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반의 '일자리 만들기 최우선정책'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소장)

[글머리에 : 특별히 전거를 밝히지 않은 채 인용하고 있는 글귀들은 모두 <청와대 부리핑 2004> 제221호, 2004. 1. 14.에 실린 "2004년 신년 기자회견 모두연설문"에서 따온 것들이다. 다만, 우리말의 특성상 전후 문맥을 반영하여 조사 및 어미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익히 아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4일 '2004 신년 기자회견 모두연설문'을 통해서 "일자리야말로 최고의 복지"이고 "가장 효과적인 소득분배의 방안이기도" 하다며, "올해에는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습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사진-청와대]


보수언론에 의해서까지 '말뿐'이며 경솔·경박하다고까지 혹독한 비판을 받는 그 동안의 그의 언행 때문에,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라고 해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야, 구제불능의 이른바 '노빠들' 말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담론으로까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최고권력자의 발언이다 보니, 그것도 '연설문'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청와대가 이날 회견의 '핵심'임을 자임하는("회견연설문 나올 때까지", <청와대 부리핑 2004> 제221호, 2004. 1. 14. 참조) 내용이다 보니, 장·단기간의 실업으로 말 그대로 생존권에 위협을 받아온 당사자들은 물론, 갈수록 심화돼 가는 대중의 빈곤화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고 싶은 발언일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그의 다짐은 기대할 만한 어떤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천명된 그의 정책이 만일 현실화된다면, 아니, 현실화되면 될수록, 일자리는 더욱 사라지고 실업문제, 불완전 취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회견에서 확인된, 일자리 문제와 관련한 그의 인식과 처방은 문제에 대한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부르주아적 탐욕 때문에 논리적 정합성을 잃고 오로지 대중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현란하게 수식(修飾)된 기만적인 진단과 이론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철저하게 독점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가일층 "흔들리지 않고" 강화해가겠다는 선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 구호 속에 은폐된 독점자본의 탐욕

"회견연설문 나올 때까지"라는 청와대측 기사에 의하면, "(1월) 7일 열린 1차 회견문 점검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기술혁신체제 구축 △지식산업 발전 △서비스산업의 개발 등 '일자리 창출 방안'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담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실제의 연설문에서는 이 외에 '노사관계의 안정'이나 '임금인상 요구 자제', '대기업과 주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의 완화, 그리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등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주요한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 노력을 지속해 …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며, 이 모든 방안을 관통하는 것은 이른바 '국가 경쟁력 강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안을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더욱 "흔들리지 않고" 가일층 강화해가겠다는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도' 기업으로부터 은밀히 징수한 수십 억 정치자금 위에 정권이 서 있음이 명백한데도, 그리하여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데도, '기업 경영의 투명성' 운운하고 있는 천연덕스러움은 치지도외하고 넘어가자. 기만과 사술·협잡·투기로부터 자본을 구제하고, 숙명적인 부정부패, 금권정치로부터 부르주아 권력을 구제하려는 헛된 망상은 이른바 시민운동이나 부르주아 경제학자, 부르주아 정치학자들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어서 우리가 거기에 정색을 하고 대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제로 삼는 것은 말하자면 '정상적인' 부르주아 경제에 관철되는 법칙이고, 그 위에 서 있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임금 문제]
뒷부분에서 열거된 임금 문제부터 살펴보면, 대통령은 먼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로자 여러분은 올 한 해만이라도 생산성 향상을 초과하는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년간 생산성 향상을 훨씬 웃도는 임금인상이 계속돼 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변국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칫 줄어들 수도 있다는 엄포일 것이다. 이른바 '생산성임금제론'에 입각한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경제학의, 사실은 문제의 성질상 논리학의 기초도 모르는 발언이다. 물론, 성질상 논리학의 기초 문제이기는 하지만, 양(量)을 다루는 경제학 이외의 과학에서는 이 문제가 특히 문제로 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책임은 필시 경제학의 문외한일 대통령에게보다는 그를 보좌하는 (소위) 경제학자들에게 있겠지만, 아무튼 경제학의, 그리고 논리학의 기본도 모르는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다.

