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의 쇠퇴는 자유무역에 대한 태도를 통해 가늠할 수도 있다. 자본은 정상적인 성장을 하려면 그 축적이 애초에 개시된 나라를 벗어나 해외에서도 시장을 찾아야만 한다. 자본 축적의 원리상 국내에서는 생산된 상품을 모두 소비할 시장을 확보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 원인은 자본의 축적이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자본가는 잉여가치가 포함된 상품을 시장에서 판매해 남는 이윤을 재생산 과정에 투하해 축적을 진행하는데, 인구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들이 삭감되기 일쑤인 임금만 받아서는 생산된 상품이 국내시장에서 모두 팔리기는 불가능하다. 자국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발달시킨 사회는 그래서 으레 자유무역을 외국에 요구하고 나선다. 19세기 말 조선이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다 양요와 식민 지배를 당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생긴 일이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면 자유무역을 제창하기 마련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나라로 19세기의 영국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진행한 결과 급성장한 산업적 생산력을 기반으로 세계 곳곳에서 시장을 개척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도 알려졌다. 영국이 자유무역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자국에서 생산한 상품을 국제시장에서 판매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영국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도 크게 표방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철폐하는 것이 인류 해방에 필수적임을 논파한 칼 맑스가 자신의 연구와 집필을 영국에서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독일과 미국 등이 새로운 산업 국가로 부상하면서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로서 영국의 위상은 급속하게 추락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이 ‘자유 진영’의 맹주로 부상해 자유무역의 수호자 노릇을 한 것도 세계 최대의 산업국으로 부상한 것의 결과다. 대전을 거친 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업 국가로 부상했다. 그것은 추축국이던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은 물론이고 함께 연합국을 이뤘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산업기반이 철저히 파괴된 것과는 달리 미국은 전쟁의 직접적 폐해를 면하고 오히려 산업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5년에 GDP가 세계의 50%, 산업생산은 66%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해져 자유무역의 최대 주창자가 되었다. 자국의 넘쳐나는 생산물을 처리하려면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당연했던 셈이다.
21세기 초에 이른 지금은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는 미국이 자유무역의 수호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지난 11월 대선에서 47대 대통령으로 당선한 도널드 트럼프가 그의 첫 번째 재임 기간(2017〜21년)에 취한 무역 정책에서도 그런 점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경제 대국으로 무섭게 부상하는 중국을 겨냥하여 관세 폭탄을 투하했고, 그에 대해 중국은 자유무역의 대의에 어긋나는 처사라며 항의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자유무역에 대한 양국의 태도 차이는 어느 쪽의 산업적 능력이 더 막강한가에서 나왔다고 봐야 한다. 제조업 생산량을 놓고 보면 미국은 2021년 기준 세계의 16%, 중국은 2022년 기준 31%로 중국이 두 배가량 더 많다.
출처: Unsplas, Micah Williams
미국이 자유무역의 수호자가 아니라는 것은 최근에 들어와서 자국 이해에 반하는 나라에 대해 예외 없이 가혹한 경제제재를 가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미국은 조선과 쿠바, 이란, 베네수엘라, 러시아, 중국, 그리고 최근에 합법 정부가 붕괴한 시리아 등 합치면 그 인구가 수십억에 달하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경제제재를 가해왔다. 최근에는 심지어 대표적 우방인 유럽연합에 대해서도 자국의 요구를 잘 듣지 않으면 경제제재를 가하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다.
미국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제력이 그만큼 약화했다는 증거다. 미국 자본주의는 1970년대 중반에 케인스주의 또는 수정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축적 전략을 전환한 뒤 세계화와 금융화와 더불어 탈산업화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내 산업기반을 대거 제삼세계 또는 남반구 국가들로 이전시킨 후유증을 이제 톡톡히 앓는 중이다. 미국의 탈산업화 흐름이 더욱 강화된 것은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1990년대 이후다. 하지만 그 결과 산업 생산력이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뒤진 데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의 위상을 누리지 못한다.
