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해서

채만수(노동이론정책 연구소 소장)

보도에 의하면,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것이 최근의 경제적 상황 및 동향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주요 인식의 하나인 것 같다. 그것이 고용을 수반한 것이든 아니든, 과연 저들 일부의 예측 혹은 소망처럼 한국 경제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의미가 있을 만큼 지속적인 성장을 할 것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현재 예측하기 힘들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정말 '고용 없는 성장'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간단히 살펴보고 싶다.

다만,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노동자들에게 굴종을 강요하기 위해서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이 '고용 없는 성장'이란 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하는 예를 보자.

I
1월 1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김순덕 논설위원의 "'앙꼬' 없는 찐빵 먹는 법"이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의 잔인함"에 관한 얘기이다. 이런 저런 너스레를 늘어놓으면서 "고용 없는 성장이라니, ... 마치 앙꼬 없는 찐빵처럼 앙꼬만 빼먹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가뜩이나 고픈 배가 아파지기까지 하는 고약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며, 억지 비유를 들어 그 '잔인함'을 얘기하고 있지만, 정작 정말 잔인한 것은 그 자신의 논법과 주장이다. 여러 구역질나는 너스레 중에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고용 없는 성장'을 더욱 조장하고자 하는 주장들을 갈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리 내 나라지만 과연 이 땅에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다. 내가 제조업체 사장이래도 중국보다 임금은 열 배, 공장 지을 땅값은 40배가 넘는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국가경쟁력은 날로 떨어지는 마당에 서비스업이라도 살리려면 개방을 해야 하는데도 의료는 의사가, 교육은 교육자가 완강히 막는 형편이다." 운운.

결국 '국가경쟁력'을 위해서 임금을 삭감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개방 정책을 강화하라는, 즉 '고용 없는 성장'을 촉진하라는 주문이다.

그의 글 어디에도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초래되는 근본적인 원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 자본주의적 과잉생산과 경쟁 격화의 역사적 의미 등에 관한 비판적인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비판적인 언급은커녕, 들은 풍월은 있어서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근로자 쥐어짜기가 경영합리화로 인정되면서, 고용감소 특히 제조업부문의 고용감소는 구조적 산업변화에 따른 영구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서도, 그리하여 "고용 없는 성장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이라는, 철저히 전도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중요한 건 줄어든 만큼 새로운 분야에서 일자리가 나오느냐인데 이는 어떤 능력을 지닌 정부를 만나는가에 달린 운수문제가 됐다"고 말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발언은 사실은 자신들이 조장한 '박정희 신드롬'을, 그리하여 수구·보수 지향을 대중에게 은근히 선동하고 있는 발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가 정말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숙명론과 그에의 굴종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선택할 길은 둘 중의 하나다. 내 한 몸이라도 스스로 앙꼬가 되어 나라의 입 하나를 덜어주는 동시에 앙꼬 없는 찐빵이라도 나눠먹을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처럼 남들 발목잡기로 앙꼬 없는 찐빵조차 아무도 못 먹게 만들 것인지. 앙꼬가 되는 방법으로는 누구도 못 따라 올 경쟁력을 갖추는 것과 입맛을 낮추는 두 가지가 있다. 잔인한 말이지만 [잔인한 줄은 아는군 : 인용자] (취업)될 사람은 되고, 할 사람은 벌써 하고 있다. 무능한 정부는 아직 안 되고 안 하는 사람의 고마운 핑계가 돼 줄 뿐이다."

그러니, '이 무능하고 게으른 자들아, 너 자신을 원망하라!?' 더 들어 보자.

"정부가 만들겠다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사실 근로자하기 불편한 환경임을 인정해야 할 때다.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부르주아지의 능력 있는 개라는 증표로서의 : 인용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말마따나 임금 양극화 역시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다.

...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다 같이 못사는 사회를 만들 심사가 아니라면 밀가루 반죽에 재를 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니, '구구로 숙명으로 알고, 죽은 듯이 참고 살아라!?'

