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서 벗어나는 튀니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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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처 : https://www.hrw.org/]

최근 아프가니스탄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그런데 넓은 의미로 중동의 일원이면서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튀니지에서도 극적인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다. 정국 경색을 몰고 온 대통령의 총리 경질과 의회 기능 정지, 아랍의 봄을 재연시키는 듯한 반정부시위, 그리고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튀니지의 오늘을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이다.

1. 초유의 정치 상황

지난 7월 25일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은 수상 히셈 메시시를 해임하고 뒤이어 내무장관, 법무장관, 국방장관 등 총 25명의 정부 부처 고위직을 경질했다. 이와 함께 한 달간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며칠 후에는 원내 제1당인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의 연정 파트너인 또 다른 이슬람주의 정당 알 카라마의 의원 두 명 등 여러 명의 의원이 체포됐다. 지난 2019년 총선에서 저질러진 불법행위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혐의의 중심에 있는 엔나흐다에게도 대통령이 주도하는 부패 척결의 화살이 향하고 있다.

대통령의 이번 조치로 튀니지는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엔나흐다와 이 당의 지도자이자 국회의장인 하셰드 간누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편에는 대통령 지지자들이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대통령에 따르면 이번 조치의 배경은 몇 달씩 이어지고 있는 정쟁과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의 악화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간누쉬 국회의장은 이번 조치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의회 정문에서 농성을 했다. 혁명 이전의 독재체제로 귀환하는 것이라며, 자신을 혁명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세력이라 표방하고 있다.

여론도 둘로 나뉜다. 한편에선 지난 1년간 정부의 실정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며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전환점이라는 평가가 있다. 반면 이번 조치가 그간 튀니지가 만들어온 성과들을 무로 돌릴 수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라쉬드 간누쉬가 떠났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라고 환호하는가 하면, 여전히 혁명 이후 정치권의 핵심세력이자 안정적인 정당의 면모를 보여 온 엔나흐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도 있다. 2011년 구성된 초대 민주 정부 이후 지금까지 엔나흐다는 거의 모든 정부에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2013년 무슬림형제단 출신 대통령 무르시가 쿠데타로 실각하고 이슬람주의자가 대량학살을 당한 이집트의 사례가 튀니지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2. 2011년을 떠올리게 하는 반정부시위

이번 사태는 수 주일 전부터 이어진 시위 직후 적용된 조치였다. 그래서 국민들의 시위가 그동안 원성을 산 총리의 해임을 끌어냈다고도 한다. 이번 사태가 있기 전까지 메시시 정부는 국민의 대대적인 저항에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수도 튀니스에서는 수 주 전부터 시위가 원천 봉쇄됐다. 주말 기간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수도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마침 코로나 확진자 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 정부는 이를 ‘방역 조치’라 표방했고, “치안을 위한 조치인가, 방역을 위한 조치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7월 25일 일요일, 많은 청년이 튀니스의 의회 근처 광장 등 튀니지 전역에서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시위는 튀니지 혁명 10주년이었던 올 초 1월 이후 수 개월간 지속해온 반정부투쟁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튀니지사회경제권포럼(FTDES)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총 7,743건의 사회운동이 발생했다. 이는 2020년 같은 기간 4,566건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다. 1월(1,492건), 2월(1,235건), 3월(1,138건) 등 1/4분기에 많이 발생했다가 4월 841건, 5월 1,155건, 6월 937건, 7월 975건으로 조금 줄어들었다. 올해 1월에는 10년 전 2011년의 1월과 같은 대대적인 반정부시위가 분출했다. 시위대의 목소리는 혁명 이후 형성된 정치계급을 비판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 의회 해산, 현 정부 퇴진, 그리고 나라를 이 지경에 처하게 한 자들을 벌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전 ‘존엄성 혁명(dignity revolution)’ 당시의 구호였던 노동, 자유, 정의, 평등이 반복되고 있다.

3. 최악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국민의 격렬한 저항이 대통령의 조치가 나오게 된 계기였다면, 국민의 불만이 고조된 직접적인 계기는 튀니지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이 시기를 전후해 최고 수치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인구수가 1190만 명(2020년)인 튀니지는 8월 19일 현재 63만 명의 확진자와 2만2천 명의 사망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7월 중순에는 신규 확진자가 하루 평균 8천 명에 육박했고 이후 다소 줄어들어 8월 중순에는 2천 명대를 기록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가장 많았던 시기가 1월 중순으로 3천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다가 6월 하순부터 급증해 7월에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서아프리카 지역의 전반적인 코로나19 팬데믹 3차 유행을 튀니지도 겪고 있는 것이다. 8월에 들어서는 감염 상황이 다소 나아져 보건당국이 방역 조치를 완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방역 조치가 시위를 막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튀니지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인구대비 확진자 비율도 높지만, 특히 치명율이 가장 높다. 그로 인해 중증환자를 위한 병상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의료용 산소 공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등 의료체계가 붕괴 위험에 처해있다. 게다가 7월까지 2차 백신 예방접종을 마친 국민은 7% 정도에 그쳤다. 자연스럽게 국민들은 정부의 방역 정책에 강한 불만을 느끼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튀니지는 –9%의 성장률, 18%의 실업률, 36%의 청년실업률을 기록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악화한 경제 상황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국민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4. 흔들리는 튀니지의 신화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을 통해 가장 보수적이고 퇴행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튀니지는 터키와 함께 중동지역에서 근대화와 서구화가 가장 진전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1957년부터 1987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하비브 부르기바는 튀니지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단지 경제적 근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근대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당시 아랍 세계 지도자 중 여성 해방에 기여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식민지 해방 직후 일부다처제, 조혼 등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며 여성 해방의 물꼬를 텄다. 이러한 튀니지의 근대적 이미지는 아랍의 봄의 도화선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적인 전통이 있었기에 혁명 이후인 2012~2013년 이슬람주의적인 방향으로의 헌법 개정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의회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다수인 상황이었다.

