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약관 32세의 러시아 출신 귀화 사학자로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다. 평소 한국인들보다 더 우리 사회의 모순을 꿰뚫어보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 앞에 성역(특히 도제를 양성하는 한국의 대학사회)은 따로 없다. 그것이 어쩌면 그가 한국인으로 귀화했음에도 굳이 노르웨이까지 가서 그곳 대학 강단에 서야 하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그가 8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도덕’ 은 지배의 위장술인가” 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지난 달 27일 미술교사 김인규씨의 ‘알몸 사진’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유죄 판결을 보고 어지간히 갑갑했던 모양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를 간략하게 보기로 하자.
박노자는 이번 판결이 10년 전 마광수 교수의 “음란한” 소설 판결과 같이 “사법당국이나 보수적 ‘도덕주의자’들에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고 지적했다. 그는 이 어이없는 풍경을 “성리학적 금욕주의와 빅토리안 시대 개신교의 위선적인 성 억압 담론이 습합된 이 ‘도덕’의 잣대”를 주 원인으로 보고, 이 잣대가 “대한민국의 지배층에게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어서까지도 계속 유효한지” 의아해 했다.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도덕’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사회를 꼽자면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북한” 이라면서 오늘 한국 사회가 조선시대의 고루한 도덕관념과 닮았음을 시사하고,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 또한 같은 범주에서 시대착오적인 현상임을 비판했다.
특히 박노자가 “15세기만 해도 도덕군자를 자임하고 있었던 조선의 지배자들이 총인구의 약 3분의 1을 노비로” 부리고 있었다는 예시는 남북한 공히 전근대적 계급사회에 매몰돼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욱이 “직분이 곧 신분으로 인식되어 ‘아랫것’에 대한 폭력, 폭언, 괄시의 근거를 제공”해주며 “학교에서의 교사, 대학교에서의 교수, 군에서의 장교, 직장에서의 상사 등은 ‘아랫사람’의 인격을 짓밟음으로써 그 신분적 위치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시적 폭력’을 반증하며 “폭력자로서 자기 정당화”를 위해 “도덕군자의 탈을 쓰는 것”이라고 위선을 폭로했다.
그는 “위선과 강압을 바탕으로 한 이 ‘도덕 파시즘’의 바벨탑은 과연 언제 무너질 것인가?” 라고 묻고, “그러려면 ‘아랫사람’에게 하는 한마디 욕설이 야한 글이나 알몸을 드러내는 일보다 몇 백 배 더 패륜적이라는 ‘진정한 도덕관념’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 돼야 할 것”이라며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언어폭력이 더 무서운 해악임을 강조했다.
이상에서 보듯 박노자의 한국사회 해석은 거침이 없다. 그러나 이는 그의 천재성에서만 나올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그가 우리 자신들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것은 한국을 세계사적인 한 가운데서 조망할 줄 아는 객관적 시야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번 글 역시 논리적으로 명쾌하지만 ‘옥의 티’ 로 여겨지기 쉬운 부분이 하나 있어 지적한다.
박노자는 마광수나 김인규의 사례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노골적인 온갖 표현물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강국이자,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성매매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성 산업의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예술적인 의도로 신체와 성을 탐구하는 작가가 죄인이 돼버리는 어이없는 풍경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가 살고 있는 북유럽의 노르웨이 같은 나라라면 ‘예술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글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성매매 특별법이 강력하게 작동 중인 사회인 까닭에 ‘노골적인 표현물’과 ‘성매매의 멍에’ 부분은 부득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노골적인 표현물’과 ‘성매매’를 등치시킨 것은 잘못이다. 전자가 친자본형(혹은 대자본형) 비즈니스라면, 한국형 성매매(자발적인 성노동을 의미하며, 인신매매는 제외한다)는 생계형 서비스업에 불과하다는 큰 차이가 있다. 사회과학에 조예가 깊은 박노자씨가 모를 리 없지만 부언한다.
또한 위 두 가지를 ‘예술성’과 굳이 구분하는 의도가 김인규씨의 판결이 억울한 주된 이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인 표현물’과 ‘성매매’가 무조건 법의 저촉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성담론에 해당하는 이런 사항들은 박노자씨가 북유럽의 성 시장을 둘러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성매매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성 산업의 ‘강국’인 대한민국” 이라는 부분 역시 위험 소지가 있다. 박노자씨가 말하는 ‘수십만 명’은 아마도 형사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33만명의 성매매 여성종사자 통계 수준을 말하는 것 같은데, 여성단체들은 가임여성의 10%인 최대 2백만 명까지 추산하니 이점도 참고하면 좋겠다.
이 많은 수의 여성들이 그 곳에 있는 이유는, 한국의 유별난 ‘접대문화’ 나 유달리 그걸 밝히는(?) 한국 남성들의 ‘성욕 과잉’이 주범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경제 구조상 ‘일자리’가 계속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60%에 이르렀다는 얘기는 내일을 기약 못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증가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노동자들의 양산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성매매의 멍에’를 말하려면 그녀들이 처한 사회적 빈곤을 먼저 말하는 게 순서다. 성노동자들은 남성들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얼핏 보면 ‘조삼모사’(朝三暮四) 같은 말 같지만, 이 차이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성노동자들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이다. 지금 성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노동권 쟁취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보수적 ‘도덕주의자’들에게 오명과 낙인이란 돌팔매를 맞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멍에’ 란 용어를 사용하려면 '도덕주의자'들이나 혹은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얘기까지 포함되는 게 이치에 맞다고 본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의 귀화 사학자인 박노자씨는 한국 사회가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소중한 학자이며 오피니언 리더이다.
김인규 미술교사 유죄판결에 대한 뜨거운 글에서도 우리 사회를 사랑하여 진보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구구절절이 배어난다. 김 교사 문제는 그 자체로 충분히 비판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에서 ‘옥의 티’를 거론한다는 게 길어졌다. 행여 박노자씨와 그를 가까이하는 분들께 누(累)가 되었을까 미안한 마음이다. 양해가 되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