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담보인 ‘그라민 은행’

[기고] 고금리의 함정에 얼마나 숱한 사람들이 고통의 세월을 보낼까

월 스트리트에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기세로 세계경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탐욕이 빚은 비극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담보대출)를 기초자산으로 하여 다단계 판매처럼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고 또 만들어서 떼돈을 벌다 덫에 걸려 파국을 맞은 것이다. 야수의 모습으로 세계금융시장을 사냥하던 거대투자은행들이 연쇄도산하며 헤지펀드가 그 뒤를 따를 양상이다.

무릇 은행은 베니스의 상인의 사일록 같은 얼굴을 하고 보증과 담보를 요구한다. 가난한 사람은 돈을 맡길 때는 은행이 있어도 돈을 빌릴 때는 은행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업이란 일본계 고리대금업자한테 코가 꿰어 헤어나질 못한다. 이자제한율이 49%라고 하지만 이리 저리 엮어서 그 몇 배까지 등쳐먹는다. 자금경색에 몰린 은행들이 대출회수에 나설 테니 은행 돈 쓴 사람들도 지독한 빚 독촉에 시달릴 판이다.

그런데 담보도 신용도 일자리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있지만 어떤 탈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쉬의 빈자은행 ‘그라민 은행’이다. 여기서는 일반은행과 달리 가난해야 돈을 빌릴 수 있다. 일자리를 만들어 갚겠다는 의지는 꼭 있어야 한다. 원금은 일시상환의 부담을 생각해서 1주일 단위로 조금씩 1년 안에 갚아가도록 한다. 이 원칙은 아주 엄격해서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조금은 갚아야 한다. 독립심과 책임감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이 은행은 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가 설립했다. 1976년 치타공 대학교 경제학 교수 시절 담보가 없어 대출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운 일에서 출발했다. 어민 42명이 27달러가 없어 어망 고치는 기계를 사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보증을 서줬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아예 교수직을 버리고 무담보 소액대출 운동에 나섰다. 마을이라는 뜻의 그라민에서 이름을 딴 은행을 만들어 창업을 통해 가난을 이기도록 돕고 있다.

이제까지 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쓴 사람은 660만 여명이며 97%가 여성이다.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도 주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남녀평등에 앞장서고 있다. 지금은 전체 직원이 2만 여명에 지점만도 2,185개로 늘어났다. 대출금도 43억 달러로 커졌고 상환율은 98%에 이른다. 이 운동은 이제 저개발국을 넘어 미국, 캐나다, 프랑스에도 퍼졌다. 한국에도 2000년 신나는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지부가 생겼다.

케이블TV에는 온통 대부업 광고다. 사채더미에 눌려 자살한다는 소식이 잇따른다. 많은 서민들이 얼마나 절박한 생활을 하는지 말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금융감독원이 후원하는 서민대출중개업체인 한국이지론의 연평균 금리가 42.5%란다. 이런 고금리의 함정에 빠져 얼마나 숱한 사람들이 고통의 세월을 보낼까 싶다. 그런데 어디에도 정부는 보이지 않는다.
덧붙이는 말

김영호 님은 시사평론가로 언론광장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이 글은 노컷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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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 그라민 은행 , 사채 , 대부업 , 서브프라임 모기지 , 무하마드 유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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