그러나 이 부르주아 지식인이 모르고 있는 것은, 노동자·민중이 싸움을 하는 것은, 비록 착취잉여가치를 나눠먹으며 호의호식하는 자신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그리하여 심히 심사가 뒤틀릴지 모르지만, 결코 '남의 발목잡기'도, '다 같이 못사는 사회를 만들 심사'도, '밀가루 반죽에 재를 뿌리는 것'도, 하물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자·민중이 싸움을 하는 것은 바로 역사의 시곗바늘을 제대로 돌려서 착취·억압 없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II
하기야 일개 신문사 논설위원이 그런 인식을 드러내고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명색이 노동자와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일한다는 박사·교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시니 말이다.

"70년대 오일쇼크에서 시작된 장기불황의 국면을 거치면서 이 체제내화된(길들여진) 노동운동에 대한 자본의 공세는 자본이 개발한 계급투쟁의 새로운 무기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구조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계발해간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신경영전략'이라고 이름지었던 온갖 것들―일본적 생산방식, 린 생산방식, 팀작업, JIT, 신노동문화, 신인사제도, 경영혁신 등등―이 이 시기에 자본이 개발한 새로운 계급투쟁의 물질적 기초라면, 소위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라 할 수 있다. 이제 자본은 불황이나 경제위기의 국면에서는 물론이고 호황의 국면에서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양보'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세적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이제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받아들일 것을 노동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소위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변화가 배경이 되고 있었다."(임영일, "공황기의 한국 노동운동의 과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편, {연대와 실천} 1998년 8월호, pp. 6∼7.)

위 인용문의 요지와 주장은 명백히 이렇다.
"이제 자본은 (과학기술혁명을 통해서)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에, "이제 자본은 불황이나 경제위기의 국면에서는 물론이고 호황의 국면에서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양보'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세적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투쟁해 봤자 아무 일도 될 일이 없으므로 "노동이 양보"하여 타협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길을 가야 한다. (임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채만수 <<노동자교양경제학>>(제3판), 도서출판 현장에서매래를, 2003, p. 408 이하 참조.)

III
그러면, 과연 '고용 없는 성장'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지속 가능한 것인가?

김 논설위원이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운운하고, 임 교수 역시 "새로운 생산방식" 운운하고 있지만, 실제로 '고용 없는 성장', 혹은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란 최근 수십 년간의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 노동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그리하여 과거와 같은 숫자의 노동력으로, 혹은 그보다 훨씬 적은 노동력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고, 유통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용 없는 성장'이, 임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결코 "더 이상 더 많은 노동력의 동원이 곧 더 큰 가치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지속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상당히 어려운 경제학적인 분석과 설명이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결론만을 말하자면, 가치는 인간노동만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치란 사회 속에서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생산수단을 포함한) 생활자료를 생산하는 그 인간노동의 교환관계·비율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한편에서는 생산물이 갈수록 무가치하게 생산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무상으로 분배되도록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생산수단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고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 그리하여 그들은 자본에 '고용되어야만' 노동할 수 있고 생활자료를 획득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갈수록 많은 다수가 '고용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즉 실업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 사회를 포함,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과연 지속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근로자하기 불편한 환경"이 아니라 '근로자들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환경이 지속될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의미 심장한 문제는 그렇게 자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고용 없는 성장', 즉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서 갈수록 가속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의 '고용 없는 성장',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름 아니라, 갈수록 만연할 수밖에 없는 과잉생산, 그에 따라 갈수록 격렬해지는 경쟁이, 우리가 일상에서 절실히 경험하는 것처럼, 그것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거의 한계에 달하면서 오늘날의 사회문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격렬해지는 계급투쟁이 발생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도록 자극을 준 김순덕 논설위원 같은 분들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자본주의 자체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고, 그것도 이제 매장할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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