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지식인(특히 '교수')을 존경하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

아카데미에 포섭된 지식인들, 오직 프로젝트 따는데 관심

[한국인권뉴스 2006·04·27 09:42]
고병권 "지식인(특히 '교수')을 존경하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

<"지식인들은 자기 삶의 현장을 상실했다. 이들은 자신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에 대한 대자적 의식은커녕 즉자적 의식도 없다. 자기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는지 자기 삶의 양식은 어떤 것인지 문제의식을 발견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지식 생산에 대한 자각도 크지 않다. 자신은 어떤 지식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프로젝트는 누가 준 것인지, 그 결과는 지금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 보다, 그냥 프로젝트만 따는데 관심이 있다..">

[인권연대 40차 수요대화모임] 고병권의 ‘우리사회의 지식인’

‘지식인’을 존경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의 지식전문가들은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방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 지식인, 특히 '교수'에 대한 대우가 과하다는 것이다.

고병권 선생(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은 26일 인권연대교육장에서 열린 인권연대 40차 수요대화모임 ‘지식인과 사회운동’에서 한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운동현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현장조차 상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식의 ‘불온성’ 상실을 초래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강의 중 해당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아카데미에 포섭된 지식인들, 오직 프로젝트 따는데 관심

지식인의 문제는 ‘현장의 상실’이다.
하나, 지식인들은 운동현장을 상실했다. 이들은 ‘진보세력의 재구성’ 문제를 사유하지 못한 채 과거부터 내려온 역사적 실체로서 진보세력을 이해한다. 이들은 심각한 상황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는 ‘소수자들’의 운동을 진보세력들이 신경 쓰고, 연대해야 할 ‘그들’의 운동으로 안다.
80년대 이른바 ‘현장’에 ‘침투’한 지식인과 90년대 이후 아카데미에 ‘흡수’(혹은 포섭)된 지식인들을 비교하자. 전자는 현장에 침투했고 후자는 퇴각했다. 반드시 ‘공장’만이 현장은 아니다. 공장만큼 대학도 현장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지식인들에게 대학은 ‘현장’이 아니다. 80년대 지식인들처럼 90년대 지식인들도 ‘공장’과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지만 차이가 있다. (전자가 ‘우리’ 문제로 ‘어떻게 국가와자본의 전략을 깨뜨릴 것인가’가 고민이었다면, 후자는 ‘그들’ 문제로 ‘어떻게 노사정의 갈등을 줄이고 조화롭게 만들까’가 고민이다.)
두 번째, 지식인들은 자기 삶의 현장을 상실했다. 이들은 자신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에 대한 대자적 의식은커녕 즉자적 의식도 없다. 자기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는지 자기 삶의 양식은 어떤 것인지 문제의식을 발견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지식 생산에 대한 자각도 크지 않다. 자신은 어떤 지식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프로젝트는 누가 준 것인지, 그 결과는 지금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 보다, 그냥 프로젝트만 따는데 관심이 있다.

‘현장’에서 비롯된 아마추어의 불온한 사상과 프로의 안전한 사상

‘현장’의 상실은 지식의 ‘불온성’ 상실을 가져온다.
현장을 상실한 지식인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그것은 전혀 불온하지 않다. “대학의 사상가들은 왜 위험하지 않는지 아는가”(니체)에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어 답한다면 “긴급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결의 즐거움을 위해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예컨데, ‘맑스주의와 근대성’ 이라는 주제로 90년대 초중반에 많은 세미나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절박했던 만큼 일정한 실천적 귀결을 낳았다. 연구의 질로만 보면 지금의 근대성 연구가 훨씬 높다. 당시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렸던 많은 것들 속에 지금은 아주 이질적인 결들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당시 허점투성이 연구가 사상으로는 훨씬 강력했다.
그것은 사상으로서 작동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지금의 근대성 연구는 소소한 즐거움은 줄지언정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불온한 사상과 프로의 안전한 사상. 오늘날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지식인의 역할은 자신을 대상과 도구로 만드는 권력형태들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

지식인들은 세계로부터,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전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대중들의 구체적인 삶은 총체적이기보다 부분적이고 파편적이다. 지식인들이 공동체 전체, 세계 전체의 ‘정신’으로 표상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권력은 전체적 또는 총체적 비전을 중점적으로 개발한다. 즉 억압의 모든 현존 형태들은 권력의 관점에서 쉽게 통합된다. 그러나 권력측이 통합하려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이는 중심주의의 대표적 형태들과 위계적 구조를 복구시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방계적 연합과 네트워크 체계, 그리고 대중적인 기반들을 구축해야 한다. 지식인들이 ‘의식’과 담론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생각이 체계의 일부를 형성한다.” (들뢰즈, 「푸코와의 대담」, 1973.)

“지식인의 역할은 집단성의 억눌린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앞에 그리고 옆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지식, 진리, 의식, 담론의 영역에서 자신을 대상과 도구로 만드는 권력형태들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론은 실천을 표현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또 그 적용을 돕지 않는다. 이론은 실천이다. 우리는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을 약화시키고 권력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이론은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하는 행위이지, 안전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 「푸코와의 대담」, 1973.)
덧붙이는 말

이 자료는 한국양성평등연대(평등연대)가 제공합니다. 평등연대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와 부르주아적 급진여성주의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시민네트워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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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쿨워터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은 거의 과거형이 돼버렸어요
    마치 김지하처럼 말입니다
    미래지향적이 아니라 과거나 파먹고 사는 지식기사죠
    할 일은 태산인데 교수들은 상아탑에서 배두드리며
    소일거리로 진보를 논하죠
    고병권의 말처럼 자신이 국가대사를 맡은 것처럼
    사고하면서 해결사가 되려고 해요.
    덕분에 놈현이 살판 났지만...
    계급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지식기사들이
    양주마시면서 노동자 비정규직을 말하니 우습습디다.
    앞뒤가 안맞는 이 기사들은 아예 딴나라에서 노는 게
    나을 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