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그리고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Galeazzo Ciano)가 뮌헨 협정(Munich Agreement) 서명 전에 찍은 사진. 이 협정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겼다. 출처: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위키미디어 커먼즈
우크라이나는 지난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미국과 러시아 관리들 간의 핵심 회의에 초대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평화가 어떤 모습이 될지를 논의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가 배제된 협상에서 어떠한 결정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협상은 러시아의 3년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논의지만, 정작 당사국인 우크라이나가 배제된 상태다.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당사국 없이 협상하려는 결정, 그리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의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희귀 광물 자원의 절반을 요구한 것 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당사국을 배제한 채 국경이나 세력권을 재편하기 위해 공모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러한 일방적인 권력 정치는 영향을 받는 당사국에게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으며, 다음의 일곱 가지 역사적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 대통령 V.V. 푸틴과 미국 대통령 D. 트럼프가 국제 이슈와 양자 의제에 대한 접촉을 강화하기로 한 합의에 따라, 러시아 외무부 장관 S.V. 라브로프와 러시아 대통령 보좌관 Yu.V. 우샤코프는 2월 18일 리야드에서 국무장관 M. 루비오, 국가 안보 보좌관 M. 왈츠, 대통령 중동 특사 S. 위트코프로 구성된 미국 대표단과 회담을 가졌다. 출처 : 러시아 외무부
1. 아프리카 분할
1884~85년 겨울, 독일 지도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유럽 열강들을 베를린으로 초청하여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분할을 공식화하는 회의를 개최했다. 훗날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알려지게 된 이 회의에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인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회의의 결과 중 하나로, 벨기에가 통치하는 콩고 자유국이 설립되었다. 이곳은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식민지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또한, 독일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German South West Africa, 오늘날 나미비아)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 바로 이곳에서 식민 지배하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행되었다.
베를린 회의 이후 변화한 아프리카의 국경.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2. 삼국 협정
이러한 강대국들의 분할 방식은 아프리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899년, 독일과 미국은 회의를 열고 사모아 주민들에게 양국이 사모아 제도를 분할하는 협정을 강요했다.
이는 사모아인들이 자치권을 갖거나 하와이와 함께 태평양 국가 연합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이루어진 일이었다.
사모아를 차지하지 못한 대가로, 영국은 통가에 대한 우선권을 확보하는 "보상"을 받았다.
독일령 사모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 통치하에 놓였으며, 1962년까지 뉴질랜드의 영토로 남았다. 미국령 사모아는 여러 태평양 섬들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 있다.
3. 사이크스-피코 협정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은 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 협의했다. 오스만 제국은 적대국이었기 때문에 이 협상에 초대되지 않았다.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 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피코(François Georges-Picot) 는 자국의 이익에 맞춰 중동의 국경을 다시 그렸다.
그러나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이전에 영국이 아랍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후세인-맥마흔 서한'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이 서한에서 영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아랍 독립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협정은 오스만령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영국의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과도 모순되었다.
이 협정은 수십 년간의 갈등과 식민 지배를 초래했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중동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중동 지역의 통제 및 영향권을 보여주는 지도. 출처: 영국 국립 기록 보관소/ 위키미디어 커먼즈
4. 뮌헨 협정
1938년 9월,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유럽 전역으로 전쟁이 확산는 것을 막기 위해 추진되었다. 당시 히틀러의 나치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인 주데텐란트(Sudetenland)에서 폭동을 조장하고, 이를 구실로 침공을 감행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계 소수 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 회의에는 단 한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도 초대되지 않았다.
이 협정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뮌헨 배신"으로 불린다. 이는 전쟁을 피하고자 침략국을 유화하려다 실패한 전형적인 사례로, 강대국이 적대적인 세력에 양보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전쟁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분쟁이 1938년 뮌헨 협정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면, 더 많은 국가들이 군사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대만은 더욱 취약해 보인다.
The settlement of the Ukraine conflict in a manner reminiscent of the 1938 Munich Agreement could entice more states to resolve disputes militarily. Taiwan especially looks ever more vulnerable. https://t.co/jnwkkhHWgT pic.twitter.com/4Z3uDBLMpr
— The Diplomat (@Diplomat_APAC) February 14, 2025
5. 에비앙 회담
1938년, 32개국 대표들이 프랑스 에비앙레뱅(Évian-les-Bains)에 모여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는 유대인 난민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영국과 미국은 서로에게 유대인 수용 할당량을 늘리도록 압박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즉, 미국은 자국 내 유대인 수용 한도를 높이지 않았으며, 영국도 당시 통치하던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이민을 확대할 의사가 없었다.
미래의 이스라엘 총리가 될 골다 메이어(Golda Meir)가 참관인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지만, 그녀를 포함한 어떤 유대인 대표도 협상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회담의 참가국들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제외하고는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으며, 독일 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나치즘이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의 정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탈출할 수 없었다.
6.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
히틀러가 동유럽 침공을 계획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소련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해법은 소련과 기만적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 서명 후. 출처 :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위키 커먼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은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조약으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 소련이 개입하지 않을 것을 보장했으며, 유럽을 나치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협정 덕분에 소련은 루마니아와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을 병합하고, 핀란드를 공격 하며, 폴란드의 일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논의하는 방식이 바로 이 협정과 비슷한 "비밀 외교"라고 보고 있다. 즉, 2차 세계대전 당시 강대국들이 작은 국가들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던 방식이 부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7. 얄타 회담
나치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자, 1945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전후 유럽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만났다. 이 회담은 "얄타 회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포츠담 회담이 열린 몇 달 뒤, 얄타 회담은 유럽을 냉전 속으로 분열시키는 정치적 구조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얄타에서 ‘빅3’는 독일의 분할을 결정했으며, 동시에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영향권을 보장받았다.
이는 동유럽에 정치적으로 통제된 완충국들을 두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일부에서는 오늘날 푸틴이 동유럽과 동남유럽에서 이를 모방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그 결과, 동유럽에는 소련이 통제하는 완충국들이 형성되었으며, 일부 사람들은 푸틴이 현재 동유럽과 남동유럽에서 이와 유사한 전략을 모방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출처] Ukraine isn’t invited to its own peace talks. History is full of such examples – and the results are devastating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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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피츠패트릭(Matt Fitzpatrick)은 플린더스 대학교(Flinders University) 국제사 교수(Professor in International History)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