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연루되지 않은 것을 비판할 수 없다." (브라이도티, <유목적 주체>)
2004년 입법, 시행된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아이러니칼허게도. 사실 역사에는 온통 아이러니뿐인데) 계기가 되어 출범한 성노동자 운동을 봄시롱도 드는 생각이거니와,
"성노동"이란 개념/틀에서 "눈씻고 다시" 보자는 성매매 문제는 성, 섹슈얼리티, 가부장제, 자본주의, (가장 조밀하고도 가장 방대한 권력 관계인) 젠더 문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왼갖 터부들과 편견들, 성도덕, 보다 확장하자면 몸을 둘러싸고 경합중인 정치윤리적 이데올로기들 등 우리 사회의 왼갖 모순들이 중층결정적이고 가장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특법 시행 이후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싸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온갖 목소리들과 헤깔리는 소음들(소음이란 나쁜 것만은 아닌데), 그라고 고정갑희 교수를 필두로 한 <여/성이론 12호>에 실린 초발적 이론화 시도들은 아마도 "사회 변혁"을 마침내 일구어내는 "역사적 성공"보다는, 역사적 실패에 더 열려 있다 (vulnerable). 이것은 섹슈얼리티가 지닌 우리 안의 터부를 뒤흔들어 깨어놓는 은근하지만 너무나 강력한 복잡한 힘 땜시롱 그리하야 (여성) 섹슈얼리티란 사회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을 은근슬쩍 (성)도덕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힘들의 복잡한 상호작용들을 촉발하곤 했다는 역사적 관찰에서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점이다.
노동사회과학 연구소의 채만수 소장이 밝힌 입장은 그 연구소가 취해 온 '변혁적 이론'화 작업을 향해 가는 '생산적인' 논쟁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입장"이라기보다는, 정리되지 않은 견해들(때로 '진보적' 어휘들로 포장된 억견)이 대부분이요, 진보넷에 올라온 최원씨의 반론대로 라면 "90프로가 말꼬리 잡기"이긴 하지만, 사회 변혁을 지향하고 뒷받침하는 이론, 이데올로기 생산이 그것이 의도치 않았던 최악의 것, 즉 자신의 적대집단으로부터 이용당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경청할 만한 대목이 있다.
하지만, "일부 회원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그의 첫 마디는 "진실로 '좌파' 이론가 다운 '좌파'" "'좌파' 활동가 다운 '좌파' 활동가" 운운하는(마지막부분에서) 채소장의 "초연허신" 입장을 고대로 드러내는 바, 그에게 성노동자 운동은 적극적 개입과 참여의 문제라기 보다는 얼마나 "바람직한지를 보기로 하"(1절 바로 위 문장)는 수준에서 머문다. (여기에 은근슬쩍 녹아 있는 저 오만한 판관적 태도를 보라. "사람은 자신이 연루되지 않은 것을 비판할 수가 없다"는 브라이도티의 지적도 그에게는 아마 본질주의쯤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채소장이 비판의 주요 텍스트로 취하고 있는 "성노동자 운동, 가능한가?"에서 발표된 고정갑희와 김정은의 글은 (<여/성이론> 12호에 실린 성특법 특집 글들과 함께), 채소장도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힌 바 있는, "성매매의 원인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성의 상품화 등 사회 구조적 원인들을 제거하는 투쟁을 가능"하게 해볼라는 초발적(pioneering) 이론 작업이자, 공개적으로 처음 '성노동'을 거론한 첫 목소리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갑희와 김정은 등의 목소리는 성매매 문제에 대한 이론적 완결판이 아니라, 이제서야 이 문제를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출발점일 뿐이다. 또 한번 다시 말하자면, 이들의 작업은 성매매, 성노동에 관한 이론화 작업의 시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매매 문제에 대한 근본적 재사유, 공론화를 위해 이들이 택하고 던진 것은 '성노동'이라는 말이다.
