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의 경계, 그 끝에는 뭐가 있을까"

[기고] ‘노동문학’이라는 애물단지

소설 쓰는 사람

가끔 뜻하지 않게 생소한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할 경우가 있다. 때로는 문학 강의를 부탁 받고 청소년이나 중고생, 대학생, 직장인들이나 주부들 앞에 서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특정 다수 앞에서 나를 소개할 때마다 어색하고 불편할 때가 참 많다. 나도 모르게 어눌해지고, 목소리도 기어들어가고, 우물쭈물 뭉개듯 더듬거리게 된다.

“소설 쓰는... 김하경이라고 합니다.”

‘소설가’라는 짧은 명칭이 있는데 굳이 성가시게‘소설 쓰는 사람’이라는 긴 단어를 사용하는 건 어쩌면 일종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소설가’하면 어쩐지 소설 써서 밥 벌어먹고 사는 직업인인 것처럼 들리는데, 실제로 나는 소설을 쓰긴 하지만 그 소설로 밥을 벌어먹고 살지는 못하니 자격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소개하고 나면 그 다음 이어지는 사람들 반응이 재밌다.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면서 금새 표정이 환하게 바뀐다. ‘김하경이라? 김하경? 이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사람들 머리에 입력된 작가의 이름이라 봤자 열 손가락을 꼽아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적다. 그런데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제서야 사람들은 눈치를 챈다. ‘혹시 무명씨?’순간 실망하는 기색이 스친다. 그렇다고 단박에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면 이만저만 실례가 아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무명작가도 작가니까. 문화인답게 예의와 품위를 지켜야지.

사실 몇몇 유명작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돈 없고 권력 없는 한마디로 개털 신세라 할 수있다. 이런 개털에게는 한없이 모질고 각박한 게 세상인심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작가라고 하면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하거나 막 대하지 않는다. 보통은 먹물 비스름하게 취급을 한다. 그렇다고 칼보다 더 강한 펜의 힘, 뭐 이런 정도의 파워를 의미하는 건 아닐 거고, 그저 혹시나 나중에 아쉬울 때 써먹을 구석이 손톱만큼은 있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배려일 게다. 어쨌든 글쟁이들에게도 일정 정도의 사회적 지위라는 게 있긴 있는지,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인간적 대우를 받으니 참 복 받은 직업이 아닐 수 없다. 고마운 줄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나 같은 생면부지의 무명작가에게도 비록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한마디 멘트를 날리는 걸 잊지 않는다.

“소설가란 분을 직접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여기서 일단 그치면 아무 걱정이 없다. 그런데 좀 더 진도가 나가게 되면 그때부터가 문제다.

노동문학이라는 것.....

“주로 어떤 내용의 소설을 쓰시나요?”
“혹시 쓰신 책이 있으면, 책 제목 좀 알려주시죠.”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정말 난감해진다. 내가 쓴 소설이래야 하나 같이 노동소설 아니면 이른바 운동권 소설인데 사람들이 알리도 없고 좋아할 리도 없다. 그래서 잠시 멈칫하게 된다.

언젠가 중산층 주부들 앞에서 “아직 나온 책이 없다.”고 슬쩍 말을 둘러댄 적이 있다. 그러자 한 주부가 이렇게 눈물겨운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닌가.

“아직 습작 중이시구나. 많이 힘들겠어요. 제가 유명한 글쓰기 지도 선생님을 잘 아는데, 등단한 시인이시거든요. 소개해드릴까요?”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웃고 넘어간 걸로 안다. 어쨌든 그 때 이후로는 솔직하게 책 제목을 대답하고 무슨 내용인지도 다 말해주었다.

사실 작가라면 사람들이 자기 작품에 관심을 보이면 기분이 좋은 게 인지상정이다. 어떻게든 호감을 사고 점수를 따두려고 작품 선전에 열을 올리는 게 자연스런 일이다. 책도 팔고 팬도 더 많이 생길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말이다. 자청해서 사인회도 열고 독자와의 대화시간도 만드는 판인데, 안 그렇겠나.

근데 난 그렇지가 않다. 난감하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진땀이 흐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주눅이 들고 죄진 사람처럼 쩔쩔 맨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소심증 환자는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조합 간부나 활동가, 혹은 같은 노동문학 문우들과 만날 때는 전혀 딴판이 된다. 아는 거 모르는 거 다 동원해서 소설이 어쩌구 문학이 저쩌구 하며 잘도 떠든다. 재미있게 좌중을 웃길 줄도 안다. 단지 일반 사람들 앞에만 서면 입이 잘 안 떨어진다. 말 못할 과거라도 가진 사람처럼 전전긍긍한다. 이상한 일이다.

“노동자나 빈민의 삶과 투쟁을 다룬 소설을 씁니다.”

왜 이 한마디가 그렇게 하기 힘들까? 곰곰 생각해보면 이 말을 하고났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두려워서 그런 거 같다. 지금은 그런 반응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예전엔 그게 마음의 큰 상처로 남았다. 불에 데본 사람이 불 얘기만 꺼내도 겁에 질리듯 두려워했다.

