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쩔 수 없이 희생된다'는 식량의 미래

[특별기획 : FTA체제가 열린다](8) - 한국 농업과 세계의 식량산업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후, 정부의 통상 협상 공통 멘트는 '농업의 어쩔 수 없는 희생'과 '국내 대책을 통한 해결 방안 마련' 이 골자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살농(殺農)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계 각국은 농산물 가격 폭등에 홍역을 앓고 있다. 원유가 폭등 만큼이나 국제 시장에서는 밀, 옥수수, 콩 등의 가격이 사상 최고가를 돌파했고, 각국에서는 각종 항의 시위에 대책 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업의 문제는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문제이다. 시장 개방만이 만능이 아닌 업종도 있다. 핸드폰은 비싸면 안 쓰면 되지만 주식인 쌀은 아무리 비싸도 살 수밖에 없다. 농민들의 싸움에 많은 국민들이 공감했던 이유는 아련한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라, '식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특수성 때문이다.

한미FTA 협상의 위험한 성적표

한미FTA 협상 결과에 대해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전대 미문의 전 품목 관세철폐로 중장기적으로 농업 , 농촌, 농민의 해체적 위기 가속화 할 우려 높다"고 총평했다.

관세화 예외품목은 1,531개 품목 중 쌀 16개 품목으로 1%에 불과해 쌀을 제외한 전 품목 관세 철폐라는 신기록 수립 했다. 끝까지 지켰다고 선전했던 '쌀'의 경우, 이미 미국과 2014년까지 관세화를 유예하기로 한 2004년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2014년 이후에는 미국뿐 아니라 WTO 회원국 모두에게 쌀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 외 농산물특별긴급수입제한(ASG) 발동 요건의 비현실성, 긴급수입제한조치(SG)를 1회로 제한한 조치, TRQ 물량과 관련한 미국의 요구가 대거 반영됐고, 덤핑에 대한 국내 대응 체계도 미흡하다. 농산물의 대대적인 관세철폐로 인해 미국산 농산물의 한국 시장 진출 장벽이 낮아졌다.

국회 토론회에 참석했던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관세철폐에 의한 시장 개방 충격 뿐만 아니라 농업 관련 산업부문의 개방 조건"의 항목을 더욱 강조했다. 한미FTA 협상 결과 생산과 연계된 유통, 가공, 저장 등 농 관련 산업에 외국자본이 진출하기 쉬워졌다. 육류도매업에 미국의 거대 유통자본이 들어올 경우 수입 축산물을 취급함은 물론 국내산 축산물도 취급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막강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FTA협상은 시장의 문턱 높이를 조정하는 수준이었다면 한미FTA의 협상 결과, 농업 뿐만 아니라 농업과 관련한 모든 산업들, 유통, 판매와 맞물려 새로운 구조의 틀이 만들어졌다.

농민, 하루에 3명 이상 죽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한국

UR(우루과이라운드 협정)과 WTO에 이어, 2003년 한칠레FTA 체결 이후 과수 농가의 구조조정, 2004년 쌀 재협상 결과 이후 쌀 정책의 변화, 2007년 한미FTA 타결을 바탕으로 소수의 전업농 및 기업농 위주의 정책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9%에 달했으나 2005년 통계 자료를 보면 3.3%로 급락했다. 1990년대 초반 700만이 넘는 농어가 인구는 2005년에는 그 절반 수준인 360만 명으로 절반정도가 감소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1일 현재 농가 수는 124만 5천 가구로 전년보다 2.2%(2만8천 가구) 줄었다.

통계청의 2006년 농어업 기본통계조사결과 자료에 따르면 농가 인구에서 65세 이상의 비중이 30%를 넘어 초초고령사회에 들어선 반면 농가당 평균 부채금액은 1990년대 초반 470만원 수준이었으나, 2005년에는 약 2700만원으로 약 6배 정도 상승했다.

농민의 수도 줄고 종사 가구도 줄었지만 가계가 부담해야 할 부채 금액은 수배가 증가했다. 결국 이런 현실은 농민들이 삶을 포기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정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자살한 농민의 수가 2002년 810명에서 지난해 1,14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하루에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현실이다.

