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부시-체니 행정부가 쿠데타를 통해 석유 자원이 풍부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Hugo Chávez)를 축출하려 한 몇 달 뒤, 훨씬 더 작고 가난한 볼리비아는 수자원 사유화에 대한 대규모 항의 속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당시 볼리비아의 물 공급은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기업들에 매각되고 있었다.
결국, 미국 국적의 귀족 혈통을 가진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Gonzalo Sánchez de Lozada)가 22%의 득표율로 6자 대결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의 후보 지명은 1990년대 초반부터 클린턴 가문을 위해 일해 온 정치 컨설팅 회사 그린버그 카빌 슈럼(Greenberg Carville Shrum)에 의해 조율되었다. 하지만 산체스 데 로사다의 임기는 14개월 만에 끝나고 그는 마이애미로 도망쳤다. 그의 몰락은 수자원의 지속적인 사유화, 가스 가격 인상, 생계형 농부들—특히 코카잎 재배 농부인 코칼레로(cocaleros)—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촉발된 폭동 때문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던 노동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인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는 2005년 압도적인 지지로 권좌에 올랐다. 이는 안데스 국가의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원주민 출신이 대통령에 오른 순간이었다. 이는 특히 인구의 4분의 1이 완전한 원주민이고, 추가로 3분의 2가량이 어느 정도 원주민 혈통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모랄레스 행정부는 물과 기타 주요 자원을 국가 통제 아래 되돌리는 데 집중했으며, 동시에 소규모 산업화, 토지 개혁, 보건, 교육, 그리고 가장 가난한 시민들을 위한 사회 복지 지급에 대한 공공 투자를 추진했다. 그의 포괄적인 원주민 운동(Indigenista movement)은 경제학자, 노동 지도자, 사회학자 및 역사가들에 의해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에보 모랄레스는 여느 정치인처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비난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불안정한 환경 정책 기록, 권위주의적 성향, 그리고 성추행 의혹으로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상징하는 운동은 500년이 넘는 원주민 저항, 권력, 사회 복지, 그리고 연대 구축의 성공적인 결실이다.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 출처: 위키미디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현대 국가들이 형성된 이후 원주민 출신 국가 원수는 거의 없었다. 수세대 동안 "백인의 의무"(White Man’s Burden, 영국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1899년에 발표한 시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유럽인들이 ‘미개한’ 비서구권 민족들을 문명화하고 그들에게 서구의 가치와 제도를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상)는 소위 '야만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해왔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관할 지역에서 원주민 역사가 가르쳐진다고 해도 이는 연민 혹은 노골적인 멸시의 시각으로 다뤄진다.
그 서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백인 유럽인은 순진한 주인들 덕분에 생존법을 배우고 나서는, 총, 병원균, 그리고 강철로 원주민들을 파괴했다. 이후 생존자들은 보호구역으로 밀려났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기린다.
학부 수준에서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접근이 이루어진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공 학생들은 과거의 잔혹 행위와 현재 진행 중인 부당함에 대해 탐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기관조차도 계속되는 확장주의, 폭력적인 자원 채굴, 그리고 가속화된 민족 청소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앨라배마에서 퀘벡에 이르기까지, 미국 대학 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Universities) 회원들은 종종 재개발 예정 부지에 위치한 미표식 원주민 묘지 훼손 조사에 대해 부패하고 인종차별적인 법원 체계를 활용해 이를 중단시켜왔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대학 시스템은 지역의 원주민 과거와 현재를 고려하는 데 더 나은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재정 지원과 필수 기반 시설이 부족하며, 수업 시간이 제한된 교육 시스템에서는 원주민, 스페인인, 독립운동 사이의 수많은 전투를 암기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는 역사를 보다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것보다 우선시된다.
특히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일부 국가의 당국은 이러한 역사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꺼려한다. 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와 같이 유럽계 인구가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민족 청소의 역사가 그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과 원인을 연속적으로 검토하지 못하는 교육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뿌리를 단지 형식적으로만 다루게 만들며, 노예제, 대규모 강간, 토지 강탈, 강제 이주라는 공포를 바로잡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막는다. 이러한 위선의 사례로는 학계와 법조계에서 활동하며 원주민 혈통을 주장했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D-Mass)이나, 캐나다의 첫 국가 진실과 화해의 날(National Truth and Reconciliation Day)을 선언한 후 원주민 장로들과의 만남을 생략하고 서핑 휴가를 떠난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 총리를 들 수 있다.
2019년, 멕시코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는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에게 스페인 식민지 범죄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행정부(올해 종료)는 원주민 환경운동가 살해가 계속되고, 원주민 여성과 소녀들이 피해를 입는 여성 살해(femicide) 증가를 겪었다.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는 현대 멕시코를 "완벽한 독재"라 묘사하며, "그 서한은 자기 자신에게 보냈어야 했다"고 비꼬았다.