노동자나 빈민들의 삶과 투쟁을 다루는 소설을 쓴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문다. 주위는 물 끼얹듯 조용해지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는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피하고, 대화는 어색해지고 서먹서먹해진다. 그럴 때의 막막함이란....그 기분을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다. 갑자기 적진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이랄까? 이해받지 못하는 자의 슬픔이랄까? 그 순간 나는 감을 잡았다. 나는 더 이상 낭만적 소설가가 아니라,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팔뚝을 힘차게 뻗으며 행진곡풍의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여자 전사로 변해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사람들은 노동문학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걔 중에는 화를 내며 공격을 하기도 한다.

“그런 소설 써서 밥 벌어먹을 수 있나요?” 정도는 약과고,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 아닙니까. 자꾸 임금 올리면 경쟁이 되겠습니까?”에 이르기까지, 아픈 데만 찔러가며 노골적으로 공격수위를 높이다가 급기야는 사회주의 체제 논쟁을 벌이자고 덤비기도 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우연히 만나 가볍게 친분을 쌓는 정도의 자리에서까지 굳이 정치적 사회적 대립의 각을 세우며 티격태격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또 그렇게 핏대를 세운다고 그들이 내 소설에 동조해줄 것 같지도 않고, 생각이 달라질 리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들의 생각을 바꿔낼 능력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외면당하고 거부당하는 아픈 경험을 한두 번 더 겪고 나자, 나는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침묵과 웃음으로 대신하거나, 거짓말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조금씩 아픈 상처를 잊고 싶었다. 상처를 상기시키는 기회를 될수록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아예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가 먼저 알아서 입막음을 했다.

“이름 말해줘도 잘 모르실 걸요. 삼류 무명작가라서요....그냥 이것저것 쓰죠 뭐.....읽지 마세요. 재미도 없고....잘 팔리지도 않는 소설인 걸요 뭐.”

가장된 겸손과 자조 섞인 이런 말투는 두려움과 상처를 치유하는데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더 이런 내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나치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건 아닌가. 아니면 소신이 없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남의 눈이나 의식하면서, 소신도 없이 글을 써온 거나 마찬가지다. 기가 막혔다. 이제부터라도 당당해지자. 소신을 갖자. 그래서 변명이 아니라 절박하게 이런 연유로 노동문학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리하면 할수록 더 헷갈리고 혼란스러워졌다. 역량부족도 반성할 만큼 했고(지금도 반성 중), 새 길 찾기 노력도 할 만큼 했고(지금도 노력 중), 상업주의 자본주의 문학에 대한 맹목적 쏠림도 비판할 만큼 했다. 그렇게 할 만큼 했지만 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답보다 더한 교훈을 얻었으니 그것은 바로 ‘성찰의 귀중함’이었다.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상처와 아픔은 저절로 치유되었다.

종교인 가운데는 이 세상엔 오직 두 부류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이렇게 두 편으로 세상을 나누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을 미워하고 폄하하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뭉쳐 사는 종교인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종교인들을 또라이라고 손가락질한다.

극단적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내가 혹시 이런 종교인들과 닮은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웠다. 그런 의구심을 갖고 노동문학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비록 내 본의는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타인들 눈에는 그런 종교인들처럼 비쳤거나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보통 문인들 입장에서 보면, 노동소설가니 노동시인이니 하는 호칭 자체가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호칭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패거리를 나누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 노동문학 이론을 주장하다보면 자연히 노동문학이 아닌 문학과의 차이점을 증폭시키면서 강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옳고그름 맞고틀림을 따지면서 결국 노동문학이 더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겠는가. 상대 입장에서 보면 가만히 앉아서 비교 당하고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취급당하게 되니 얼마나 기분이 상하겠는가.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역지사지를 통해서 비로소 나 아닌 네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노동문학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비로소 다른 사람, 다른 생각과 삶, 다른 문학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상대가 되어서, 상대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혹시나 마음속으로 나와 다른 사람, 다른 생각과 삶, 다른 문학을 차별하지는 않았는지, 나만 내 생각과 삶만 내 문학만이 옳고 맞고 진짜고, 다른 사람 다른 생각과 삶 다른 문학은 잘못이고 틀리고 가짜라는 뒤틀린 우월감을 잠재의식 속에 숨기고 있지는 않았는지, 전지전능한 신처럼 내 판단만이 옳다고 맞다고 진짜라고 우기면서 내 판단을 믿고 따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는지...이런 의구심을 갖고 돌아보는 동안 어느 사이에, 내 속에 다른 사람, 다른 생각과 삶, 다른 문학이 들어왔다.

