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공단의 변화와 허물어가는 박정희 신화

[워커스 인권의 장소] 노동조합의 닻을 놓칠 수 없는 노동자들

[출처: 김용욱]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KTX로김천구미역까지 서울에서 1시간 반, 역에서 자동차로 30분이면 구미공단에 도착한다. 기술과 운송수단의 발달로 우리의 거리감각은 시간감각과 뒤섞이곤 한다. KTX김천구미역에서 민주노총 경북본부 배태선 교육국장을 만나 구미공단으로 향했다.

구미IC를 지나니 작은 강 너머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가 나온다. 어느 산업단지 못지않게 넓고 깨끗한 도로와 공장건물들이 보인다. ‘박정희 체육관’이라는 표지 맞은편에 있는 KEC공장으로 향했다.

구미공단은 1969년부터 구미국가산업단지(이하 구미산단)가 조성돼 산단이 5개나 된다. 울산, 창원에 이어 3번째로 큰 공단이다. 2020년 5산단(283만평)이 완공되면 전국최대규모 산단이 된다. 1973년에 조성이 완료된 1산단은 코오롱, 금강화섬, 동국합섬 등 대규모 섬유업체가 들어왔다. 그 후 금성(지금의 LG), 삼성, 대우 등 전자업종 대기업이 잇따라 왔다. 1982년 2산단이 완공되고 주요 수출품이 컬러TV로 바뀌면서 반도체와 통신기기 등 첨단산업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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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와 공장해외이전 등이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산단조성은 끊이지 않았다. ‘텅텅 비는 공단’이란 수식어가 구미공단에 붙을 정도지만 구미시는 산단을 계속 조성했다. 내년 완공 예정인 구미5산단 조성에 구미시는 2008년부터 1조5천억 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분양률은 15%다. 경기침체라며 노동자들을 정리해고로 쫓아내면서도 산업단지 건설이라니. 경제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산단조성으로 이익을 볼 수 있는 건 건설자본뿐이다. 그래서 무리한 산단조성사업에 대한 비판은 지난 지방선거의 주요 화두였다.

산단을 계속 만들던 정부는 공장이 텅텅 빈다며 ‘구조고도화’라는 이름으로 부동산 투기를 부추겼다. 구조고도화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내쫓으려 했던 곳이 바로 구미산단 입주 1호 기업인 KEC다. 공장 유휴부지에 백화점과 호텔 등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마침 차가 KEC앞에 도착했다. 공장 안 풍경은 마치 산책로 같았다. 공장 정문부터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두 줄로 이어졌다. 이곳에 백화점을 세우겠다는 것이구나. 배태선 국장의 말에 따르면 재일교포 출신의 창업주가 ‘한국도시바’를 세울 때 박정희로부터 헐값에 넓은 부지를 얻은 덕이라고 했다.

[출처: 김용욱]

“당시 평당 150원에 20만평을 수용했는데 지금은 평당 300만 원이에요. 그래서 시민들이 구조고도화반대투쟁을 할 때 굉장히 공분했어요. 자기 땅이 수용된 사람들은 화가 나는 거지. 150원에 수용됐는데 이제는 회사가 백화점을 세워서 떼돈을 벌겠단 거잖아요.”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일단 KEC의 매각과 구조고도화는 막아냈다. 2010년부터 시작된 회사의 노조탄압이 사실은 구조고도화로 돈을 벌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배 국장의 말에 따르면, 2010년 공장 폐쇄 전후로 수차례 ‘대구경북 지역의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열렸고, 공장부지를 팔려면 노동자들을 정리해야 하니 노조무력화를 한 것이다. KEC 사측이 22년간 지속된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깬 이유는 땅투기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출처: 김용욱]

여성, 노동조합의 중심으로 들어가다

이종희 KEC 지회장이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 것도 2010년 6월 30일 용역경비 400명을 동원한 노조탄압 이후라고 했다.

