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한 가운데 한국정부가 "지금 납치단체들은 우리 국민 석방 조건으로 수감자 석방과 맞교환을 요구하고 있다"고 공식 확인하며 "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청와대와 외교통상부 등 한국정부는 납치단체의 요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함구해왔다. 정부는 그간 "협상에 도움이 안 된다"며 "납치단체의 요구가 무엇인지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31일 외교통상부가 브리핑을 통해 심성민 씨의 피살 사실을 확인한 직후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을 통해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정부는 성명에서 납치단체로 알려진 탈레반 측의 '수감자-인질 맞교환' 요구와 관련해 "한국정부가 아프간 정부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에는 한계가 있다"며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라고 밝혔다.
"아프간 정부가 키 쥐고 있어"
탈레반 측의 요구에 대해 한국정부가 이처럼 직접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그 입장표명은 '더 이상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자포자기 선언으로 읽힌다. 그러면서 정부는 공을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로 넘기는 분위기다.
천호선 대변인은 "이번 성명 발표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는 한편, 무장단체 측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내는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천호선 대변인은 또 "탈레반 수감자 문제는 아프간 정부가 키를 쥐고 있다"고 재차 아프가니스탄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수감자 석방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지만, 현실과 원칙 사이에서 고충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독자적 권한 없다"
한편,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천 대변인은 말을 아끼고 있는 미국정부와 관련해 "미국이 (탈레반 수감자)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독자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미국정부의 역할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천 대변인의 반응과 달리 이날 정부는 성명에서 "인질 문제 해결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견지해온 원칙적 입장을 잘 알고 있다"며 "소중한 민간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원칙적 입장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은 인도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호소했다.
에둘러 '국제사회', '원칙적 입장' 등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상 '테러조직과의 협상은 없다'고 버티고 서 있는 미국에 대한 호소의 메시지로 읽히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그만큼 미국정부의 대응 또한 이번 피랍사태 해결을 위한 주요 변수임을 인정한 것.
정부, 빠져나갈 구멍 찾나?
이날 성명에는 현재 시점에서 한국정부가 이번 피랍사태의 각 관련당사국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키를 쥐고 있다'는 천 대변인의 표현에서 보여지 듯 한국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사태 해결의 열쇠를 전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듯 하다. 그 다음으로 미국인데, 미국에 대한 판단은 약간 다르다. 미국에 대해서는 "독자적 권한이 없다"면서도 '유연하게 대응해줄 것'을 호소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역할의 무게를 한국정부가 다르게 설정하고 있는 것.
물론 탈레반에 대해서는 '한국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발을 빼면서도, "또 다시 우리 국민의 인명을 해치는 행위가 일어나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드시 우리 국민들의 희생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력 경고했다.
한국정부가 관련당사국들에 대한 역할론에 층위를 두는 것은, 이번 사태가 장기화되며 희생자가 계속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사태 해결을 위한 역할의 무게감이 다른 만큼, 비극적 결과에 대한 책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정부의 인식대로라면 이번 사태의 책임은 탈레반, 아프가니스탄 정부, 미국 그리고 한국정부 순으로 떠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