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광화문과 명동, 종로

[단식일지3] 2004년 8월 11일

아침

하루가 다르게 아침 공기가 차갑다. 마침 이 무렵에 단식을 해서 그런지 요사이에는 눈을 뜨는 시간이 일러졌다. 평소 내 생활습관대로라면 서너 시간을 일찍 시작하고 있는 거다. 이상할 만큼 몸은 가볍다, 마음도 상쾌하다.

내가 사는 죽변 시골집은 문 앞이 바로 산이다. 그렇다고 갑갑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훤히 트여 있는 낮은 산. 내가 세를 들어 살고 있는 집 또한 이 편 나지막한 비탈에 있는지라 문 앞에 나가 내다보면 그 풍경이 날마다 새롭다. 꼭 문 앞에 나가지 않아도 창으로 바로 산이 건너다 보인다. 산을 아는 사람들이야 다 아는 말일 텐데, 산은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산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표정을 바꾸면서 온갖 얼굴을 한다. 그러다 보면 산은 나를 어디론가 이끈다. 나도 모르게 산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산이 내가 되고, 내가 또다른 내가 되어.

그곳은 광화문과 명동, 종로

아직도 아이들은 팔레스타인 호텔과 쉐라톤 호텔 둘레에서 외국인들을 따라다니고 있을까? 외신 기자들이 주로 모여 있던 그곳, 일급 호텔 들 둘레라면 아이들이 있기에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조금씩 테러 위협이 높아질 수록 미군과 미군의 지휘를 받는 이라크 경찰은 우선 그곳 둘레부터 감시하기 시작했다. 누구든 용의자, 누구든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 그러한 원칙이 이라크 땅에서는 어느 곳보다 더욱 심하다. 아니, 실제로 점령군들에게 원주민들은 용의자니 범죄자니 하는 말 차원이 아니라 누구든 ‘적’이 되고 있겠지. 전쟁터, 내 편으로 확인이 되지 않으면 누구든 적이 되는 전쟁터이니 말이다.

내가 떠나오던 때까지만 해도 그곳 일급 호텔 둘레에는 점점 부랑자들 통행을 막는 철조망과 감시가 심해지고 있었다. 작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금 이어지고 있는 테러들에 대면 그 피해나 규모가 아주 작다고 말할 만한 정도의 도발이 한 번 있고 난 뒤 미군의 호텔 둘레 경비는 아주 삼엄해졌으니 말이다.

호텔 둘레 말고 아이들이 잘 가던 곳이라면 타흐리 광장 쪽으로 통하는 사둔 스트리트나 가라데 정도였다. 8월 7일 동화가 보낸 일지를 보면 가라데 쪽에서 굉장히 큰 폭발음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쉐라톤 호텔 가까이에도 커다란 폭탄 공격이 있어서 살람 아저씨가 만나러 올 수 없다고 소식을 전해왔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다. 이라크의 상황은 전쟁 시작부터 지금까지 점점 더 나빠지고만 있다. 하지만 자꾸만 나는 나도 모르게 잊어가고 있다. 국내 언론들 또한 이라크의 지금 시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는 그만큼 힘을 다하지 않고 있다. 다만 국내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을 법한 뉴스에만 지대한 관심을 둔다.

더구나 보수 언론 같은 경우는 석유 개발권을 비롯한 기업의 이라크 진출에 관련 뉴스가 그들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다. 바그다드의 현재 그 모습을 서울에 견준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그 일들은 그저 어디에 폭탄 공격이 있다더라, 어디에서 테러가 있었다더라 하고 말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싸담 구역이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한 뒤의 바그다드에서 팔레스타인 호텔과 쉐라톤 호텔 둘레라면 서울의 세종로나 광화문에 해당할 만한 곳이다. 가라데 구역은 서울의 명동 쯤, 싸둔 스트리트는 종로 거리 쯤 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건물을 태우는 폭발물이 터지고 있고, 통행을 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이라크의 문제는 그러한 실감과 함께 여겨지지 않았다. 폭탄 테러로 사람이 죽어도 십 수명은 죽고 다쳐야 겨우 몇 줄 짜리 단신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라크를 둘러싼 점령국이나 파병국들의 움직임, 이라크 임시정부나 저항군의 움직임, 계획 따위를 따지고 살펴주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 한국군 파병에 직접 영향이 되는 환경을 전해주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하다. 허나 아쉬운 건, 그러한 뉴스와 기사들이 점점 실감과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적어도 세상의 문제를 커다란 틀에서 들여다보는 걸 잘 할 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느끼기에는, 그저 또 나와는 멀기만 한 정치 관련 뉴스 그것도 먼 나라의 뉴스 정도로밖에 말이다.

