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협정은 이스라엘의 패배, 하마스의 승리다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역을 지옥의 도가니로 만들어온 이스라엘의 잔혹한 살육 행각이 당분간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진행해 온 협상이 난관 끝에 타결되어 휴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양측은 이제 인질과 포로의 석방군대의 철수구호품의 보급 등과 관련한 합의 사항을 단계적으로 이행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번 휴전은 하마스가 2023년 10월 7일에 알 악사 홍수 작전을 감행한 것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가자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며 엄청난 수의 팔레스타인인을 살상하기 시작한 지 15개월 만의 일이다하마스가 알 악사 작전을 펼친 것은 이스라엘이 가자를 세계 최대의 야외 감옥으로 만들어 불법 점령하는 것에 저항한 것으로,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행위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과정에서 하마스가 자국의 군인과 민간인을 살상하고 인질로 잡은 것을 빌미로 가자를 폭격해 46,600명 이상의 사망자와 110,453명 이상의 부상자를 낳았다사상자 가운데는 여성과 어린이가 60%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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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전 협상이 합의된 데에는 미국 새 행정부의 중재가 주효했다고 한다이달 20일에 자신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중동 특사인 스티브 위트코프의 역할이 특히 중요했던 모양이다위트코프는 트럼프와 가까운 유대인 부동산 사업가로 비외교관으로서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총리 비비 네타냐후를 몰아붙여 트럼프의 요구를 관철한 것으로 전해진다트럼프 팀이 이번 협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그동안 가자 학살의 중단을 위해 힘을 쏟기는커녕 이스라엘의 만행을 오히려 부추겨온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행보와는 대비되는 셈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할 때 크게 두 견해가 대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스라엘이 막강한 로비력을 휘두르며 초강대국인 미국을 갖고 논다는 관점이 하나라면세계 패권국가인 미국이 이스라엘을 서아시아라는 대해에 파견해 띄워둔 항공모함으로필요하면 앞세우는 전투견으로 써먹는 것이라는 관점이 다른 하나다앞의 견해를 펼치는 대표적 인물로는 시카고 대학의 존 미어샤이머 교수 등이뒤의 견해를 펼치는 인물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과거 아들 부시 행정부 국무장관을 지낸 조지 파월이 참모총장 하던 시절 보좌관을 지낸 래리 윌커슨 등이 꼽힌다이번에 트럼프 팀이 들어와서 총리 네타냐후를 포함한 이스라엘 측의 강력한 저항을 제압하고 협정을 성사한 것을 보면 양국 관계에서 주도권은 역시 미국이 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휴전 합의를 통해 이스라엘은 대패하마스는 대단한 승리를 거둔 셈이다그런 점은 협상 타결의 소식이 전해지자 하마스와 그동안 하마스를 극력 지원해온 이란 측에서는 자축의 분위기가 컸던 데에 반해서이스라엘에서는 항의 집회가 열린 것으로도 알 수 있다물론 하마스의 승리가 자축만 할 일이라 보기는 어렵다너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건물이나 병원학교종교시설 등 초토화된 사회적 기반 시설이 너무 엄청나다하마스의 승리는 그래서 피루스의 승리라고 해야 하겠으나그래도 승리인 것은 분명하다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일방적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가공할 폭격과 공습탱크 공격 아래서도 끝까지 버텨 조직을 지켜낸 것 자체로 하마스로서는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하마스만 승리한 것이 아니다처참한 살육 현장으로 변한 가자를 떠나지 않고 거기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인들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승리자일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꼴사납게 패배한 것으로 평가된다하마스가 알-악사 홍수 작전을 감행한 바로 다음 날 이스라엘은 가자에 폭격을 가하며 세 가지의 전략적 목표를 내세웠다첫째 하마스 세력의 말살둘째 인질 구출셋째 앞으로 가자가 가할 위협의 방지가 그것이다하지만 15개월 넘게 막강한 무력을 활용해 가자 전체를 초토화하고 천인공노할 살육을 자행하고서도 이스라엘은 자신이 세운 목표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만 패배한 것이 아니다이제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만큼 외면받는 파리아 즉 불가촉 국가가 된 나라도 없다이스라엘은 남아공에 의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기소된 데 이어총리 비비 네타냐후와 전 국방장관 요아브 갈란트가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이스라엘과 단교하는 국가들도 생겨나고외국을 방문한 이스라엘인 가운데 가자에서 자행한 전범 행위로 체포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이제 평범한 이스라엘인도 외국에 나가서 환영받지 못할 공산이 커졌다그것은 자국의 방위군—사실은 공격군—이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청소를 위해 살육을 자행한 것을 이스라엘 인구 다수가 지지한 업보이기도 하다.