생산성이란 일정한 투입노동량에 의한 생산량의 관계를 비교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지난해에는 일정 수의 노동자들이 일정 시간 노동하여 어떤 승용차를 월간 10만대를 생산했는데, 새로운 생산기술을 도입했다든가 기타의 어떤 이유 때문에 금년에는 같은 수의 노동자들이 같은 시간 노동하여 같은 자동차를 월간 12만대 생산한다면, 바로 생산성이 20% 상승한 것이다.

그런데, 이 12만대의 자동차의 가치·가격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지난해에 10만대를 생산했을 때와 전적으로 동일한 양의 노동시간이 들었기 때문에, 지난해의 10만대의 가치·가격과 동일하다. (여기에서는 물론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가치와 가격이 일치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필시 이러한 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가치론'이라며 기각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각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가치론'의 비과학성을 증명하고, 자신들의 독자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가치·가격론을 제시·입증해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그 어느 한쪽도 입증이 불가능하다.)

자본에게 있어서 이 생산성의 상승 혹은 증대가 중요한 이유, 즉 자본이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생산성 증대를 추구하는 까닭은 생산성이 증대하면 각 상품 1단위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그 증대율의 역수(逆數)만큼 줄어들어서 그만큼 가치·가격이 줄어들고, 따라서 그만큼 경쟁력이 높아지고, 시장의 가치·가격에 변함이 없다면 그만큼 초과이윤을 얻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는, 동일한 자동차가 금년엔 작년에 비해서 '12만분의 10만 = 6분의 5'의 가치·가격으로 생산되어, 그만큼 경쟁력이 있고, 시장가격이 작년과 동일하다면 그 차액만큼 초과이윤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와 같은,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물적 생산성' 외에 '가격생산성'이니, '부가가치생산성'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과학으로서의 부르주아 경제학의 파탄을 드러낼 뿐 어떤 의미도 가질 수가 없는 용어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그 '가격', '부가가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역시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생산성이란 이렇게 투입노동량에 대한 생산량의 양을 비교하는 개념인데,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즉, 현대자동차에서는 예컨대 어떤 승용차를 생산하는 데에 그 이전 달에 비해서 지난 달에 생산성이 20% 증대했고, 삼성전자에서는 같은 기간에 어떤 컴퓨터를 생산하는 데에 30%의 생산성이 증대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양 부문을 함께 아우르면 평균 생산성은 얼마나 증대했을까?
25%?!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자.
갑돌이는 지난 한 해 동안에 키가 12cm 늘었고, 갑순이는 같은 기간에 몸무게가 6kg 늘었다. 그러면 갑돌이와 갑순이를 함께 아우르면, 두 사람은 같은 기간에 평균 얼마나 늘었을까? '(12cm + 6kg) ÷ 2 = 9cm'?!, 아니면 9kg?!

다들 아는 것처럼, 분명 아니다. 왜? 12cm와 6kg은 단위가 달라서 서로 비교하거나 평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지각 있는 성인이 위 질문에 9cm 혹은 9kg 늘었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를 가리켜서 '바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바보스러운 짓이 경제학에 오면 소위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천연덕스럽게, 아니 과학자의 권위를 가지고 저질러진다. 위에 설정한 예의 경우 '생산성이 25% 증대했다'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현대자동차가 생산하는 자동차와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컴퓨터 간에는 가치·가격을 제외하면 어떤 공통의 단위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 양적 관계를 비교하거나 평균할 수 없다. 또한, 생산성이 어떻게 변했든, 각각 동일한 양의 노동투입을 전제하고 있는 위의 예에서는 가치·가격은 같은 기간에 양쪽 모두 이전과 동일한 양씩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격에는 어떤 증감도 없다. 즉, 생산물이 달라지면, 이들 이종(異種) 생산물들을 아울러서 그 생산성의 증감을 하나로 통계화할 수 있는 어떤 과학적인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발언이 입각하고 있는 이른바 '생산성임금제론'은 그것이 마치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전제하여 그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통계화'(?)하고, 그리고 나서 임금 상승률과의 대소를 논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초과하는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 주기 바란다"는 주문은 바로 그러한 가당치도 않은 이론 위에 선 주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정말 심각한 문제"로서 "이제는 우리 노동운동이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하고, 그리하여 이를 해소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과 해법은 철저히 전도된 것이고, 철저히 독점자본의 탐욕을 반영한 것이다.
대통령의 주장과는 반대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결코 "강력하고 잘 조직된 대규모 사업장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주도해온"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근로조건이나 임금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대기업 노동조합이 … 스스로 절제하고 양보하는 결단을 보여주어야" "노동운동의 대의에도 맞는 길"이 아니다.

