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선진화에 날개 달아 준 '필수유지업무'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 무력화 1등 공신, "한꺼번에 해야 파업가능"

이명박 대통령의 ‘한판 승’?

서울지하철노조와 운수노조 철도본부의 파업이 결국 불발로 돌아갔다.

철도본부는 파업을 8시간 앞둔 19일 밤 11시 30분 △2008년 임금 정부 공기업 지침 수용 △해고자 복직을 비롯한 단체교섭 사안 내년 논의 등을 합의했다. 이 안은 쟁의대책위원회에서 부결되었으나 철도본부는 결국 파업을 유보했다. 철도본부의 합의에 조합원들은 “아무것도 따낸 것이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도 파업 예고 시각 1시간을 앞두고 파업을 철회했다. 노사 간 핵심 쟁점이었던 외주화에 대해서 “노사 간 성실한 ‘협의’를 거치는 것” 정도로 서울지하철노조는 서울메트로와 합의문을 작성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미흡하지만 사측이 전향적 입장을 표명한 만큼, 추후 대화와 교섭으로 문제 해결에 역점을 둘 것”이라고 이번 합의를 평가했지만 ‘협의’ 수준의 이번 합의가 과연 앞으로 진행될 외주화와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잠정합의안에 실망하는 철도본부 조합원/참세상 자료사진

이번 서울지하철노조와 철도본부의 파업은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공기업 선진화’라 불리는 공기업 사유화 정책에 맞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첫 파업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결국 이명박 정부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이에 앞으로 이명박 정부의 각종 공기업 구조조정과 사유화 정책에 맞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싸움에도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냥 대통령이 ‘불법’이라고 하면 ‘불법’이 되는 세상

이명박 대통령은 철도본부와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 예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에서까지 이명박 대통령은 “불법파업을 엄격한 법으로 다스리겠다”라고 엄포를 놨다. 철도본부와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은 필수유지업무를 지키는 법적으로 보장된 ‘합법파업’임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법’이라는 규정을 서슴없이 내리면서 노동자들을 협박했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노동부 관계자들까지 나서 “대통령의 발언은 가정법”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검찰청과 경찰청은 “불법파업에 해당할 소지가 다분하다”라는 추측성 발언을 쏟아냈고, 이를 인용한 거대 언론들에 의해 철도본부와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은 이미 ‘불법파업’이 되어 버렸다. 이런 ‘불법’ 공세에 파업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의 행동반경은 당연히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필수유지업무제도 보다 차라리 직권중재가 낫다”

하지만 이런 이명박 대통령의 허튼 소리가 아니더라도 올 해부터 시행된 필수유지업무는 철도와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미 무력화 시켰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조건’ 불법화 시켰던 직권중재를 없애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보장한다며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필수유지업무는 사측의 일방 조정신청으로 노동위원회가 강제 중재할 수 있도록 해 오히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노동위원회가 내놓고 있는 필수유지업무 유지율 강제조정안은 대부분 50%를 넘기는 것은 물론 100%를 유지하라고 까지 한다.

이와 같은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 조정법 개정안 시행 이후 첫 강제조정 사례인 도시철도노조 조정안에서는 출퇴근시간대 100%, 나머지 시간대는 79.8%를 유지하라고 나왔다. 서울지하철노조도 출퇴근시간대 100%의 업무를 유지해야 했다. 철도본부의 경우도 50%를 넘기는 필수유지업무 유지율 결정이 내려왔다. 여기에 관련법에서 사측은 파업조합원의 50%까지 대체근로를 투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사실상 파업은 그 효과를 낼 수 없다. 자고로 파업이 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조합원들이 파업에 들어갔을 시 그 업무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어야 하는 것인데 필수유지업무와 대체근로투입 등으로 해당 업무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니 효과를 낼 수없는 것이다.

  노조에게 합법파업의 길을 열어준다던 필수유지업무가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 하는 것은 물론 노사 간, 노노 간 갈등을 부축이고 있다./참세상 자료사진

결국 업무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니 사측이 성실하게 교섭에 임할 리 없는 것이다. 사측은 직권중재가 살아있을 때는 노동위원회가 직권중재를 내려줘 ‘불법파업’이 되길 기다리고, 이제는 노동위원회가 필수유지업무 유지율을 100%로 내려주길 기다리면 되는 꼴이다.

필수유지업무의 규정을 받는 필수공익사업장은 철도 및 도시철도, 항공운수, 수도, 전기, 가스, 석유, 병원, 혈액공급, 한국은행, 통신, 우정사업 등 공공부문 업무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상윤 공공운수연맹 정책위원장은 “오히려 직권중재가 낫다는 소리까지 나온다”라며 “형식적으로만 합법파업의 길을 연 빛 좋은 개살구이며 당연히 폐기되어야 할 악법”이라고 지적했다.

파업 무력화는 물론 노동조합을 무기력하게...“필수공익사업장 한꺼번에 파업해야”

필수유지업무제도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화 시킨 것은 물론 조합원 간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필수유지업무를 할 인원을 조합원 중 지목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가 파업시기 필수유지업무를 할 것이냐를 놓고 노조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 또한 필수유지업무 이행에 대한 책임도 해당 조합원 개인에게 묻도록 되어 있어 갈등은 더욱 심각하다. 이에 노조의 조직력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상윤 정책위원장은 “예전에는 노조 집행부가 결단해서 불법을 감수하는 방식으로 파업을 해왔었는데 이제 집행부의 결단으로도 파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필수유지업무가 파업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물론 조합원들 사이의 갈등까지 야기하면서 단위사업장 차원의 파업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나상윤 정책위원장은 “그렇다면 방법은 필수공익사업장 노동자들이 다 같이 한꺼번에 파업을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까. [출처: 철도본부]

오는 12월에는 정부의 ‘4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이 발표될 예정이다. 3차 방안을 발표하며 배국관 기획재정부 차관은 “4차 방안은 경영효율화에 초점을 맞춰, 각 기관별로 효율성 10% 이상 향상을 목표로 연말까지 경영효율화 계획을 수립해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가 말한 효율성 10% 향상은 인력감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인력감축의 규모에 대해 배국환 차관은 “우선 45개 기관에서 (노동자들이) 빠져 나갈 것이고 정확한 숫자는 더해봐야 할 것”이라며 “(4차에 발표할) 경영효율화를 통해 각 기관별로 전부 다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추정이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실제 4차 방안에 발표되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대규모 실직사태가 예상된다. 하지만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파업 한 번 못해보고 차가운 겨울, 거리로 쫓겨날 가능성은 더욱 더 높아졌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야심작 ‘공기업 선진화’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