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평론] 성소수자 · 여성운동과 호가호위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다. 다급해진 여우가 호랑이에게 일장연설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난다.

“나는 천제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자(使者)거든.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나를 백수의 왕으로 정하신 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고 따라서 천벌을 받게 되는 거지. 만약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를 따라와 봐봐.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하나도 없을 테니 말이야”

호랑이가 오케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만나는 짐승들마다 모두 줄행랑을 쳤다. 잘 알려진 전한시대 전국책(초책편)에 나오는 호가호위(狐假虎威)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다른 짐승들을 놀라게 하는 (혹은 가지고 노는) 여우들이 도처에 있어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패션 쪽 글을 쓴다는 황의건(43)이라는 사람이 요즘 각종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김여진(배우)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밥집 아줌마처럼 생긴 여진족 여자”라는 등 엉뚱한 언사로 모욕해 네티즌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일반적인 우파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황씨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라는 점이다. 이른바 성소수자라는 이미지 자체가 지닌 진보적 함의와 그의 수구적인 무식한 발언이 정면충돌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진보적인 성소수자들이 나섰다. 이송희일(영화감독)은 황씨를 “정체성을 팔아 상징 자본을 가진 후 자기 준거집단에 대척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김조광수(영화감독)는 “게이라고 해서,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다 제정신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욜(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은 사람들이 황씨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적 약자라는 감투를 쓰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부문운동 중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의 기반에서 대중매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같은 부문운동이라 해도 빈민운동이나 장애인운동은 대중들의 심정적인 기피 경향과 언론의 이해가 맞물려 일반 매체에 잘 노출되지 않아 여전히 소외된다.

그러나 87년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여성운동의 주장들은 언론을 통해 많은 부분이 법제화까지 자리 잡았다. 또 성소수자인 특정 연예인들의 영향과 함께 서서히 부상(浮上)하고 있는 성소수자운동에 대한 언론의 거부반응도 많이 불식되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언론권력과 이 두 운동은 그리 적대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용어는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받아들여져야 하는 ‘사회적 약자’의 개념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현 시기 운동진영에서는 이 부분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로 금기의 분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황의건의 못된 발언은 부문의 맹점에 대해 물꼬를 트게 하는 순기능도 없지 않다.

황씨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그가 한 말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송희일의 말처럼 “정체성을 팔아 상징 자본”을 취득하는데 성공했기에 그의 발언은 일파만파로 세간의 논란이 됐다.

이러한 논리는 ‘여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 중에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팔아 오늘 권력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난다. 황씨의 싸가지 없는 발언이 개인적인 것이었고 일과성이었다면,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성 분리주의 의도는 조직과 법(특히 성매매 특별법)을 등에 업고 상시적으로 관철되기에 더욱 위험하다.

혹자는 성소수자나 여성은 아예 비계급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정반대로 그 자체가 계급이라고 억지를 부리곤 하지만 이런 게 바로 오늘 진보진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형적인 사기다. 20:80의 양극화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여성 또한 기득권층과 노동자민중들처럼 각기 그 속에 들어가 양쪽으로 나뉜다.

예컨대 황의건과 정욜은 같은 성소수자임에도 적대하고, 박근혜와 김진숙(민주노총 지도위원, 한진중공업 고공크레인 농성중)은 같은 여성임에도 적대한다. 예외가 있다 해도 예외는 예외일 뿐 이러한 보편적인 논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황씨나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성소수자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자본화·사유화하여 무슨 요술방망이나 전가의 보도처럼 진보 경향의 착한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는 꼴을 보노라면, 공통적으로 마치 호가호위에 등장하는 여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문제는 어리버리하게 따라가는 호랑이다. 노동자민중들과 그곳에 속한 성소수자와 여성이 현명한 호랑이가 돼야 교활한 여우들의 사기극을 막을 수 있는데 이게 참 지난하다. 어쨌든 이들의 장난(교란)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성소수자와 여성도 분명하게 ‘계급’으로 구분해 노동자민중들과 한 배를 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듯하다. 부문에서 다시 계급으로. 그렇지 않으면 여우들이 주인장 노릇하는 호가호위는 계속된다.


최 덕 효 (한국인권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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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성소수자 , 김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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