최재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국장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방농성이 계속되는 한, 시장 논리에 적응해 소규모 틈새 시장에서 정착할 수 있는 소수의 기업농이나 전업농만 살아남게 될 것"으로 "이때 농업은 산업으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업종의 하나로 전락하는 형태로 완전히 해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제는 단순히 종사자의 희생으로, 개방농정에 따른 농민의 어려움은 농촌의 붕괴로, 각각 별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먹거리 문화의 변화, 농업 전반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농업, 산업으로 세계 민중의 숨통을 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 43%를 상회하던 식량자급률은 2006년 약 절반 수준인 25.3%로 하락했다. 그나마도 쌀을 제외하면 5% 내외이다. 2003년 가공식료품 전체 수입량의 44%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농산물을 수입해서 먹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는 한국의 '개방 농정'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최근 유가 뿐만 아니라 곡물가 폭등도 계속되고 있다. 옥수수, 밀, 콩 등 한국에서는 거의 생산되지 않는 곡물들이 작년 동월대비 35~70% 폭등 했다. 밀(소맥)의 경우 캔사스상품거래소(KCBOT)에서 9월 인도분이 지난 14일 현재 t당 296달러에 거래됐다. 이는 작년 같은 달보다 무려 68%, 8월과 비교해도 21%나 높은 것으로 지난 96년 6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옥수수와 대두(콩) 가격도 마찬가지로 폭등세다. 업계에서는 세계적인 기상 이변, 투기자본의 작전, 바이오에너지 수요 급증에 따른 영향 때문으로 분석했다. 중요한 점은 이런 국제 곡물가 폭등 현상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최소 향후 10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러시아 정부는 빵, 우유, 치즈 등 기초 식료품의 가격을 ‘10월 15일 수준’으로 동결하기로 했다. 러시아의 식료품 가격이 지난 9월 모스크바를 제외한 지방에서 10% 이상 상승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는 옥수수로 만든 주식 '또띠아'의 가격 인상에 따른 항의 시위가 계속됐고, 이탈리아, 이집트 등에서도 식료품 가격이 정치적 이슈로 등장했다. 과거 빵값 인상에 따른 거센 국민적 저항을 경험한 적 있는 이집트 정부의 경우 지난달 빵 제조업체에 지원하는 보조금을 대폭 늘리는 대책을 세웠다.

세계 곡물가 폭등의 여파는 한국을 피해가지 않았다. 국내 제분업체들도 국제 밀 가격의 상승분을 반영해 밀가루 제품의 출고 가격을 인상했다. CJ제일제당의 경우 제품의 출고 가격을 20㎏ 강력분은 1만2천760원에서 1만4천410원, 중력분은 1만2천30원에서 1만3천640원으로 인상했고, 이런 가격 상승 기류는 라면, 빵, 제과 등 관련 식품 가격에도 영향을 끼쳤다.

권영근 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은 "(이 같은) 곡물 가격 상승은 이를 원료로 한 가공식품 뿐만 아니라 배합사료의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며, "비료, 농약, 종묘 등 농업관련 기업들에게 까지 적자폭이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배합사료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애그리브랜드퓨리나코리아는 이달 들어 품목별로 평균 4.5% 가격을 올렸다. 배합사료 값은 올해 들어서만 이미 세 차례 올랐고, 작년 11월 인상분까지 포함하면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30% 가까이 인상했다. 곡물가 인상이 몇몇 곡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연관 산업의 동반 가격 상승을 추동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빗대 업계에서는 반도체로 벌어들인 돈을 농축산물을 수입하는데 다 쓴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런 곡물가 폭등은 거대 농식품복합체의 세계적 지배 현상과도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세계 곡물 시장의 70% 가량이 카길과 ADM의 두 회사에 의해 장악돼 있다. 콘아그라와 루이드레퓌스 등 5대 곡물 메이저의 시장 점유율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카길의 중역을 맡고 있는 짐 프로코판코는 "카길은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인산비료를 생산한다. 그 비료로 미국과 아르헨티나에서 대두를 생산하고, 이 대두는 식품과 기름으로 가공된다. 가공된 대두 상품은 태국으로 출하되어 닭고기 사료로 쓰이고, 이 닭고기는 다시 가공 처리되거나 조리된 후 포장되어 일본과 유럽의 슈퍼마켓으로 출하 된다" 는 연설로 카길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 수직, 수평적 사업 결합력을 확장하고 있는 초국적농식품 복합체의 영향력은 전세계 식량 산업을 장악해 가고 있다.