여러 사회운동들이 보여주고 일러준 바대로, 언어와 개념이란 우리가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발휘한다. 이런 점에서, "성노동자 운동이 바람직한지를 보기로" 하겠다는 채소장이 어떤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하고" 어떤 부분은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식의 접근 대신에 성노동, 성노동자라는 단어가 어떤 방향으로 개념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견을 제출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이론> 12호에 실린 성매매관련 논문들에도 그렇지만, 성노동, 성노동자라는 말은 아직 (변혁적) 개념으로 탄생하지 못했다. 즉, 탄생중이다. 문제는 성노동이라는 말의 운명과 '성노동권'을 강조함시롱 터져나온 성노동자 운동이 "다분히 수상하게 진행되고" 있기에, 반동적 세력들과 요구들에 악용당할 소지가 많으며, (채소장과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대로) 부분적으로 악용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채소장이 고정갑희를 "말 안되는 말 멋대로 횡설수설 떠들면서 자신의 무지와 매매춘을 옹호하고 포주를 위해 '노동'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낸다고 힐난하면서까지 지적하고자 하는 핵심일 텐데, 알고보면 도덕적 엄숙주의에 기반한 이러한 자지중심적 '힐난'을 감수하고라도, 이 부분은 경청하고, 앞으로의 작업에 주의해야 할 대목이라고 수긍하겠다('힐난'이라는 논쟁방식에 대한 반성이야 내 몫이 아니니).
그렇지만 동시에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고정갑희와 같은 "포주의 앞잡이들"은 그들의 시초적인 이론화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서부터 이미 이런 모순적 역이용의 지점들을 염두에 두고 경계하면서, 그리하여 그러한 부단한 경계로부터 나오는 용기를 가지고 작업해 왔다는 점, 그라고 앞으로도 그러한 경계심 위에서 작업해 갈 것이라는 점이다. 대중도 그러하거니와 우리가 비판하는 '남들'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은 것이다.
(4부에서) 레닌을 거론하면서, "(그리하여 포주의 이익에 봉사하고자 하는) 어이없는 반동적 요구를 하고 나서고 있는 바탕에는 '성매매 여성의 극악한 현실'에 대한 깊은 동정"에 기반하여 성노동자 운동의 문제점을 (겉으로 보아서만)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는 채소장이 놓치고 있는 복잡한 부분들을 몇 가지만 지적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직까지는 매끄럽고 뽄대나게 정리되지는 않은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성매매 문제와 관련하여 오로지 논쟁의 출발점이자 용기있는 촉발점으로서만 유용한 고정갑희의 논의(2005)는 "우리"에게는 성매매가 필요악이라는 논리(사석에서의 개인적 견해들이 아니라)조차도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녀가 도입하자는 '성노동'이라는 말 역시 아직 엄밀한 개념화에 이르지 않은, 구멍숭숭뚫린 기본적인(rudimentary) 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즉, 고정갑희의 2005년 글들은, 성매매에 착종된 여러 모순들과 거기에 얽혀 있는 모순적인 논리들의 타래를, 그간 터부시되고 침묵당해왔고 낙인찍혀왔던 여성들(성노동자)의 입장에서 풀어보자는 시초적 제안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노동, 성노동권, 성노동자라는 다소 낯설고 "새로운" 어휘들은 보다 변혁적 입장과 시각에서 엄밀한 개념화를 요구하고 (소리없이 아우성치고) 있다(cry out). 하여, 성노동이라는 말이 "구차하고 무책임하기 그지 없다"는 비판으로는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또한 "바로 그 현장에도 포주와 그들이 동원한 폭력배들이 얼씬거린다는 여러 지적"을 재삼 지적하고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은 것이다.
