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박기범씨의 단식일지를 연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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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화작가 박기범씨가 그곳에서 진행중인 10만 릴레이 단식에 참가하며 단식일지를 미디어 참세상에 보내 왔습니다. 박기범 씨는 11일로 단식 사흘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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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목소리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밤 사이 올라온 이라크 관련 뉴스들을 찾아보는 거였다. 바끼통에 가보니 프랭스가 벌써 많은 글을 찾아 모아 두었다. 그 가운데 아주 반가운 것, 동화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 나오는 CBS 라디오 인터뷰도 올라와 있다. 인터뷰 내용이야 그 동안 동화가 보내오는 일지들을 통해서, 그리고 워낙부터 함께 의논하고 나누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 새로울 거야 없었지만 마치 곁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한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척 반가웠다. 바그다드가 점점 불안해 지면서 집세를 비롯한 모든 물가가 곱절 가까이 뛰어서 활동할 돈이 턱없이 모자라고 있다는데 은행 한 번 나가는 일을 미루고 미루고 있어만 왔다. 건강하구나, 여전히 얌전히 조심조심 얘기를 하는구나. 녀석 목소리가 나오는 인터뷰를 한 번을 다 듣고, 일부러 창을 하나 더 띄워 새로 다시 들었다. 그렇게 목소리라도 듣고 있는 게 좋아서 또 듣고 싶었다.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불안한 말은 하지 않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 생각이 씨가 되어 꼭 그 비슷한 일을 부르게 될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걱정을 하다가는 놀라듯 도리질을 치곤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프랭스가 모아 놓은 기사 목록에는 한국인에 대한 테러 위험이 아주 높아졌다는 기사가 맨 아랫줄에 있었다. 이라크 현지나 둘레 아랍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한국인에 대한 테러 위협이 높아졌다고. 안 그래도 엊그제 본 기사 가운데에는 외신 기자로 일하는 조성수 아저씨가 하루 동안 테러단체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는 소식도 있었다. 지금 이라크에 있는 사람들은 동화와 한상진 아저씨, 조성주 기자, 김영미 피디, 그리고 가나무역의 직원 몇. 불길한 생각이야 하지 않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구도 모르는 일, 그게 오늘일지 내일일지. 조심해라.
나자프 360명
그리고 또 그 위에 있는 신문 기사 하나. 나자프에서 미군과 저항군이 전투를 벌여 저항군 360명이 죽었다는 기사다. 솔직히 말해 나도 이라크 관련 기사들을 목록에 있는대로 다 찾아 읽지는 않는다. 어떤 것은 열어 보고 중간 제목만 볼 때가 있고, 어떤 것은 제목만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도 있다. 이 기사를 보면서도 처음에는 깜짝 놀라거나 하여 바로 게시물을 열어보지 않았다. 먼저 눈길이 가는 다른 기사, 다른 게시물부터 본 뒤에, 어쩌면 그냥 지나칠 뻔한 기사였다.
이미 나도 이 전쟁에서 함께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거였다. 사람 목숨이 죽는 것에 대한 무감각. 이틀 남짓한 사이에 360명이나 되는 사람이 떼죽음을 당했는데도 나는 놀라거나 아파하지 않았다. 그저 그 비슷한 기사 가운데 하나로만 스쳐 지나갔다. 그게 과연 나만 그럴까? 아니, 사람 360명이 죽은 전투, 말이 전투이지 정황을 보면 이 또한 엄청난 화력을 쏟아 부은 학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엄청난 학살을 다룬 기사는 겨우 짤막한 단신이었다. 순식간에 360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인 일이 이제는 신문에서조차 단신으로 취급된다니……. 적어도 올 4월 팔루자 학살 때는 이렇지 않았다. 언론 가운데 적어도 몇 개 언론은 점령국가의 학살을 폭로하며 그 극악함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고, 우리는 그 소식을 접하면서 점령군에 분노했고, 이 전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침략전쟁은 반드시 끝나야만 하며 이라크 현지에서 점령군은 떠나야 한다고, 한국군이 가는 일은 더더욱 막아야 한다고 말이다.
360명. 우리가 울진 군청 앞에서 한 달을 넘게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며 그 앞을 지나는 군민들에게 받은 서명의 숫자가 910명이다. 군청 앞에서 우리가 한 달 동안 만난 사람들 수의 3분의 1이 지금 이라크에서는 순식간에 죽은 것이다. 이 엄청난 학살을, 이 끔찍한 현실을 언론에서는 겨우 단신으로 다루고 있고, 그 기사 제목을 보는 나는 벌써 이렇게나 무감각하게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동화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성수 기자의 얼굴과 한상진, 김영미 님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부디 무사하기를 빌었다. 바로 그 위에는 360명의 이라크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사가 있는데도 그건 못 본 척 지나치려 하면서 또다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지금 그곳에 있는 한국인 가운데 어느 누가 또다른 김선일이 될까 하여 걱정했지만, 이라크에는 만 명도 넘는 김선일이 죽어 가고 있었고, 이 날만 해도 360명의 김선일이 죽었다.