대기업 노동자들도 대부분 오늘날 빚에 시달리면서 그날그날의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고 있고, 그 자식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임금의 문제이지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독점자본의 탐욕을 반영하여 문제를 철저히 거꾸로 제기하면서 전반적인 저임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주장과는 반대로, "노동운동의 대의에도 맞는 길"은 최소한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나아가 실업 노동자가 보다 광범하고 보다 강력하게 스스로를 조직하여, 우리 사회에서 '생활임금'이라고 부르는, 자기 재생산에 부족함이 없는 임금을 쟁취하는 것이다.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고급 경제관료들, 그리고 대학의 경제학 교수나 신문·방송의 논설위원·기자 등, 한마디로 최근 박노자 교수가 아주 적절하게도 '학상배(學商輩)'라고 부른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 '고임금'을 질타·비판·개탄하는 자들이 즐비하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 주장의 비과학성은 차치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임금·소득·생활을 자신들이 그토록 질타·비판·개탄해 마지않는 노동자들의 '고임금' 수준으로 제한한다면, 나는 그들을 적어도 도덕적으로는 칭송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럴 위인들이 아니다. 천하의 집단이타주의자들이니까 말이다!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만들자?]
대통령은 "노사관계의 안정 없이는 경쟁력 강화도 일자리 창출도 어렵다"며, "올해를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이룩한 해로 만들어 보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화와 타협의 노사관계 정착에 주력하고 불법행동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응해 나가겠다"는 엄포를 잊지 않고 있다.

'경쟁력 강화'가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보기로 하겠지만, 대통령은 도대체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이른바 '노사관계의 안정', '대화와 타협',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이룩하려는 것일까? 위의 임금과 관련한 언급에서도 명확한 것처럼,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감수를 강요함으로써이고, '경쟁력 강화'니 "시장개혁 프로그램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겠다"느니 하는 발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불완전 고용 등 노동조건의 악화를 감수할 것을 강요함으로써이며, "법과 원칙"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탄압을 가함으로써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일부 상층부를 매수함으로써이다.

"임금인상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등, 임금 문제가, 사실상 저임금을 강요하는 내용의 발언이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유난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연일까?

아니다. 자본의 이윤이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노동, 즉 부불노동·잉여노동에 불과해서 임금과 이윤은 배타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은 잉여노동을 둘러싸고 적대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관계는 결코 '안정'될 수 없고, '대타협'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외견상 그것이 '안정'·'대타협'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다음의 경우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는, 대통령이 '기자회견 문답'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80년대 이전"처럼 "공권력이 다 해결해주고 탄압으로 다 해결할 수 있었던 노사관계".

다른 하나는, 오늘날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운동 상층부의 매수와 그에 따른 노동운동의 상당 기간의, 그러나 잠정적인 무기력화.

그 동안에도 자본과 국가는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폭력과 매수를 적절히 구사해 왔지만, "올해를 '노·사·정 대타협'의 신기원을 이룩한 해로 만들어 보자"면서도 "불법행동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응해 나가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그러한 전술을 더욱 더 적극적으로 구사하겠다는 의지 천명에 다름 아니다. 특히 '매수'에 의한 어용화는 갈수록 심각한 문제여서, 이번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에서 그 영향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 일부 어용노조의 움직임을 주목하면서 아래로부터 대중적 에너지를 조직·동원하여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노동운동 역시 다시 굴종과 침묵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 노력을 지속해 …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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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완화와 투자환경 개선"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한편으로는 독점자본에 대해 사실상 무제한한 착취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를 위해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의 경제적·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자본에 대해서는 갖은 지원을 국가가 제공·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가기는커녕, 고용·임금을 포함한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나아가 환경파괴 등 장기에 걸쳐 악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다.

"수도권은 … 규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풀어야 할 것은 과감히 풀면서 난개발과 환경오염은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고 머지않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특히 김대중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그린벨트가 해제되고 수많은 곳의 토지 형질변경 등이 허용되는 등, '규제 완화'가 이루어지면서 수도권, 특히 서울 주변이 얼마나 난개발되고 그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가는 우리가 목격하는 대로이다.