주변국보다 상대적으로 빨랐던 튀니지의 사회적 근대화는 저항의 전통을 낳는 간접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60~1970년대 부르기바의 근대화 정책 중 하나는 출산 억제였다. 그 결과 일찍이 튀니지는 평균 자녀 수가 2~3명에 그쳤다. 이것이 낳은 예상치 못한 결과 중 하나는 자녀에 대한 높은 교육열이었다. 그 결과 튀니지는 이웃 나라 모로코나 알제리보다 인구 대비 학생의 비율이 크게 높았다. 인구수는 서너 배 적은 데 학생 수는 오히려 많았던 것이다. 높은 교육열과 학력은 튀니지 청년들이 이웃 나라 청년들보다 더 강한 계층상승의 욕구를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화의 산물인 이 세대가 청년이 된 1980~90년대부터 튀니지는 당시 글로벌 경제가 위축되는 가운데 불황 또는 불안정한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계층상승의 욕구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제 현실 간의 괴리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열악한 고용상황에 처해있는 고학력 청년은 저항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튀니지는 특수성을 넘어 예외적인 사례로 간주되기도 했다. 아랍 사회가 권위주의의 숙명을 지녔다는 ‘아랍예외주의’는 오랫동안 회자돼 왔다. 하지만 아랍의 봄 이후에는 이러한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는, 민주주의로의 도약에 성공한 튀니지의 예외성이 관심을 끌었다. 지역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 튀니지는 지역의 강국은 아니지만 아랍 세계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평가받았다. 튀니지 이슬람주의 역시 혁명 이전부터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나 알제리의 이슬람구국전선 등과는 다른 온건하고 근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1980~1990년대 알제리 이슬람주의가 급진적인 노선을 채택했다면, 당시 엔나흐다 등 튀니지 이슬람주의 세력은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온건하고 실용적인 노선을 표방했다. 물론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정권의 탄압으로 토벌의 대상이 되거나 투옥과 망명의 길로 내몰렸다. 이러한 튀니지 이슬람주의의 특성은 간누쉬가 표방하고 있는 ‘이슬람민주주의론’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제 그토록 원하던 제도권 정치의 참여가 이루어졌고 이란에서 시작돼 터키에서 꽃을 피우고, 아랍의 봄 이후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는 ‘포스트 이슬람주의’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라는 성과에도 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회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혁명의 실패와 튀니지 정치의 구조적인 한계 등의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이제 정권의 핵심이던 엔나흐다 역시 계속되는 실정으로 주된 기반이던 대중적인 지지가 흔들리고 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2014년경 가장 많은 IS의 자원병이 배출된 곳이 바로 튀니지였다는 것이 황당하지만은 않다. 그때는 세속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아랍의 봄은 유일한 성공사례로 칭송되고 있었지만 정작 튀니지 청년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극단적인 상황이 낳은 극단적인 노선에 합류한 것이다. 동기는 다양할 것이다. 튀니지 이슬람주의가 이루려고 했던 이슬람 사회 건설이 IS에서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겠지만, 혁명 후 수립된 정권이 인구 절반을 차지하는 실업자나 비공식 부문 종사자와 같은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 컸을 것이다. 이제 튀니지는 혁명은 고사하고 민주주의마저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 글 앞부분에 언급한 사건들은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5. 위기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계기

아랍 지역에서 튀니지는 세속적이고 근대적인 민주주의에서도,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이슬람주의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가진 나라다. 엔나흐다의 지도자 간누쉬는 모로코의 압델살람 야신, 알제리의 압바시 마다니, 알리 벨하지 등과 함께 1980~90년대 아랍 이슬람주의 영웅시대를 장식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근 상황은 양자 모두에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사태의 주된 배경은 정치적 불안정일 것이다. 혁명 이후 아홉 번의 정부가 구성됐다는 사실이 이 점을 말해준다. 당연히 불법 이민, 실업, 구매력 저하, 열악한 경제지표 등 시급한 사안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정치권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닌 문제를 만드는 존재로 비춰졌다. 튀니지 국민들은 더 이상 정당과 제도권 정치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거리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사회운동의 한계도 확인되고 있다. 이번 조치처럼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산발적인 저항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양한 세력이 연대해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하는 사회운동도 찾기 어렵다. 혁명 이후의 정부들이 그랬듯 사회운동 진영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계가 드러났다는 것은 진보의 표식이다. 이상화된 이슬람주의의 환상이 깨지고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순진한 기대에 금이 가고, 자연발생적 저항에 보다 신중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튀니지 등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정치와 사회운동이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는 신호일 것이다. 10년 전보다 열기는 식었지만, 저항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민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화된 세력의 한계가 민중을 다시 거리로 불러내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혁명 이후 민중은 항상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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