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잘 날 없는 성남시

[1단 기사로 본 세상]‘코드 정권’ 프레임에 갇힌 집권세력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나는 운동을 전면 재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당의 역할과 중앙집권적 전위정당의 필요성이 도출된다.” 은수미 성남시장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함께 수감된 동료와 함께 1995년 11월 펴낸 ‘갇힌 자의 열린 사상 – 옥중서신 모음’이란 책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은 시장은 수감 중에도 전위정당을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레닌이 이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넘어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동경했다.

“(러시아) 1905년의 당은 주로 중앙집권을 강조했고, 이후엔 민주주의의 광범위한 확대와 중앙집권과의 결합을 명시했다. 이와 대조적인 주장을 편 사람은 로자였다. 로자는 당이 대중조직과 분리돼 만들어져야 하는 점과 당의 의식적 지도의 필요성에 관해선 레닌과 일치한다. 로자는 대중투쟁의 우위성, 순차성을 강조하면서 당의 중앙집권적 측면, 위로부터의 지도의 측면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람시는 레닌과 로자의 중간 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사노맹 수감자들의 옥중서신 모음(1995년).

은 시장은 혁명정당의 중앙집권 모델보다는 “당은 위로부터 조직하려 하거나 협동조합, 풀뿌리 조직들과 격리된 위계적 정치구조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아래로부터 광범위한 대중조직과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 시장은 이를 90년대 한국 사회에 접목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적극 활용하는 한편 대중의 자치운동과 조직을 중심에 둔 새로운 제도적 대안의 형성이 필요하다”며 “지난 대선(1992년) 시기 나왔던 ‘민중대표자회의’는 부적절하다. 민중대표자회의는 실패한 소비예트적 발상의 답습에 불과하다”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은 시장은 레닌의 민주집중제를 완전히 배격하지도 않았다. 은 시장은 “레닌은 민주집중제를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라는 슬로건으로 압축했다. 민주집중제는 결코 정태적인 게 아니고 ‘민주주의와 집중’간의 긴장과 통일의 원리였다”고 엄호한다.

은 시장은 90년대 한국에서 진보정당 건설에도 “민정련과 진정추의 통합에 기초한 진보정당 만들기라는 구상은 현실 가능성이 불충분해 보인다. 연내에 합법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견해는 현실성도 적고 올바르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당 결성을 모색해야 한다”며 나름의 입장을 정리했다. 은 시장의 그림대로 한국에선 1997년 대선 때 국민승리21을 시작으로 2000년 초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이 출범한다. 그러나 은 시장은 이 정당에 참여하는 대신 학업을 마친 뒤 2005년 노동부 산하 한국노동연구원에 입사했고 7년 뒤 민주당 비례대표 3번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출소하면 노해문(노동해방문학)의 모든 글과 여타 자료들을 꼼꼼하게 다시 읽을 생각”이라던 활동가는 박사학위와 국책 연구기관을 거쳐 보수 정당에서 둥지를 틀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박사 논문이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 연구’다. 집권 민주당에 가 있으면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가 더 잘 보일까.

  한겨레 9월 16일 12면.

지난달 16일 한겨레신문 12면엔 ‘은수미 캠프 봉사자 대거 부정채용 의혹’이란 제목의 1단 기사가 실렸다. 지난 7월 대법원 판결에서 기사회생한 은 시장에게 또 악재가 터졌다. 최근 성남시 서현도서관에 공무직을 뽑았는데 최종 선발된 15명 중 7명이 은 시장 캠프의 자원봉사자였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진행 중이었다. 청원자는 다른 도서관 채용엔 준사서 자격증이 필요했는데 서현도서관은 기준을 완화해 특별한 자격요건이 없었다고도 했다.

이에 성남시는 지난달 15일 “정확한 사실관계를 왜곡한 허위 주장으로 간주하고 허위사실 유포 등에 대해 강력히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겨레 9월 17일 12면.