사실 노동문학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다른 이름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꼭 짚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그런 이미지로 알아듣고 통용되어왔다. 처음 ‘노동문학’이란 단어가 나올 때부터 그랬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었고, 리얼리즘이라는 전문 외국어를 사용하는 게 좀 거시기한 점도 있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이름이 ‘노동문학’이었다. 그러니까 ‘노동문학’은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노동문학을 거부하고 불편해하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성 때문에 싫어한다면,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인정이 되었다. 나아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젠 사람들의 반응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예전에는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에서 갑자기 가해자로 둔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나의 두려움과 상처가 눈 녹듯 사라졌다. 마치 엄청난 위로를 받은 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생각만 바꾸었을 뿐인데, 저절로 치유가 되다니! ‘성찰의 귀중함’을 깨친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후 노동문학이라는 용어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에 대해 알게 되고, 시애틀에서 벌어진 세계민중연대의 힘을 보면서, 회의는 점점 새로운 생각으로 변해갔다.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

자본과 시장은 국가 민족 계급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를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에 대항하는 민중들 역시 국가 민족 계급의 경계를 허물고 넘어 전 지구적으로 세계민중과 함께 연대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하여 민중의 세계연대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연대의 논리는 아주 단순했다. 경계 안에 갇히지 말고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자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엇을 지향하느냐 즉 지향점이 같은 사람들끼리 뭉치는 연대였다, 하지만 21세기의 연대는 그와 다르다. 무엇에 반대하느냐 즉 반대의 대상이 같은 사람들끼리 뭉치는 연대다. 다시 말하면 지향하는 사회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를 따지는 연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냐 찬성하냐를 따져 연대하는 것이다. 국가 민족 계급은 아무 상관없다. 오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냐 아니냐로 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노동문학에 대입해 말하면 이렇게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다른 문학사상을 지향하느냐로 노동문학이나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냐 아니냐로 구분하는 식이다. 지향점이 아니라 반대의 대상이 무엇이냐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경숙의 <외딴방>도 노동소설이 될 수 있고, 노동자가 주인공이기만 해도 노동현장을 배경으로 삼기만 해도 다 노동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노동자나 노동현장이 하나도 안 나와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기만 하면 무조건 노동문학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노동문학의 스펙트럼을 무한대로 넓히면 어떻게 될까. 경계의 끝까지 확장하면 그 끝은 어디가 될까. 그 끝에는 뭐가 있을까.

감히 단언하건데, 그 끝에도 여전히 인간과 인간의 삶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경계를 짓든 안 짓든 문학이 인간과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을 거란 말이다. 이 세상 그 무엇(돈, 권력, 이데올로기, 신... 등)도 인간이나 인간의 삶보다 더 위가 될 수 없다. 인간이나 인간의 삶을 지배하거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 그 무엇 역시 인간이나 인간의 삶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문학을 돌아보고 정리한 결론은 그냥 ‘문학’이란 두 글자뿐이었다. 그 앞에 어떤 수식어도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문학’이라고만 부르고 싶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인가? 아니면 최선의 발전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한국 노동문학의 나이라고 해봤자 이제 갓 20살이 될까 말까다. 그나마 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10년은 작품 발표도 거의 없었다. 식물인간처럼 겨우 숨만 쉬고 있다고나 할까? 하긴 언제 진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다룬 노동문학 작품이 나온 적이 있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아무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노동자가 등장하고,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투쟁하는 이야기는 나왔지만, 진짜 사회주의 리얼리즘까지 간 작품은 해방이전에도 없고 해방이후에도 없다. 세계문학사에도 스탈린 시대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그 이유가 뭘까? 아직 때가 안 되서? 노력과 역량이 부족해서? 아니다. 세계적인 노동소설의 걸작으로 알려진 <제르미날>도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소설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나는 감히 제안하고 싶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경계를 허물자고. 그 협소한 틀이 노동문학의 숨통을 죄고, 생명력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내가 아는 거라곤 앞으로도 무수한 헛발질과 밤샘 노동이 계속될 거라는 사실뿐이다. 정답은 아마도 앞으로 흘릴 눈물과 피땀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끝.
덧붙이는 말

김하경 님은 1988년 [실천문학]』봄호 단편 <전령>으로 문단에 등단.
쓴 책으로
교육평론 <여교사일기> 1978 [주간시민사] ( [주간시민]에 1976-1977 연재)
장편 <그해 여름>1991, [도서출판 세계]
꽁트집 <호루라기>1992, [과학과 사상]([전국노동자신문]에 1991-1992 연재한 꽁트 모음집)
장편 <눈뜨는 사람> 상하권 1994, [일터와 사람]
노동운동사 <내사랑 마창노련>상하권 1999, [갈무리]
꽁트집 <숭어의꿈> 2003.3 [갈무리]
소설집 <속된인생> 2006 [삶이 보이는 창]
그밖에 시사글, 꽁트(연재), 노동자면담기(연재)가 있음.
그리고 1994년 10월 31일 마창노동소설모음집 <그래! 다시 하는 거야>를 엮음.
등이 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김하경(소설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청춘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고지식히게 사시는 것 같네요. 다음에 꼭 한번 연락드리겟습니다

  • 학생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