다음은 중동 전문 매체 <중동의 눈(Middle East Eye)> 편집장 데이비드 허스트의 말이다.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와 남미 등 그동안 큰 노력을 들여온 글로벌 남부만 잃은 것이 아니다이스라엘은 서방에서도 세대 하나의 지지를 상실했다.” 여기서 세대 하나란 지난 15개월 넘게 이스라엘이 가자의 민간인을 잔악하게 학살하는 것을 SNS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목격한 서방의 젊은 세대를 가리킨다허스트는 앞으로 그들이 서방 지도자로 성장하면 이스라엘의 설 자리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 보고 있다이스라엘은 서방에 거주하는 유대인들특히 젊은 세대로부터도 신망을 크게 잃었다고 한다허스트에 따르면, “미국의 10대 유대인 3분의 이상이 하마스에 공감하고, 42%는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인종학살을 저지른다고 믿으며, 66%가 팔레스타인인 전체에 공감하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전쟁을 종식하고 살육을 중단하라는 국제적 압력을 받아왔으나 안하무인으로 버텨왔다총리 네타냐후의 경우 부패 혐의로 휴전이 이뤄지고 나면 감옥행이 예상되는 개인 사정내각 안 극우 초강경파인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 장관베잘렐 스모트리히 재무장관 등은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요르단레바논시리아 등도 정복해 대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망상적 집착 등의 이유로 휴전 압박을 무시해 온 것이다이스라엘의 강경파들은 지난해 12월 초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미국과 터키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반군 연합 세력의 공격에 허약하게 무너지면서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고 할 수 있다이스라엘은 시리아 붕괴 직후 그동안 국제법을 무시하고 불법 점령해 온 골란고원도 넘어서 시리아 국경 안 깊숙이 군대를 침투시키기도 했다.

최근의 시리아 붕괴그 전의 하마스 지도자 야히야 신와르 사살레바논 헤즈볼라 지도자 나스랄라 제거 등을 자국의 승전보로 여기던 이스라엘로서는 이번에 트럼프가 하마스와의 휴전 협정을 강요하자 당황했을 것임이 분명하다트럼프는 11월 대선 당선 이후 펼친 중동 정책 관련 인선에서 친이스라엘 성향 인물들을 주로 선택했다는 평을 받았고전임 바이든 행정부보다 더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측된 측면이 없지 않다하지만 막상 취임을 바로 앞두고 진행된 이번 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 내각 강경파가 원하던 가자에서의 팔레스타인인의 완전 축출 대신 이스라엘군 철수라는 하마스의 요구를 이스라엘이 수용하도록 한 것을 보면 트럼프는 두 번째 임기 동안의 중동 정책에서 바이든 정권과는 다른 행보를 보일 공산도 엿보인다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미국은 발을 빼야 한다고 하고우크라이나 사태 타결을 위해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과도 곧 만나려는 태도인지라현재 진행 중인 세계 최대의 두 전쟁이 조만간 끝날 것 같기도 하다.