기술혁신·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사실 대통령 스스로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 이날 발표한 "모든 정책의 초점" 혹은 "전략의 핵심"은 '기술혁신'이고, 그들 통한 '국가경쟁력의 강화'이다. 그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올해에는 국가기술혁신체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 정부와 기업, 대학과 연구소가 함께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인력 양성에 주력하고, 이를 통해 배출된 인력이 안정된 일자리에서 기술혁신과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는 정말 그의 말대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는 오히려 거꾸로 일자리를 축소하고,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을 조장하는 방안이다. 대통령의 회견에서 천명된 정책이 현실화되면 될수록 일자리는 더욱 사라지고 실업문제, 불완전 취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주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혁신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투자의 동기 등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대통령은 "투자를 일으키는 궁극적인 동력은 경쟁력이고, 경쟁력의 원천은 기술혁신과 인재양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경쟁력의 원천이 기술혁신인 것은 맞지만, "투자를 일으키는 궁극적인 동력이 경쟁력"인 것은 결코 아니다. "투자를 일으키는 궁극적인 동력" 혹은 동기는 이윤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사실 연설문 전체를 통해서 '이윤'을 '경쟁력'으로 슬그머니 바꿔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목적을 은폐하고 있다.

아무튼, 기술혁신은 바로 노동의 생산력을 높여서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여 값싸게 유통시키고, 그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초과이윤을 획득하고자 추진된다. 그리고 현대자본주의에서는 과잉생산이 사실상 전반적·항상적으로 벌어지고 그에 따라 경쟁전이 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기술혁신은 자본의 생사를 건 문제로 되어 있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과학기술혁명이 가속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배경이다.

이 기술혁신·과학기술혁명은 물론 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키고 있는데, 적대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소비력을 제한하고 있다. 그 때문에 경쟁전은 다시 더욱 격렬해지면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 결과 기술혁신·과학기술혁명은 사실상 전자동화된 무인생산을 향해서 나아가면서 오늘날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 곧 고용을 파괴하면서 이루어지는 과잉·대량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대통령이 천명하고 있는 기술혁신이란, 경쟁전에 사로잡혀 있는 독점자본의 경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것일 뿐, 일자리를 창출하기는커녕 그것을 파괴하는 길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예컨대 세계 최고의 기술력,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일본 자본주의가 벌써 10년 이상의 장기불황, 장기공황에 허덕이고 있고, 갈수록 그 실업문제가 심각해져 가고 있는 데에서도, 그리하여 '경제대국 일본'임을 자랑하던 나라에서 매년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실업과 생활고로 자살하고 있는 데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대통령이 '기술혁신'과 그를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그의 악의의 표현이 아니다. 다만, 그와 국가가 자본의, 독점자본의 도구임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술혁신이나 과학기술혁명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책이기는커녕 그것을 파괴하는 길이라고 해서 그것을 저지하거나 회피·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저지하거나 회피·파괴하려든다면, 그것은 반동적인 것으로서 반드시 실패하도록 운명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기의 기계 파괴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술혁신·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이윤생산을 위한 독점자본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노동자·민중의 통제 하에 두고, 노동자·민중의 복리증진에 기여하도록 통제하여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전 세계의 노동자계급에게 주어져 있는 과제이다. 아주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이다.
세계의 노동자계급은 아직 그 과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크게 후퇴해 있고, 커다란 좌절과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제의 해결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은 이미 농숙해 있고, 따라서 그 해결이 지연될수록 인류의 고통과 재앙은 더욱 심각한 것으로 돼 가고 있다. 만성적이고 더욱 심화·격화돼 가는 과잉생산과 공황, 그리고 갈수록 광폭해져 가는 제국주의와 전쟁, 그 위협이 그것이다.

[곁다리]
자본의 탐욕이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지만, 추상적·도식적으로만 말한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내에서도 악화돼가고 있는 일자리의 문제를 해결 혹은 완화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공유, 즉 노동시간의 대폭적인 단축이다.

생각해 보라. 한 사회에 필요한 물질적 생활자료의 생산에 필요한 총노동시간을 그 사회의 노동력 인구 수로 나누어서, 그 시간만큼씩만 노동한다면,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대통령의 기자회견 연설문에는 그러한 방향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왜일까?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독점자본의 탐욕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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