고정갑희가 제안하고자 하는 핵심중에 또다른 하나는 아마도 피해자논리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논리를 개발해 보자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성노동자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다. 채소장이 지적한 대로, "'사라져야 할 직업'적 행위를 계속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노동자들은 논리상 말 그대로의 범법자가 아닐지라도 사회적 낙인에 의해서 관습적 범법자로 간주되어 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여 고정갑희의 논의를 "결국 성매매 그것은, 그에 대한 사회적 낙인만 제거하면, 여느 노동과 마찬가지의 노동, 구체적으로는 '성노동'일 뿐일 셈"이라고 일축하는 채소장의 논리와 이해야말로 성매매, 성노동등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을 은근슬쩍 (성)도덕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은 사회적 이해세력과 힘들에 일조하는 데가 있다.
또한, 비범죄화 논리가 포주에게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채소장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비범죄화가 곧 합법화라는 식의 이해야말로 고정갑희가 경계하는 것이자 우리 역시 경계해야 하는 단순논법이다. 성노동자 운동, 성노동과 관련해서 우리가 뚫고 나가야 할 돌파구는 바로 이 지점(비범죄화=합리화라는 등식)인 바, 이런 논리, 이해가 판치는 상황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논리를 성립되지 않게 하고 혹은/그리고 피해가면서도 변혁적인 설명, 레토릭, 개념을 맹글어내라고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노동,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싸고 벌어지기 시작한 담론 투쟁은, 채소장이 말미에서 지적, 주장하는 "포주들의 추잡한 이익에 봉사하는 대신에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구제와 자활정책을 요구"하고 "성매매 여성들의 주체적 투쟁이 문제가 된다면, 바로 그러한 자활정책을 요구, 쟁취하는 투쟁으로 그들을 조직"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쪽으로 나아가도록 적극 개입하고 강제해야 하는 영역인 것이다. 즉, "그런데 저들의 행태, 저들의 몰골은 어떤가? 포주들의 어리석은 앞잡이, 바로 그것 아닌가?" 하는 식의 도덕적 엄숙주의 만빵의 힐난이 아니라, 변혁적 이론 작업이 적의 논리로 포섭, 악용되지 않고 "진정으로" 변혁을 모색하고 그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생산적인 논쟁이 이 문제에 깊이 연루된 "우리"에게는 절실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연루되지 않은 것을 비판할 수 없다." 채소장은 성매매 문제가 근본적으로 자기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에서 비판한다는 점을 나는 꼭 지적혀야 쓰것다).
비판적 이론 일반, 특수하게는 페미니즘 이론이란, 복잡하고 급박허게 혹은 번지르르하게 드러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 (필요하다면 새로운) 개념-유통화폐를 맹그는 작업이다.
성매매, 성노동을 둘러싸고 이미 왈가왈부허는 목소리들과 우려, 지지의 목소리들이 혼탁한 소음을 내며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는 무시에의 의지를 발휘하여 다들 눈동자만 굴림시롱 사악한 침묵에 일부러 빠져들어 아무일도 안 벌어지는 듯한 사태가, 다른 한쪽에서는, 채소장의 표현을 빌어쓰자믄, "타락한 현실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비판 일색이거나 무지에의 의지(willing ignorance)에 기반한 고의적 침묵 등 한 두가지 반응들 보다는 소음가득한(cacophony) 아우성들이 더 나은 해법들을 가져오리라 본다. 그리고 나는, 어쩠든 간에, 성노동이라는 말은 점점 널리 유통될 개념-화폐가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물론, 이 '성노동'이라는 말이 개념이 되고, 개념-화폐가 되는 과정에서, 왼갖 불협화음과 같은 단어로 딴소리하기쇼가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단어의 사용을 둘러싸고 벌어질 투쟁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 왜?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나와 '그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중요한 질문들이 채소장의 메마른 비판에는 부재한데.) 그리고 이 차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우리'의 특수성을 어떻게 보편화가능한 것으로 맹글어낼 것인가....등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되고 제기될 수많은 질문들과 '우리'가 펼치는 논리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을 한계와 맹점도 살펴보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