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과 "성장"의 모순

[기고] 위기의 녹색에 회색 재 뿌리는 성장주의적 발상

지난 25일 베이징 ASEM 7차 회의에서는 "지속가능 발전"에 관한 정상 선언이 채택되었다. 기후변화협약 대응과 에너지 안보 등이 선언문의 주요 내용이며 녹색전환을 위한 사회적 정의와 유대가 주요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녹색 바람과 지속가능 발전은 전 세계의 주요한 관심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8.15 경축사를 통해 재생에너지 산업 등 녹색 기술을 통한 일자리 창출, 그린 홈 100만호 보급사업, 그린 카 세계 4위 도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로운 60년의 비전으로 제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2009년 3월까지 그린에너지 발전 전략을 수립할 것을 목표로, 우선 성장 동력 대상인 9개 분야 등 총 15대 분야를 대상으로 민간주도의 추진체계를 구성하여 수요자 중심의 R&D 전략을 수립하겠다고 하였다. 9대 분야는 태양광, 풍력, 수소연료전지, IGCC, CCS, 청정연료, 에너지저장, 전력IT, LED 등이고 나머지는 원자력, 소형열병합, 그린카, 초전도, 에너지절약형 건물, 히트펌프 등이다. 전략 수립을 주도할 민간 기업으로는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총망라되었다. SK에너지, 현대자동차, LG화학, 삼성전자, 두산중공업, GS 칼텍스, 포스코, 동양제철화학, 한전, 가스공사 등이다.

녹색이 각광받고 시대의 주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며 오히려 늦어도 한 참 늦었다. 세계 에너지 소비 1위국인 미국도 2030년 장기계획에서 수송용 연료 중 20% 이상을 바이오 연료로 대체할 것과 전력 공급의 20%를 풍력으로 담당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에너지 블랙홀인 중국조차도 2030년 전체에너지의 20%를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할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녹색성장을 새로운 세기의 비전이라고 주장하는 이명박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치는 11%에 불과하다. 물론 11% 확대라도 진정성이 존재하는 구체적 방안이라면 잠시 안도할 수 있으나, 11% 확대 목표의 실효성은 100조대에 이르는 공적 자금 투여 논란 속에 희화화되고 말았다. 그런데 녹색 성장이 결국 "성장"에 방점이 찍힌 회색빛 전망이라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녹색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기업 성장 발전전략에 초점이 있는 것으로 전형적인 기업 프랜들리 정책에 녹색이라는 색깔을 덧칠한 것일 뿐이다.

지속가능성이 인류의 필연적인 생존 전략이 된 것은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성장 때문이다. 전 인류가 0.1%의 기온 상승에도 벌벌 떨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에너지 과소비의 대가로서 자승자박의 결과이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유가, 수급 불안정에 시달리는 천연가스와 유연탄 등 주요 1차 에너지원의 현실은 고갈을 목전에 둔, 혹은 피크 시점을 치고 나선 에너지원의 복수이자, 그 틈에 비집고 들어서서 피와 같은 검은 자원을 더욱 비싼 상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에너지 자본의 노림수 때문이다. 에너지 위기가 커질수록 에너지 자본은 성장하고, 필수 에너지 서비스에 소외되는 계층은 늘어나며 에너지 안보와 위기는 다시 심화된다.

지속가능성은, 에너지 소비를 피할 수 없다면, 궁극적으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누수되는 에너지를 최대한 줄이는 것 즉 효율화과 합리적 이용 등 에너지 수요 관리 정책에 중점을 두고서 출발해야 한다. 화석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점차적으로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하는 '에너지 전환'의 중장기 전략과 더불어 중단기적으로는 수요관리 정책에 기반하여 추진될 때만이 실효성이 존재한다. 에너지 전환은 화석에너지에서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에너지 다소비 중심의 자본주의 산업구조 전반을 전환하고 자본주의적 소비형 인간형에서 탈피하는 사회문화 전반의 전환을 동반할 때만이 진정성을 가진다.

이명박 정부의 그린 발전 전략, 녹색을 가장한 성장주의는 당면한 기후변화협약의 비를 잠시 피할 손바닥만한 우산도 되지 못한다. 2030년 그린에너지 산업 9대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13% 달성은 허황된 구상일 뿐 아니라 위기에 빠진 녹색에 회색 재를 뿌리는 안일한 성장주의의 발상에 불과하다.

그 동안 노동조합 운동 전반에서 지속가능성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노동'조합' 자체가 자본의 발전주의·성장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인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또한 진보적인 시각에서 현실의 문제를 폭넓게 조망하는 실력의 부재, 반자본주의 운동의 중장기 방향 즉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미래 구상에 대한 부족한 시야 때문이기도 하다. 전력, 가스 등 에너지 산업 사유화를 반대하는 투쟁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생산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공공성을 사수하는 투쟁이라면 그 공공성은 의미가 없다. 아니 오히려 해악적이다. 어떠한 에너지를 어떻게 만들어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지속가능성의 전제 하에 에너지 전환의 의미와 목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에너지 전환이라는 대 주제 속에서 우리가 구상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미래'는 어떠한 상을 가질 것인가를 우선적으로 고민해나갈 때 만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공성의 의미는 제 자리를 찾게 된다.
덧붙이는 말

송유나 님은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사회공공연구소 정세동향 5호에 실렸습니다.

태그

풍력 , 녹색 , 기후변화협약 , 성장 , 재생가능에너지 , 지속가능성 , 그린 발전 전략 , 저탄소녹색성장 , 그린에너지발전전략 , 태양광 , 수소연료전지 , 소형열병합 , IGCC , CCS , 전력IT , 에너지위기 , LED , 성장주의 , 에너지전환 , 녹색바람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송유나(사회공공연구소)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데이빗배꼽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한보라도 내딛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