“그때 전 기숙사에 6년 살다가 회사 앞에서 자취하던 때였어요. 새벽에 용역깡패가 쳐들어왔다는 전화를 받고 공장 앞으로 슬리퍼 신고 막 뛰어갔는데 언니들이 옷도 못 챙기고 쫓겨나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항의하니까 용역깡패들이 소화기를 뿌렸어요. 언니들한테 들었는데 저희보다 덩치가 두세 배나 큰 검은 옷의 남자들이 자고 있는데 물밀 듯이 들어왔대요. 문 열고 ‘너희 다 나가’ 외쳤대요. 기숙사에서 속옷 입고 자고 있는데 새벽에 갑자기 침탈했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떤 사람은 벌벌 떨며 갇혀 있고, 어떤 사람은 안 나간다니까 가슴 잡혀서 끌려 나오고 아수라장이었대요. 정말 처참했어요. 암담하고 눈물도 나고. 아직도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왜 남자기숙사가 아니라 여자기숙사였던 것일까. 당시 기숙사에 여성들이 많았고 남자기숙사보다 여자기숙사가 정문에서 더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79년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농성 때 자행된 경찰폭력이 떠올랐다. 국가권력과 비슷하게 자본의 폭력도 성별화 돼 작동한다. 여성노동자들은 물리적으로 제압하기도 쉽고, 공포를 이용하면 다시는 노조활동을 못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력 감축 때도 노조탄압을 위해 남자관리자 수는 줄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계산을 여성노동자들이 뒤집어 놓았다. 여성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파업투쟁을 했다.

[출처: 김용욱]

그 결과 작년 KEC노조 최초로 여성 대표자가 나왔다. 금속노조 구미지부 KEC 이종희 지회장은 노조원들의 마음이 모아진 결과라 했다. 2010년 이전까지는 노조사무실에 여성들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고 했다. 노조의 여성간부도 총무부나 여성부에 한정돼 있었다. 물론 KEC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노조일지라도 노동조합의 남성중심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노조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전 노조 임원들 모두 같았어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어용노조에 젊은 사람들도 있었고요. 노조에서는 제가 젊은 축에 속하니까 여성지회장이 된 거예요. 여성지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걸 폭넓게 하면서 조직 확대도 이루고 싶어요.”

이전에는 여성대의원이 한명도 없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대의원 대부분이 여성이고 수석부지회장도 여성이다. 특히 올해 KEC는 회사의 성차별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KEC는 입사 때부터 여성보다 남성이 한 단계 위 직급으로 시작한다. 여성의 승진은 J등급에서 멈춘다. 18년째 일한 이미옥 수석은 동일하게 입사한 남성동기보다 승진이 느려 임금격차가 50만 원이나 된다. 2017년 KEC 남성 평균임금은 5,318만 원, 여성은 3,367만 원으로 임금격차는 2,000만 원에 육박한다. 대대적인 언론보도에도 회사는 여전히 성차별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싸워야 할 일이 많다. 그래서일까, 이 지회장은 노동자에게 인권의 장소는 ‘노동조합’이 아니겠냐고 했다.

텅빈 공장, 그래도 여전히 수출 3위 공단

우리는 KEC를 나와 금강화섬이 있는 공장으로 향했다. 금강화섬은 2005년부터 빈 공장이다. 배 국장은 구미공단의 노동운동은 IMF 이후 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많은 업체들이 부지를 팔고 공장을 이전하거나 폐업을 했기에 그만큼 싸움이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원사를 만드는 3대 업체인 한국합섬, 금강화섬, 코오롱의 투쟁이 다 그랬다.

그는 1999년 10월 금강화섬 노조가 만들어지고 처절하게 싸웠던 때를 얘기했다. “그 전에는 신평로터리 앞 야은로에 노동자들이 모이면 기본 1800명”이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87년 이후 노조가 구미에 대거 결성돼, 90년대 민주노총 조합원이 1만 2000명이었는데 공장이전과 폐업 등으로 지금은 3천명이다. 대부분 한국노총 사업장이지만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지금은 아사히글라스 같은 비정규직들이 노조운동의 활기를 이어가고 있다. 차헌호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은 금강화섬 출신이다.