당장 멈춰야 한다,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
우산 농성
오늘 저녁 군청 앞 우산 농성은 승윤 스님이 나와 하시기로 했다. 오늘 단식자는 승윤 스님과 조승수 선생님, 윤희, 상렬이 그리고 나.
시간에 맞추어 책방으로 가보니 행곡에 사시는 박영숙 님이 나와 계셨다. 물품을 챙겨 군청 앞 버스정거장으로 나가니 스님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은 자리를 펴고 앉았고, 그 곁에 피켓을 들고 박영숙 님이 섰고, 또 그 곁에 내가 섰다. 조금 있으려니 한영선 선생님이 와 피켓을 들고 나란히 섰고, 우연히 버스 정거장에 나왔던 한 여학생도 그 곁으로 피켓을 들고 섰다. 아마 박영숙 님이 농사를 짓고 사는 행곡 쪽의 여학생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 마칠 무렵에는 승윤 스님의 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다는 분 한 분도 곁에 와 피켓을 드니, 오랜만에 긴 피켓 띠가 이어졌다.
이제는 저녁이면 아주 시원하다. 아직 낮 땡볕이야 뜨겁게 내리쬐지만 해가 저물 무렵이면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여름을 저만치 밀어둔다. 마음이 새롭다.
공양미 반 되
시위를 하는데 스님이 하는 농담 때문에 몇 번이나 배를 잡고 웃었다. 갑자기 스님이 가슴에 걸고 있는 피켓을 내려다보더니 “그럼 목사님이 나오시면 피켓을 새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하는 거다. 엥? 그게 무슨 말이냐 다시 물었더니 “여기에, 중이라고 써있잖아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나오면 다시 해야잖아요. 나는 중이니까 이 말이 맞는데……” 계속 모를 소리를 한다. 그러다 가만 피켓을 들여다 보니까 글귀 가운데 <저는 지금 단식 투쟁 중입니다> 라는 말이 있던 거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피켓을 들고 푸하하하하 웃었다.
하나 더. 웃음이 가시고 한참이 지나서, 스님이 또 뭔가 말씀을 하신다. 왜 우리는 맨날 반대, 반대. 전쟁반대, 파병반대, 반대만 하느냐고. 앞으로는 구호도 좀 찬성 쪽으로 하면 좋겠다는 거다. 나는 그 얘기를 사뭇 진지하게 들었다. 아, 그러네, 말이나 구호에서도 자꾸 반대 소리만 있으니 보통 이런 시민 운동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저니들은 늘 반대만 하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옆에 계신 한영선 선생님은 철군찬성 어때요? 하시며 농담을 하시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도 속으로 그거 좋으네, 철군찬성, 평화찬성, 노무현퇴진찬성… 하며 딴생각을 하는데, 스님이 나중에 했다는 말이 이거다. “아니, 자꾸 반대, 반대만 하니까 사람들이 공양미도 반 되 밖에 안 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반대라는 말 빼고 찬성 쪽으로 말을 만들면 좋겠어요.” 함께 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푸하하하하, 파하하하하, 웁파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었다.
봉평 해수욕장
시위를 마치고 물품을 정리를 한 뒤에 함께 시위를 한 분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아직도 많이 낯선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두 좋은 분들, 헤어지면서 수고했어요 한 마디가 기분을 참 좋게 한다. 전 같으면 모여서 어디 밥집으로 가 뒷풀이라도 했겠지만 이제는 바로 집으로 들어온다. 들어오는 길, 왜 그런지 계속 기분이 좋았다. 울진에서 죽변으로 넘어 오는 길에 잠깐 봉평 해수욕장에 내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손님이 오거나 하면 데리고 가서 푸아푸아 풍덩풍덩 놀던 바닷가. 잠깐 차를 세우고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고, 신과 양말을 벗었다. 이제는 바닷물이 많이 차졌을 텐데 하면서 넓은 모래밭을 걸어 들어가 살랑이는 발을 담갔다. 종아리까지 들어갔다. 아, 차다. 허리를 숙여 바닷물로 세수를 몇 번이나 하고 섰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왜 그런지 기분이 아주 좋다.
집에 들어오니 또 깜비가 문 앞에 섰다. 밥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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