이 대륙의 원주민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존중과 복합적 이해는 부족한 상태다. 동시에 우리는 과거 식민지 부정의를 현대 범죄를 무시하거나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시온주의 및 연관 단체들—복음주의자, 유대인 우월주의자, 무기 계약자, 반유대주의적 세계 지도자들—이 홀로코스트를 무기화하여 가자지구에서 진행 중인 집단 학살과 원주민 팔레스타인 및 레바논인들의 토지 강탈을 정당화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미국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는 이를 능숙하게 수행했다. 그는 원주민 단체와 청소년 그룹과 사진을 찍으며 주목을 받는 한편, 그의 정부는 이스라엘 정착민 식민 프로젝트에 수십억 달러 상당의 폭탄을 지원하여 최근 기억 중 가장 큰 어린이 학살을 가능하게 했다.
출처: Unsplash, Andrew James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종종 단순히 선거를 위한 이해관계 집단이나 경찰 통제를 필요로 하는 2등 시민으로 취급받는다. 예를 들어, 1867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캐나다의 국가 경찰은 준군사 조직으로 활동하며 수십만 명의 원주민 어린이를 납치해 기숙학교 체제로 보내는 일을 담당했다. 이 기숙학교 프로그램을 감독하던 이들은 종종 어린이를 강간, 살해, 고문했으며 처벌받지 않았다.
1960~80년대에 법무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한 피에르 트뤼도(Pierre Trudeau)는 이러한 전환의 상당 부분을 감독했다. 그의 아들인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는 2015년부터 총리직을 수행하며 원주민과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s) 주민들의 표와 부족 지도자들과의 동맹을 통해 장기 집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그의 사과 담화와 제한적인 현금 지원은 원주민 보호구역 방치와 원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환경을 경시하는 그의 행정부의 행동과는 상반된다.
캐나다만이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의 국가에서 원주민 공동체는 사실상 경찰 국가의 체제 속에서 기능해왔다. 과테말라에서는 마야인들을 상대로 미국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고 무기를 제공한 죽음의 부대가 집단학살을 저질렀다. 파나마, 브라질, 아르헨티나, 그리고 네바다주에서는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가 그들의 토지에서 강제 이주되었거나, 구리와 리튬 광산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물이 오염되었다. 이 금속들은 환경을 고려한다고 자부하는 부유한 소비자들이 운전하는 전기 자동차에 사용된다.
이 같은 억압적 정부 정책의 근저에는 인정되지 않는 인종차별과 이윤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와 원주민 청년들이 지역 당국과 충돌하면서 느끼는 좌절감은 단순히 그 두 가지 요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역사적 무지도 책임이 크다. 500년 넘게 지속된 원주민 저항의 역사가 주류 담론과 기억에서 배제된 결과, 원주민에 대한 멸시와 비인간화, 그리고 그들의 역량과 회복력에 대한 무시가 가능해졌다. 요약하자면, 이러한 무지는 허구적인 신화를 만들어냈고, 이 신화는 우월주의와 폭력의 시초가 되었다.
핀란드 역사가 페카 햄앨래이넨(Pekka Hämäläinen)의 저서 ⟪원주민 대륙⟫(Indigenous Continent)에 따르면, 문학과 영화에서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는 종종 불가피한 것으로 묘사되며 원주민들은 단순히 배경 역할로 축소된다. 그러나 실제로 북미와 남미의 원주민들은 약 400년 동안 식민지 개척자들을 막아냈다. 비록 총을 생산하지 못했고 유럽에서 들어온 전염병에 시달렸음에도, 아메리카의 부족들과 원주민 제국들은 잔혹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이는 원주민 저항의 진정한 역사를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현재의 서사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다.
콜럼버스의 도착 이후 펼쳐진 저항은 푸에블로스 오리지나리오스(pueblos originarios, 원주민 공동체)의 패배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햄앨래이넨(Pekka Hämäläinen)이 제공한 수백 가지 일화 중 하나는 강력한 백인 무역업자 앤드루 마이릭(Andrew Myrick)에 대한 이야기다. 1862년 미네소타 영토에서 독일계 정착민들은 다코타족(Dakota)의 땅을 침범하여 그들의 사냥, 어로, 야생 쌀 채집 능력을 파괴했다. 마이릭은 새로운 정착민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코타족의 원로들이 그의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배고프다면 풀을 먹으면 되지.”
다코타족은 전쟁을 일으켰다. 마이릭은 첫 번째 목표가 되었고, 그의 잘린 머리는 풀로 채워진 채 발견되었다. 전쟁은 결국 정착민들에게 패배로 끝났지만, 잘 먹고 무기로 무장한 약 500명의 백인 병사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메이저 존 포프(Major General John Pope)는 다코타족 여성과 어린이를 겨냥해 강간과 수용소 건설을 감독했다. 그는 다코타족을 “미치광이 또는 야수처럼 취급해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과 이스라엘 관리들이 여전히 사용하는 언어와 흡사하다.