트럼프가 이스라엘을 압박해 휴전 협정에 응하도록 한 것을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나 동정의 표시로 보면 오해일 것이다트럼프가 자기 나름의 철저한 미국 중심주의자라는 점은 그의 첫 번째 임기 동안 NATO 국가들에 대해 미국이 유럽을 보호해 주는 데 대한 대가로 방위비를 낼 것을 요구한 데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트럼프는 바이든 정권처럼 이스라엘에 무기와 원조를 계속 대주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이번 협정을 추진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이스라엘은 그동안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아온 국가다. ⟪팔레스타인 정의를 위한 전투⟫의 저자 알리 아부니마는 최근 <브레이브 뉴 유럽>에 실린 한 글에서 미국 원조의 최대 수혜자인 이스라엘에 대해 트럼프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위해 계산해 주고 있다면주문은 미국이 하는 접근법을 택하는 셈이라고 말한다트럼프가 볼 때 이스라엘의 가자 지역 폭격을 위해 미국이 계속 무기를 대는 것은 자신의 셈법에 맞지 않은 셈일 것이다.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세계질서의 풍향계는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다그동안 국제질서를 농단해온 미국의 주도 세력은 세계주의자들(globalists)’이었다그들은 1990년 전후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이후 일극적 세계질서를 주도해왔고미국이 임의로 정하는 가치에 기반하여 세계를 이끌며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그들 가운데 외교를 주도한 것이 네오콘으로이들은 미국을 경찰국가로 만들어 세계 모든 나라가 미국이 원하는 형태의 국가가 되라고 요구해 온 셈이다미국은 그럴 때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지만그것은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로 각색된 가치일 뿐이다이런 점은 미국이 지원하는 자유 민주주의가 갈수록 파시즘을 닮아가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미국은 지금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극력 지원하고 있지만우크라이나는 과거 나치 부역자였던 스테판 반데라를 추종하는 친나치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고이스라엘은 누가 보더라도 나치와 다르지 않은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다하지만 미국의 세계주의자 네오콘 세력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자국의 이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국가들에서 정권 전복을 위한 색깔 혁명을 일으키느라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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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외교 노선은 세계주의보다는 주권주의(sovereigntism)를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트럼프가 자신의 대선 유세 구호를 마가(MAGA)’ 즉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로 잡은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트럼프는 첫 번째 재임 기간에도 미국과 나토 사이에 거리를 두려는 시도를 한 바 있다그가 최근에 그린드캐나다멕시코파나마운하 등을 미국으로 편입하고 싶다는 황당한 말을 한 것도 미국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을 확실히 하려는 의도다시 말해 중국이나 러시아인도 등이 새로운 강대국 또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다극 시대에 미국의 지분을 확실하게 챙기려는 주권주의적 계산이라는 분석도 나온다자국의 영향권을 다지려는 것은 미국이 신먼로주의를 채택하는 움직임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가 밀어붙인 이번 휴전 협정이 제대로 지켜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트럼프가 그동안 보여온 친이스라엘 노선이 과연 철회된 것인지미국 내 친이스라엘 세력의 압박을 트럼프 팀이 견뎌낼 수 있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일각에서는 트럼프가 정치쇼를 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한다하지만 휴전에 대한 확신을 품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그동안 보여온 행태일 것이다미국의 비판적 저널리스트 크리스 헤지스는 16일 독립 매체 쉬어포스트에 기고한 한 글에서 지난 수십 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맺은 합의를 제대로 이행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꼬집고 있다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지난 11월 말에 맺은 60일의 휴전 합의도 전혀 준수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자 국면을 놓고 휴전 협상이 타결된 것은 환영할 일이다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협상 타결 소식에 보인 첫 반응은 환호와 환영이었다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학살의 지옥에서 죽을힘을 다해 삶의 터전과 목숨을 지켜온 그들이 휴전을 마다할 리는 없다휴전은 트럼프의 취임식 하루 전인 19일 자로 발효될 예정이다이번 협상으로 팔레스타인에 내리기 시작한 평화의 단비가 오래 내리기를 기원한다.

덧붙이는 말

강내희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문화/과학' 발행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참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생김새⟫, ⟪길의 역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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