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참세상자료사진] |
아침부터 비가 온다. 주춤하던 장마 전선이 다시 올라왔다. 문득 과학기술노조 한국산업기술평가원지부(산기평지부)의 천막농성장이 떠올랐다. 너무 잊고 살아왔다. 파업 100일을 맞이했을 때 찾아갔었는데, 어느새 그 절반이 또 지나가고 있다. 7월 4일 아무 준비도 없이 산기평지부를 찾아갔다. 선릉역에서 내려 50미터도 못가서 옷이 흠뻑 젖었다.
한국기술센터 앞에 천막이 서 있다. 조합원이 비를 맞으며 피켓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다. 투쟁조끼를 벗고 있어서 그런가? 대학의 교수 같기도 하고, 동네 서점주인 아저씨 같기도 하다. 인사를 하고 슬며시 말을 건넸다.
비 오는 아침
“파업이 5개월이 되어 가는데 많이 힘드시죠?”
“저희보다 더 힘들게 싸우는 사업장이 많죠.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 보면 가슴이 저려 와요.”
100일을 싸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느새 148일을 맞고 있다. 이제는 더 길게 싸우고 있는 노동자를 먼저 챙기는 여유도 갖는다.
“공공기관인 산기평지부는 노동조합 이상의 책임을 지고 있어요. 국가예산이 저희의 월급 아닙니까? 내 월급만 챙겨가겠다는 생각이었다면 파업을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백오십일을 싸우지도 못했을 것이고요. 국가과학기술의 미래가 달렸다는 의무감이 버티게 한 겁니다.”
올해 산기평이 국가로부터 받아 집행하는 돈이 2조원이 넘는다. 직원 한사람이 집행하는 돈이 200억 원에 달한다. “유혹도 생길 수 있고, 압력도 들어옵니다. 저희가 평가를 해서 연구기관과 대학 등에 나랏돈을 집행합니다. 외부의 압력에 자유로워지지 않고는 국가 예산이 엉뚱한 곳으로 새어갈 수밖에 없어요.”
2조원의 세금 헛되지 않게
파업이 길어지면서 가정형편도 엉망이다. 집에서 보는 눈도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하루빨리 파업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천막농성을 들어가기 전 조합원들끼리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 측 요구안을 일단 받아들여 단협싸움을 정리하자, 노조를 새롭게 정비하고 싸움을 준비하자는 의견도 있었죠. 토론 끝에 여기서 물러서는 것은 산기평지부의 공공성을 져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의견을 모았죠.”
토론이 끝나고 6월 21일 강남의 울창한 빌딩 숲 속에 천막을 치고 노숙에 들어갔다. 더 한층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거다.
“공공기관에서 공익을 위한 내부고발은 국민을 위한 일이고, 국가의 미래가 달린 일이죠. 특히 저희가 집행하는 돈은 국가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아닙니까?”
강남에 펼친 천막
갈등은 2002년에 국가예산 500억 원이 잘못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언론사에 조합원이 제보하면서 시작되었다. 산기평은 내부고발자를 해고하였지만, 부당해고로 판결이 나서 복직이 되었다.
“산기평은 산업자원부 산하기관입니다. 언론에 비리를 폭로하여 산자부가 곤혹스런 일을 당했죠. 이때부터 노조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지요. 산기평은 단체협약을 하향조정을 하려고 합니다. 정리해고, 징계, 파면 등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단체협약을 바꿔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내부고발을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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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평지부 조합원들은 승진을 포기한 지 오래다.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번번이 누락된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노조를 탄압할수록 노동조합 활동의 정당성을 더욱 느낀다고 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활동이 옳다고 이야기 합니다. 법원에서도 조합의 활동에 손을 들어 줍니다. 언론도 조합의 편입니다. 하지만 안에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월급 많이 받고, 내 밥벌이 안정되는 것을 더 중요시 하죠. 나랏돈이 어찌 쓰이든 내 월급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죠.”
내 밥그릇보다 소중한 거
오늘 아침에도 윤교원 산기평 원장 주재의 전 직원회의가 열렸다. “원장이 직접 나서서 노조 때문에 임금상승을 할 수없다. 산기평 예산을 줄이려고 한다. 신규 인원을 채용할 수 없다. 노조의 파업이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직장의 위기의식을 직원들에게 심어주며 모든 책임을 노조에게 돌렸다고 한다.