[출처: 김용욱]

공장에 도착하니 공장문이 열려있다. 공장부지를 사러오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 듯했다. 기계가 사라진 공장은 노동의 기억을 소환하려는 듯 작은 소음에도 크게 반사음을 질렀다. 한국화섬 옆이 408일 굴뚝농성을 한 차광호가 있었던 스타케미칼 공장이다. 지금은 스타케미칼 자회사 파인텍의 박준호, 홍기탁 노동자가 서울 목동에너지공사 굴뚝에서 1년째 농성을 하고 있다. 스타케미칼을 인수한 스타플렉스는 파인텍이라는 유령회사를 지어놓고 노동자를 기만하더니 공장 기계마저 팔아버렸다. 차광호가 농성한 굴뚝은 폭파돼버렸고 공장을 부분매각했는지 부지 중간에 도로를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투쟁의 흔적이라곤 벽에 굴뚝농성을 지지하는 글뿐이다.

텅 빈 공장은 땅 투기와 기업매각으로 돈을 벌려는 투기자본의 단면이었다. 2017년 구미공단 수출액은 283억1800만 달러로 제조업 분야 수출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녹록치 않다. 2000년대 이후 수출 1위에서 3위로 밀려난 것만 강조한다. 여느 공단처럼 구미시도 노동자들의 도시지만 정치인들은 기업주를 위한 정책에 힘을 쓴다. 배 국장은 구미는 노동자의 도시라며, 올해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에 대한 선전홍보물을 돌렸을 때도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받아갔다고 했다.

[출처: 김용욱]

텅 빈 박정희 생가, 허물어가는 이미지 정치

우리는 구미 참여연대 김병철 사무국장을 만나 박정희 생가가 있는 상모동으로 갔다. 도로 이름도 ‘박정희로’로 바뀌어 있는 그곳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평일이라 그럴 수 있을 테지만 특별한 날은 다르지 않을까. 어제 이곳에 왔다던 김 국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제가 박정희 탄신일이라고 박근혜 지지자들이 모였는데 그리 많지 않았어요. 230대가 들어가는 새마을 테마공원 기념관 지하주차장에 제 차까지 포함해서 19대가 전부였어요. 이렇게 9백억 들여서 전시했는데 내용물도 없고 관광객도 없어요. 박정희를 우상화 하려고 하지만 구미시에서도 먹히지 않는 거죠. 세금 들여서 이 정도밖에 못했으니 스스로 공개하기도 부끄러웠을 거예요.”

탄신일이라니, 흡사 우상화가 얼마나 심한지 이름에서도 드러났다. 박정희 생가에는 박정희의 업적이라는 새마을운동과 경부고속도로 등이 사진과 글로 전시돼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모습을 실물크기로 뽑아 세워놓았다. 근대 산업화구축이 다 박정희의 성과라고 칭송했다.

생가를 지나 새마을테마공원으로 가는 길에 우상화의 상징인 박정희 동상이 보였다. 동상은 고개가 꺾일 정도로 꽤 컸다. 테마공원에 있는 건물은 웅장하나 전시물은 박정희 생가에서 본 것을 재탕 삼탕하는 수준이었다. 세금 900억이 아까웠다. 구미시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 많고 평균연령 37세의 젊은 도시이다. 여기서 ‘박정희 팔이’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지난 선거에선 경북지역 최초로 민주당 시장이 당선됐다.

허물어가는 박정희 신화를 공단 노동자들이 무엇으로 채울지 상상해본다. KEC 여성노동자들,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공단의 미래.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것은 노동자의 감각이 기업주의 경제논리에 혼탁해지지 않는 것. 그리고 더 이상 거리로 쫓겨나지 않도록 힘 모아 싸우는 길, 그 위에 있지 않을까.[워커스 49호]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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