 이전에 이 나라 국민은 신자유주의가 도대체 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부터 언급될 필요가 있겠다. 진보정당의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이유에는 결국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지와도 맞물려 있다고 본다.

나는 이번에 드러난 김규항과 진중권의 차이를 진보신당이 나아갈 길에 있어 좌파들 간의 고집성과 유연성의 차이로 보고 싶은데, 물론 이에 대해선 두 사람 모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걸로 본다. 생각컨대, 그 유연성이 김규항이 말한 것처럼 좌파의 정체성까지 훼손하는 것이라면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며,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는 얼마든지 대중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보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김규항 역시 동의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크게 볼 때 이런 사항들은 진중권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즉, 크게 보면 두 사람 모두 그리고 있는 좌파 사회운동의 그림 자체는 오히려 차이점보다는 흡사한 점들이 훨씬 더 많다고 여겨진다. 단지 이번엔 진보신당이 나아갈 길이나 현재의 촛불당원들을 보는 시각이 서로 좀 남달랐기에 논쟁이 촉발된 걸로 보인다. 물론 이 둘은 좌파를 이해하는 시각도 다르긴 하다.

싯달타는 오래전에 좋은 비유를 하나 말한 적이 있다. 3층집을 짓기 위해선 3층부터 지을 순 없으며, 부득이 1층부터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좌파 진보신당이 다른 그 어떤 정당의 노선보다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나 목표가 매우 타당성이 높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추구할 것이며, 어떻게 대중성을 확보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DJ-노무현 시절의 진보정당의 성장과 MB 정부 하에서의 진보정당 운신의 문제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나는 바로 그런 점에서 좌파 진보신당이 남한 사회에서 자리하는 한, 민주당의 노선과의 타협 및 민주대연합 혹은 통추 또는 진보대연합 같은 길도 1, 2층을 짓기 위해선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시작부터 3층을 지을 순 없다는 얘기다(물론 동시적인 접근의 차원도 있겠으나 적어도 그 환경적 여건을 조성함에 있어선 어느 정도 순차적이라고 생각됨). 민주화로서의 여건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물론 순차적 접근이 신자유주의 세력들까지 저도모르게 다시 불러들일 우려 역시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분명한 행태(노무현 정부 당시의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같은)로 드러나지 않는 한, 제한을 두는 가운데 타협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타협 자체가 변질은 아님에도, 내가 보기엔 김규항 같은 좌파 순혈주의자들이 볼 땐 <타협>과 <변질>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는 점이 있다. 이는 그저 전략과 전술의 문제일 뿐임에도 말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심상정의 눈물어린 고민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까지 비판받을 만한 거라고 보질 않는다. 진보정당도 민주대연합이든 반MB노선이든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다고 본다. 단지 그러한 가운데 민주당 노선에 대한 한계와 비판도 함께 잃지 않고 계속적으로 개진하면 될 뿐이다. 즉, 진보신당의 입장에선 당의 이념 노선을 개입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소통 창구 마련이라는 <활용의 측면>에서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과 연대를 굳이 거부할 필요까진 없다고 본다.

싸우더라도 일단은 함께 하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그런 현실적 지점에 있어선 적절하게 후보를 사퇴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적어도 진보신당의 가치를 잃지 않고 더 얻어낼 수만 있다면 그런 점들은 얼마든지 탄력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문제일 뿐이라고 본다. 요점은 진보정당의 선거 후보가 사퇴를 하여 후보 대연합을 하든 완주를 하든 그런 점들은 앞으로도 여전히 그때그때마다 탄력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또한 그런 점에서 그 자체가 대중성 상실의 원인으로 볼 만큼 비난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진보정당이 놓여 있는 현실 자리가 이미 유럽 사회가 아닌 남한 사회라는 점을 결코 망각해선 안되잖은가.

남한 사회에서의 진보정당의 길, <좌파 순혈주의>와 <좌파 자유주의>가 함께 가야할 길

아직 민주화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의 문제는 당연히 자유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반MB 연대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지향하는 노선과 이념에 있어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라고 보진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기본 전제로서 깔려야 할 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진영 뿐만 아니라 수구우익도 자유민주주의를 외쳐대잖은가. 단지 자유주의는 출발로서 필요한 것뿐이지 좌파 사회운동이 추구하는 최종적 이념 노선은 결코 못된다. 내가 볼 땐 오히려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 치고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보수화될 수 위험 역시 있다고 여겨진다. 즉, 자유주의라는 가치로서 또다시 자신의 길을 합리화해버릴 수도 있기에. 누가 그랬던가. 오히려 “진정한 자유는 외길”이라고.

진보정당의 길은 자유민주주의(이미 수구꼴통 보수주의자들도 채택하고 있는 이 무기력한 개념)가 상식적 출발로서 또는 그저 유연한 채택으로서 함께 할 따름이다. 그 점에선 진보신당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김규항 같은 좌파 순혈주의자들도 다소 융통성을 지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차피 방식 혹은 길은 다양한 것이다. 행여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를 결과-과정론으로 이해하는 건 나의 주장의 논점을 잘못 짚은 것임을 말하고 싶다. 나의 논지는 결과를 추구하기 위해서 과정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미 우리가 놓여 있는 삶의 자리인 남한 사회라는 현실 자체를 함께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데 김규항의 좌파 이해에는 "좌파는 원래 비현실적인 사람들"로 여기는 측면이 있는데, 아마도 이런 점들 역시 그의 고집스러운 면을 잘 드러내보여주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진보신당의 길 혹은 좌파 사회운동의 노선은 최종적인 3층 집을 짓기 위해선 현재 서 있는 자리인 척박한 현실의 터를 결코 무시할 순 없고, 여기에다 1, 2층을 짓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터에 있는 재료들을 부지런히 활용하며 고를 필요가 있겠다. 3층집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진보신당 역시 10년 혹은 20년의 로드맵을 새롭게 그려야 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정체성 또는 진리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오류>와 <비극>의 문제라고 본다. 그러한 범주 하에서 정당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할뿐더러 보다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는 취향의 문제로 결코 귀결될 수만은 없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그 로드맵에 다양성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굳이 바디우까지 떠올릴 필욘 없겠지만, 진리는 있되 얼마든지 다수일 수 있기에!


[글쓴이 소개] 정강길 세기연 연구실장



정강길님은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세기연) 실장으로, 그리고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 (새기운) 공동운영자로 일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
역서로는 화이트헤드의「형성과정에 있는 종교」(동과서, 2003)가 있으며, 저서로는「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과 새로운 대안기독교 연구서「미래에서 온 기독교」(에클레시안, 2007)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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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헤미안

    그 1,2층 집을 지은게 나중에 보니 3층집을 못 짓게 하는 방식이라면 그 1,2층집은 잘못된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