그러나 한겨레는 다음 날인 9월 17일에도 12면에 ‘자격증 필수, 성남시가 지웠다’는 제목의 2단 기사로 후속보도를 이어갔다. 한겨레는 채용공고를 낼 무렵 서현도서관이 성남시에 ‘공무직 채용기준으로 준사서 자격증 소지자로 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으나, 시 인사담당 부서가 이 조항을 삭제하고 공무직을 채용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성남시는 “신속한 개원이 요구되는 상황이라 준사서 자격증 조건을 뺐다”고 해명했지만 채용 기준 변경을 지시한 사람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 한겨레는 “15명이 최종 합격했는데 3명만 준사서 자격증이 있었고 나머지 12명 가운데 7명이 은수미 시장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또 한겨레는 “(합격자) 가운데 은 시장의 선거 캠프 종합상황실장이었던 이아무개 씨의 친조카도 채용된 것으로 드러났다”며 채용 기준이 바뀐 배경에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한겨레 7월 13일 8면(왼쪽)과 7월 10일 9면.

은 시장은 2016년 6월부터 약 1년간 개인 정치활동을 하려 이동할 때마다 성남지역 기업으로부터 모두 95차례 차량 편의를 제공받은 혐의(정치자금법 45조 1항)로 기소됐다. 1심 법원은 유죄를 인정했지만 시장직 유지가 가능한 ‘벌금 90만 원’을 선고했다. 2심도 정치자금법 45조 1항 위반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시장직 유지가 불가능한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7월 9일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은 시장의 정치자금법 위반을 인정한 원심 판단에는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검찰이 항소심 재판부에 써낸 항소이유서의 ‘절차적 흠결’을 지적했다. 검찰이 제출한 항소장과 항소이유서엔 ‘양형부당’이라는 문구만 있고 그 구체적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구체적 이유가 항소장에 기재되지 않아 ‘적법한 항소 이유’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은 시장은 시장직을 유지하게 됐다.

이를 한겨레는 대법원 판결 다음날인 7월 10일과 7월 13일 9면과 8면에 보도했다. 은 시장은 죄는 있지만 검찰의 ‘절차적 흠결’ 때문에 살아남았다.

한겨레라서 이 정도다. 조선일보는 은 시장과 이재명 경기도지사 TV토론 발언,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뇌물 수수 사건까지 엮어 대법원의 ‘코드 판결’로 몰아갔다. 조선일보는 지난 9월 5일 ‘김명수 대법의 법해석 내편 합법, 네편 불법’이란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은 데 이어 10면엔 ‘대법, 사람·단체따라 법리 다르게 적용’이라는 머리기사까지 실었다.

조선일보는 9월 5일 10면 기사에서 익명의 고등법원 판사의 입을 빌어 “검사가 항소장에 양형부당이라고 적은 것은 오랜 실무 관례인데 납득할 수 없다”며 “이 역시 대법원이 그동안 문제시되지 않았던 지엽적 절차를 문제 삼아 본질인 은 시장의 불법 정치자금 혐의를 덮은 사례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은 시장 판결 등은 대법원을 통째로 ‘코드 판결’로 몰아세우는 훌륭한 불쏘시개가 됐다. 조선일보는 여권 인사들의 판결과 함께 대법원이 1949년 여순사건 판결도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악질 친일파’로 규정한 다큐멘터리 ‘백전전쟁’도 “주요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돼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며 비난했다.

여기에 조선일보는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판결까지도 대법원의 코드 판결로 치부했다. 문재인 정부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전교조마저 집권세력과 한통속이라고 몰아세우는 판국이다. 아무리 엉터리라도 조선일보가 짜놓은 프레임은 꽤 많은 국민을 포섭하고 있다.

지난 7월 15일엔 성남시 현직 공무원이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로 여성 승객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가 다른 승객의 신고로 경찰에 잡혔다. 성남시는 입장문을 내고 7급 공무원을 직위해제했다.

‘천당 위에 분당’이라는 부자 동네를 끼고 있는 성남시는 바람 잘 날 없다. 성남엔 ‘분당’만 있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의 강제이주 설움도 짙게 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