이러한 잔혹성은 여러 대중 역사가들에 의해 오랫동안 애도되어 왔다. 그러나 햄앨래이넨은 이러한 학살이 강함이 아닌 약함의 표시라고 주장한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았고, 그들은 지형을 잘 알지 못했으며, 종교적 정복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침략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햄앨래이넨은 이렇게 썼다. “원주민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하고, 원주민 시신을 훼손하며, 순전한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힌 그들의 행위는 식민지 개척자들 스스로를 문명화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을 흔들었다.” 종종 청교도 백인들은 서로를 악마로 간주하며 야만성과 광기로 빠져들었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마녀사냥과 화형 사건이 종종 원주민 경계 근처에서 발생했다는 점과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볼리비아와 같은 나라들이 땅의 뿌리를 재확립하면서 인종적 포용성을 선택한 현대적 사례를 제공하는 반면, 미국과 그 캐나다 및 유럽 파트너들은 더욱 야만적인 방향으로 빠져들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시골 지역 인구를 향한 무관심하고 자원에 굶주린 잔인함을 넘어, 이는 특히 레바논과 점령된 팔레스타인 난민 인구에 대한 융단폭격으로 드러난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정착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땅에서 쫓겨나고 있다. 이들은 모든 식민지 프로젝트의 돌격대처럼 강간과 고문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팔레스타인 이야기는 현지와 망명지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보고를 통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보다 앞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와 이브라힘 아부-루고드(Ibrahim Abu-Lughod)와 같은 학자들,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와 조지 하바쉬(George Habash)와 같은 전사들, 그리고 시인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와 같은 투사 작가들이 있었다. 평화 시위, 글쓰기, 무장 저항이 모두 손을 맞잡고, 점점 잠식당하는 고국의 가장자리에서 투쟁해왔다.
이 역사는 전 세계에 걸쳐 전해졌으며, 현재도 끊임없이 기록되고 있다. 이는 원주민의 현실을 두려워하는 전통적 매체와 기관에서만 사라진다. 여기에는 신화가 없다. 정착민 식민주의의 가장 기술적으로 파괴적인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다.
반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원주민 역사가 종종 "완료된 비극"으로 간주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는 지배자들에게 큰 안도감을 준다. 토지 인정 의례는 종종 무기와 광산 회사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같은 기관들에 의해 남발된다. 이 기업들은 여전히 원주민을 학살하고 그들을 추방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인 발언은 역사 수업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저항의 오랜 세월과 잦은 승리, 그리고 현대적 부활을 부정하는 독을 품은 신화를 번성시킨다.
사회가 제국의 낭만화와 위대함의 환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만약 몬트리올, 워싱턴 D.C., 멕시코시티, 페루의 리마, 그리고 콩고의 킨샤사에 세워진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의 동상을 제거하고, 대신 자유 투사나 부족 간 노예제를 실행했던 죽은 추장들의 동상으로 대체한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에서 이러한 변화가 과연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동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남부연합 장군과 노예주들을 기리지만, 그 동상이 세워진 도시들의 시장이 종종 노예의 후손인 경우도 많다. 이러한 작은 기념물들은 이제 단지 낡고 귀여운 장식품으로 여겨질 뿐이다.
페루의 원주민이거나 미국의 흑인으로서 이러한 동상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고통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러한 동상은 단순히 유물일 뿐이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들은 오래된 체제, 지친 역사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리마 중심부에서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의 동상을 철거하고, 정복 이후 역사 속에서 반란을 이끌었으며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던 원주민 인물의 동상을 신중히 세운다고 상상해보자. 이 사건은 며칠 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고, 견학 온 학생들에게 몇 주간 흥미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간이 현실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부서지고 녹슬어가는 돌과 쇠의 외형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대신, 우리가 떠난 후 이 세상을 물려받을 이들에게 저항의 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같은 해방의 싸움을 이어온 이들을 대변하는 데 더 용기를 낼 수 있다.
전투의 이름과 날짜를 기억하려 애쓰거나, 다른 세계에서의 생명 손실에 대해 공허하게 애도하는 대신, 우리는 안데스와 팔레스타인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이 계속될 수 있도록 힘을 쏟을 수 있다. 우리가 물을 빼앗기고, 아이들이 불에 타고,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새로운 지배자들을 더는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투쟁의 기억과 연대는 오래된 역사를 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해방의 싸움에 힘을 보탤 것이다.
[출처] The Untaught History of Indigenous Resistance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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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빅 자인 챗라니(Avik Jain Chatlani)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칠레에서 자란 역사가이자 작가입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