식량자급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포기한, 끝까지 가는 '개방'

김영삼 정부가 42조원의 투융자대책과 김대중 정부의 47조 투융자대책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10년간 119조원 투융자대책을 세웠다. 재정의 비중만 본다면 적지 않은 비용이나, 내실을 보면 사실상 농업 구조조정을 위한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대표적인 예로 생산농가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가격지지 정책은 폐기하고 국내보조를 대폭 감축시켜 왔다. 1994년 쌀보조금이 약 2조 3천억 원이었으나 추곡수매가 폐지된 2006년의 쌀 고정직불금은 약 5,70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한미FTA의 대책인 ‘피해보전직불제’ ‘폐업지원제’ 도입 대상 사후지정 방식으로 작동요건 까다롭고, 내년 농림부문 예산안(기획예산처)의 경우, 농림부 소관 예산은 12조5,267억원으로 올해 12조1,208억원보다 3.3% 증가했지만, 농가에 절실한 소득보전 및 경영안정 예산은 올해보다 오히려 692억 원 줄었고, 농업생산기반 조성 사업비도 1,422억 원 감소했다.

한농연에서는 벼 수매가 목표가격 법제화를 요구하며 100만 서명운동, 토론회 개최 등을 통해 정부와 정치권에게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고, 전남의 농민들은 '쌀 생산비 보장'을 촉구하며 10월 높은 가을 하늘 아래 나락을 태웠다. 회관을 세우고 도로를 정비하는 지원이 아닌 생산이 가능한, 종사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원 정책이 돼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고 있다.

권영근 소장은 "농업을 상품으로 바라보는 정부의 근본적인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농업을 상품으로 인식하며 비경쟁적인 산업으로 간주하는 정책 기풍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농업을 생명의 근본, 생태계를 보전하는 환경, 전통문화와 지역사회를 유지하는 다원적 기능들은 사장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개방농성에 대한 민간 영역의 다양한 시도들도 계속되고 있다. 농민운동 진영은 '식량주권 확보'의 구호 아래 통일 농업과 국민농업의 상을 제시했다. 이미 '협동 농장' 형태로 북과의 활발한 농업 교류를 진행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역의 먹을거리를 소비하자는 로컬 푸드 운동이나 화학비료나 농약 등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업의 생산자 운동이나 지역 특화 산업 등의 시도도 다양화 되고 있다.

생협을 중심으로 하는 안전한 먹거리 운동은 자체 이력 추적제를 도입한 품질 검증 시스템 도입 등 안전한 농산물 생산, 유통을 위한 제도를 체계화 했다. 학교급식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는 제주의 경우 100% 급식전용식당, 100% 직영급식을 실시하는 등 지역사회의 노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동시다발 FTA 시대 이후, 미래 세대의 짐

세계적인 반세계화 활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인도에는 수천만의 토종종자와 약 4천만의 소매상이 있지만 그들은 오직 몬산토의 종자만을, 오직 월마트를 통해서만 분배하려고 하고 있다. 1997년 자유농업정책이 시작된 이후 지난 10년 동안 15만 명의 인도 농민이 자살했다"며 현지의 분위기를 전한 바 있다. 초국적농식품 복합체의 그늘아래 살아가는 삶을 미리 겪었을 뿐이다. 직접적인 체감이 적을 뿐 한국의 농업, 농민들 또한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는 셈이다.

FTA 협상이 거듭될 수록 국내 농업을 위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들이 해제될 수밖에 없다. 강민수 전국농민연대 정책국장은 "FTA 체결함에 따라 저율관세할당물량 TRQ(의무도입물량)을 각국과 정하게 돼 있다. A국, B국, C국 등 의무도입물량을 서로 다르게 설정한다 하더라도 각국의 의무 도입물량만 합해도 전면 수입 개방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나게 된다"고 지적한다. 앞문으로는 전면적인 수입개방을 막고 최소한의 선택적인 방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상 뒷문은 모두 열려져 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세계는 소수의 기업에 의해 먹거리 산업은 종자에서 부터 유통, 판매까지 독점, 재편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농업은 상품시장 내에서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성한 '애그 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식량이 무기가 되는 현실을 목도했고, '그림의 떡'이라는 고사성어는 현실로 다가온다. 먹거리 문화가 사회의 빈부를 가늠하게 될 미래 또한 '개방 농정'의 후세가 감내해야 할 고통일 수 있다. 보조금이 대안은 아닐지라도 국내 식량 자급률을 지지하기 위한 직접적인 지원 정책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이 가운데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는 세계 농업강국 미국과 EU와 연달아 FTA를 추진돼고 있고, 중국과의 FTA도 예정돼 있다.

어느 때 보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영역이지만 더 없이 정부 협상에서 홀대 받고 있는 것 또한 농업이다. 세계 곡물가 폭등에 각국이 서둘러 대책 발표에 나서고 있는 현상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동시다발 FTA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
태그

농업 , 한미FTA , FTA체제 , TRQ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라은영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음..

    어떻게, 뭘 먹고 살아야 할까

  • 이현아

    ㅋㄷ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