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쿠데타와 계엄에 꺾인 민주노조 건설 흐름
4.19혁명은 노동현장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59년 말 559개 노조, 28만 명이었던 노동조합 조직률이 1960년 말에는 914개 노조, 32만 명으로 늘었다. 중소기업은 물론 언론, 은행, 교원 등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계엄령 아래 이미 설립되어 있던 모든 노동조합을 해산시켰다. ‘국가재건최고위원회 포고령 제4호’는 정당을 포함해 사회단체 등의 모든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군사정부의 노동조합정책의 핵심은 ‘기존 노동조합의 해체, ’‘산별체제로의 재편, 정치활동의 금지, 복수노조의 금지’등이었다. 최초의 조치는 “노임은 5월 15일의 수준으로 유지하고 노동쟁의를 일절 금지한다”는 것이었다.(1961년 5월 19일 계엄사령부 공고 제5호 ‘경제질서 회복에 관한 특별성명서’) 5월 21일에는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의 즉각적인 해체를 명령했다.(‘포고령 제6호’)그리고 8월 3일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노동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그리고 8월 4일 노동조합의 재편은 “전국 단일 산별노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표명함으로써 복수노조 체제를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보건사회부 장관,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공포에 제하여’ 담화문)
이미 6월에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노조 재편의 임무를 담당할 핵심세력으로 각 산별조합의 대표 9명을 지명하고, 8월 4일 이른바 ‘9인위원회’로 알려진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재건위)를 구성하였다. 이후 군사정부와 행보를 같이하는 한국노총 시대가 열렸다.
12일만에 비상계엄은 경비계엄으로 대체되어 558일간 이어지다가 해제되었다. 하지만 노동을 향한 계엄은 이어졌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각각 개정하여 자신이 설계한 노동조합 체제를 법적으로 완성했다.
전두환 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와 노동운동 탄압
10.26사태 이후 계엄 상황을 뚫고 노동자 투쟁이 급증했다. 70년대 중후반 연간 평균 100여 건에 머물던 노동쟁의가 1980년 상반기에만 407건(대부분 5.17계엄 확대조치 이전)으로 급증했다. 4월 25일에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해 ‘해고자복직, 노동3권 보장’을 요구했다. 5월 13일에는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에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국노총 강당에서 노총 민주화를 요구하며 농성했다. 노동자들은 5월 15일 농성을 자진 해산했는데 곧바로 5.17 군사계엄 확대와 함께 광주는 군홧발에 짓밟혔다.
이후 노동계 정화조치를 통한 전두환 정권의 민주노조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8월 21일 ‘노동조합 5대 정화지침 전달’이라는 노동청장의 공문, 8월 27일 ‘노동조합 정화지침 보완’ 공문이 한국노총에 발송되었다. 그 내용은 ‘조직분규와 반조직행위 금지, 지역지부 폐지와 보고 시기 강제, 상급단체 파견 금지, 일정 기준 이하 노조 임원 자격 박탈과 사퇴, 조합비와 각종 기금 사용에 대한 노동청 관리 감독 아래 관리와 허가 후 사용’ 등이었다.
전국 지역지부 114개가 해체되어 조직된 노동자 수는 14만 명이 줄었다. 노동조합은 준행정기구로 전락했다. 노조 간부들은 사표를 강요당하고 노동운동에서 배제되었다. 그 규모는 191명(정화대상자 121명, 자진사퇴자 70명)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한국노총 민주화와 농성을 주도했거나 개별기업에서 단체행동을 추진했던 일선 지부장, 분회장 및 상집간부, 대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정화된 노동조합 간부의 노조활동 금지 지침’(11.4.)에 의해 3년간 노조활동을 금지당했다. 심지어 보안사는 7월과 12월 노동운동가들을 강제연행했으며 그중 일부를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이어 신군부정권은 1980년 12월 31일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이 제정, 공포했다. ‘기업별 노동조합의 강제,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의 설치, 노조설립요건의 강화, 단체교섭권의 위임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연장, 냉각기간의 연장, 노조운영에 대한 행정개입 확대, 노조간부의 경력과 노조비 사용제한, 공익사업 범위확대, 직권중재 대상확대, 노사협의회법의 신설’ 등이었다.
1981년 1월 24일 계엄은 해제되었지만, 노동운동은 극심한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조합원 수가 1980년 초 100만여 명에서 7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노동쟁의도 1982~83년 2년 동안 45건에 불과했다. 파업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노동자의 시간
노동 부문에 있어서는 윤석열 정권의 임기 자체가 계엄이었다. 투쟁사업장의 경우, 공권력이 남용되는 것은 물론이요 노동 3권이 파괴되는 것은 일상이었다. 윤석열 정권 하에서 민주노조들은 정권 내내 사회정치적 고립과 배제에 시달렸고, 노동운동은 종북공세를 비롯한 무자비한 탄압에 밀려 속수무책이었다.
12.3 비상계엄 선포 후 발표된 포고령 1호 4는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고 했다. 비상계엄은 국회의결로 해제되었지만, 계엄의 총부리는 여전히 투쟁하는 노동자를 위협하고 있다. 인원 충원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철도노조로, 안전운임제 다시 하자는 화물연대로,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해소 그리고 차별 철폐를 외치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에게로.
윤석열의 계엄은 언제나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노동현장의 계엄은 사회 전체로 확장하고 있다. 헌법이 추구하는 노동자의 존엄, 사회 전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 온 것이다. 지난 역사에서 진화하고 반복해온 계엄의 시간을 이제 완전히 끝내야 한다. 윤석열의 시계를 멈추고 노동자의 일상, 노동자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노동자의 삶을 되찾는 생존권 투쟁, 총파업 투쟁에 함께하자.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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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재는 노동자역사 한내의 운영위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