미국의 탈산업화 실상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지원하겠다며 전쟁을 부추긴 우크라이나에 이제 더 이상 충분한 무기를 지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도 드러나고 있다. 예산상으로는 여전히 세계 최대의 국방비를 소모하고 있으나 미국은 무기 생산을 포함한 군사적 생산력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더 이상 압도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 결과 미국의 군사력이 실제로는 허장성세인 점도 갈수록 뚜렷해진다. 최근에 미국은 막강하다는 항공모함이 중동의 최빈국 예멘의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견디지 못해 홍해에서 철수해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제국의 쇠퇴는 기정사실이다. 미국의 국력 쇠약은 지정학적 변동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대 이후 세계질서가 단극적 체제로 바뀌며 미국은 한동안 그 체제의 우두머리로 군림해 왔다. 그 사이에 자신이 편의로 정한 ‘규칙-기반 국제질서’를 내세우며 미국이 유엔헌장과 국제법을 무시하고 세계질서를 유린한 행태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미국의 위세가 쪼그라드는 모양새가 분명하다. 경제력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아직도 세계 최대의 군사비를 쓰고 있지만, 더 이상 이전의 군사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자유 진영 수장’으로서의 지도력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정치적 지도력 퇴조는 세계 인구의 15%에 불과한 ‘집단서방’을 빼고 나면 남반구 또는 나머지 세계 나라들이 갈수록 미국을 경원시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제국의 쇠퇴는 근대 세계체계에 중대한 한 변곡점이 생겼다는 징후에 속한다. 세계체계는 지난 500년 동안 자본주의를 먼저 발전시킨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지배 아래 놓여 온 셈이다. 오늘날 G7으로 통하는 국가들이 그들 제국주의 세력에 해당한다. 그들 국가는 미국의 속국으로 기능하며 비서구, 남반구, 제삼세계 국가들을 유린해왔으나, 최근에 들어와서 중국과 러시아, 인도, 이란 등 비서방 브릭스 국가들이 부상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조세가 뚜렷하다. 이런 점은 구매력평가지수 GDP로 보면 중국이 미국을 앞질러 세계 1위가 되었고, 인도가 과거 자국을 식민지배한 영국의 경제력을 추월해 세계 3위로 올라섰으며, 러시아는 독일을 제치고 유럽에서는 1위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 2000년대까지 세계 2위이던 일본을 제치고 이제는 인도 다음으로 세계 4위 경제 대국으로 오른 점이 웅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헤게모니 쇠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제국과 그 수하인 서방 또는 (영광스럽게 한국도 일원인) 집단서방의 반격과 역습도 만만치 않다. 헤게모니는 위기에 처할 때가 위험한 법이다.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의 축적 위기에 처하자 축적 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지배가 발동된 뒤 사회적 위기가 끊이지 않은 것이 좋은 예다. 미국의 최근 행태도 헤게모니 위기의 징후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카드를 내던질 만큼 산업적 생산력이 약화했고, 군사적으로는 서아시아 최빈국인 예멘의 공격을 막지 못해 홍해에서 ‘세계 최강’ 항공모함을 철수시켜야 할 정도로 약체가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헤게모니의 주요 특징이라고 말한 정치적 지도력을 더 이상 구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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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현재 세계 최대의 테러 국가다. 자국 경제가 뒤처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미국이 잘하는 것은 타국에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이고, 국제정치에서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시도하는 것이 타국을 상대로 한 색깔 혁명 또는 체제 전복 공작이다. 더구나 미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서는 서아시아 등 특정 지역의 발칸화를 위해 자국 기준으로도 테러 집단인 세력을 지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최근에 시리아에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의 지도자 아부 모하마드 알-줄라니는 미국 정부가 1천만 달러의 포상금을 걸어놓은 테러리스트인데도 미 CIA는 그와 그의 세력을 지원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국제법을 가장 많이 위반하는 나라, 유엔에서 채택되는 결의안에 가장 많은 반대표를 던지는 나라이기도 하다. 최근에 들어와서 자국이 연루된 지정학적 갈등에 대해 평화적 해결책을 외면하는 미국의 태도는 도를 넘었다. 이것은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와서 특히 심해진 현상으로, 우크라이나전쟁과 관련해서도 미국은 사실상 전쟁 당사자이면서 상대방인 러시아와 어떤 외교적 접촉도 하지 않는 대책 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능력이 약화하면 할수록 미국의 테러, 폭력, 불법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가고 그 결과 세계가 온갖 위험에 직면해 있다. 집단서방의 일원으로 미국의 충실한 속국인 한국도 그런 위험에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 국내 정국을 강타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도 미국이 국제관계 관리에서 테러리즘에의 의존도를 높이는 것의 연장선상인 점이 크다. 군부 상층부가 대통령과 함께 벌인 비상계엄 또는 내란 획책에 미국이 직접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군이 주둔한 나라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 정황을 미국 정보망이 놓쳤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군부는 미군의 예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군 상층부가 대대적으로 가담한 내란에 미국이 몰랐다면, 상식이 용납하지 않는다.
퇴임을 몇 주 앞둔 미국의 현임 대통령 바이든이 윤석열의 쿠데타가 실패한 지 12일 지난 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와 길게 통화했다는 사실이 매우 불길하게 느껴진다. 최근 수사당국이 자신을 조여오는 데 대한 윤석열의 저항이 완강하고, 한덕수가 야당이 요구한 일련의 특검법을 거부하고, 여당의 원내대표 권성동이 헌법재판관 임명 등을 방해하기 위해 자의적 법 해석을 내놓는 것 등은 그 통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헤게모니의 약화 속에 미국은 갈수록 폭력 국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각종 테러 지원, 타국에 대한 불법적 침략 또는 타국 자산의 불법적 약탈, 자국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나라의 정권 전복 등에 가장 적극적인 것이 미국이다. 그런 점을 보면 미국은 한국에서도 자국 이익을 지키는 친미 세력을 지원하고 그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는 단호히 방어에 나설 것임이 자명하다. 최근에 들어와서 가장 친미적인 노선의 정책을 펼쳐온 정권이 윤석열 정권이다. 이번 내란과 탄핵 정국에서 윤석열 도당이 시간이 갈수록 공세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미국을 뒷배로 믿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제국의 쇠퇴로 세계는 더욱 위험해졌다. 한국도 그 여파에 휩싸인 상황이다. 윤석열 도당이 미국의 지령을 받고 계엄과 내란을 획책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윤석열 정권과 국내 극우세력이 친위쿠데타 실패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제국의 지배력을 온존할 온갖 수단을 가동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반동을 척결할 수 있는 것은 민중밖에는 없다. 지금은 누구보다 민중이 가두에 나서야 할 때다. 자유주의 세력인 야당이 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정권 교체라고 봐야 한다. 야당은 집권 후가 되면 쇠퇴하는 제국의 또 다른 앞잡이가 될 공산이 높다. 제국이 한국에서 벌이거나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사태의 가장 큰 희생자는 민중일 수밖에 없다. 민중이 지금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한편으로는 윤석열의 탄핵과 여당의 해체를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탄핵 이후의 정국을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것을 막으려면, 민중의 항의와 저항이 가두에서 펼쳐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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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문화/과학' 발행인, '문화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참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의 생김새⟫, ⟪길의 역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