“노동자 간의 갈등을 일으키려는 의도죠.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노조를 고립시키려는 거예요. 직원들도 내 일자리가 위험하겠다는 의식에 쌓여갈 수밖에 없어요. 조합원과 비조합원간의 싸움을 유도하는 거예요.”
함께 동호회 활동도 하며 즐겁게 보내던 동료들이 언제부턴가 얼굴을 돌리고 인사도 하지 않을 때가 가장 힘들고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승진을 위해 조합원인 선배에게 험한 말을 할 때를 보면 분노보다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고 한다.
지난주에는 원장실이 있는 10층에서 연좌농성 중인 여성조합원을 원장이 발로 차고 지나갔다. 조합에서 찍어둔 영상물을 보면 일부러 찬 게 분명하다. 하지만 원장은 피켓이 발에 걸려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한다.
분노를 넘은 안타까움
“일부러 찬 것이든, 혹 주장대로 피켓에 걸려 그랬든, 사람이 맞았는데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맞았는데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는가? 조합과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예의마저 무시하는 행위가 아닌가?”
찍어 둔 영상물이 있는데도, 직원들에게는 여성 조합원을 내세워 헛소문을 퍼뜨린다고 주장을 하고 있단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직원이 맞았다는 조합원을 찾아와 “진짜로 맞았냐?”고 묻더란다.
여성조합원 4명은 비정규직이다. 하지만 근무년수는 모두 6년이 넘었다. 조합은 3년 간 임금을 동결할테니 그 돈으로 비정규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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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를 동결한 재원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하자고 하니 어떤 대답이 돌아온 줄 압니까? 임금동결은 하겠다, 하지만 거기에서 적립된 돈은 우리 멋대로 쓰겠다, 그리고 과기노조원들만 임금동결해라,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어디 조합과 대화를 하겠다는 자세입니까?”
대화인가 장난인가
조합이 파업을 선택하고,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물러설 수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바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공공기관의 공익성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데, 윤교원 원장은 장난처럼 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적 신뢰가 간다면 단체협약이 하향이 되어 조합이 불리해지더라도 감수할 겁니다. 하지만 신뢰를 할 수가 없어요. 믿을 수 없으니 문서로 못을 박아야 합니다.”
산기평지부가 다 양보해도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내부고발 등의 이유로 해고를 했더라도 부당해고 판결이 나면 원상회복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요구이다.
“먼저 잘못된 부분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잘못의 제공자를 징계를 해야 하는 게 맞는 거고요. 이로 발생된 소송비용등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소송비용도 국민의 세금 아닙니까?”
당연한 5대 요구
부당해고 판결을 받아 복직된 조합원의 인사카드에 아직 해고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법원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아 복직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재입사로 되어 있어요. 이건 당연히 바꿔야죠. 마지막 요구가 인사상의 불이익을 막자는 거예요. 바로 공익을 위한 내부고발을 활성하기는커녕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게 저희의 요구입니다. 단체협약이 하향되더라도 이 부분은 꼭 지켜져야 합니다.”
산기평지회가 파업을 하는 까닭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또한 윤교원 원장이 이 요구를 듣지 않는 것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왜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지 그 속셈이 의심스럽다.
의심스러운 사람들
산업자원부도 마찬가지다. 윤교원 원장의 오늘 직원 앞에서 한 연설에 따르면, 산자부가 노조를 이유로 산기평의 예산을 축소하려는 것이다. 단체협약의 하향조정 요구도 산자부의 입김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왜 일까? 2002년과 같이 산자부의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 일까? 산자부는 산기평을 정부부처로서 관리감독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배후조정을 하는 것인가?
과기노조의 간부는 “아무리 봐도 공공기관의 노조인 산기평지부에 상을 주고, 칭찬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회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공공성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과기노조는 자신의 밥그릇마저 포기하며, 공공성을 지키겠다는 의로운 싸움입니다”고 말을 한다.
석, 박사들의 파업이 100일 하고도 50일이 되어간다. 이유 있는 파업. 정부가 나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산기평지부 조합원 얼굴을 보고 돌아서면 기분이 좋다. 모두들 얼굴이 닮았다. 거짓말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듯한 순수함에 순진함마저 깃든다. 억센 팔뚝이 아닌 순수함에서 나오는 파업의 힘을 막을 길이 없다.
돌아오는 길, 비가 그쳤다. 비 오는 아침 나도 몰래 이곳을 찾은 이유를 알겠다. 아직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