실감, 그거야말로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일 것이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힘. 자연스럽게 그이들과 내가 하나가 되고, 그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이들의 자리에서 판단하게 하는 힘. 그래서 지난 4월 팔루자 학살이 크게 알려지던 때를 비롯해 5월 아부그레이브의 포로학대가 폭로되던 때에는 사람들이 이 전쟁과 점령에 대해 함께 치를 떨었다. 이 전쟁과 점령 상황이 낳고 있는 참상 그대로. 하지만 그게 단순히 감성을 자극하고 눈물샘을 더 건드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전쟁을 큰 틀에서 살펴 들여다보게 해 주는 것과 동시에 그 땅에 있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겪는 구체적인 현실, 아픔을 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바람이며 안타까움이다.

알라위, 세이프

지난겨울 대학로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할 때도 그랬지만 나는 지금도 음식을 끊고 지내면서 그게 조금 힘겨울 때면 아이들을 떠올린다. 알라위, 레이쓰, 세이프, 핫산, 네벌라쓰…….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들 가운데에는 집이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더 많은 아이들이 집 없이 길에서 산다. 위에서 말한 그 일급 호텔의 둘레에서 살며 외국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지낸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원 달라, 원 달라!” 혹은 손으로 입에 먹을 것을 넣는 시늉을 하며 “푸드, 푸드!” 또는 “머니, 머니!”라 말한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한국전쟁을 겪을 때 “기브미 검, 기브미 초콜릿!” 하던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외국인들, 특히 그런 호텔을 드나들만한 기자나 사업가들에게 1달러는 아주 하찮은 돈이지만 아이들에게 그 돈이면 몇 끼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구두를 닦던 아이들이나 휴지 따위를 들고 다니며 장사를 하던 아이들은 아예 전문 앵벌이가 되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주 돈을 얻지 못하는 날은 몇 날 씩 쫄쫄 굶기가 예사였다. 게다가 더욱 문제인 것은 청소년쯤 된 아이 녀석들은 구걸을 해도 자기들이 직접 하지 않고, 더 어리고 약한 아이들이 얻어온 것을 주먹으로 빼앗고, 본드나 ‘하쉬쉬’라 부르는 마약의 일종에 빠져들고 있는 거였다.

내가 알라위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다. 알라위는 그래도 아주 구걸로만 사는 건 아니고 휴지 더미를 들고 다니며 장시를 했다. 처음 내가 알라위를 보았을 때 알라위는 돌을 집어들고 위협하는 어떤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쉬쉬’를 해서 눈이 풀린 아이들이었다. 알라위를 데리고 한 쪽으로 나오니 알라위는 주린 배를 틀어쥐면서 “푸드, 푸드!” 너무나도 간절히 먹을 것을 원했다. 데리고 들어간 식당, 알라위는 정말 걸신이라도 들린 듯 밥을 먹었다.

봄에 어느 신문 칼럼에서 나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천만 명이나 본 국민이 어떻게 침략 전쟁에 파병을 할 수 있도록 눈뜨고 보아줄 수 있겠느냐는 얘기를 잠깐 한 일이 있다. 그 영화, 거기에서 장동건은 처음에 구두닦이였다. 그리고 장동건 곁에는 아주 정답게 지내는 동생 뻘의 또다른 구두닦이 아이들이 나온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그 구두닦이 아이들 얼굴에 알라위가 레이쓰가 핫산, 세이프의 얼굴이 겹쳐졌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날 그 조그만 몸집의 어린 세이프는 말했다. 아이 원어 고우투 코리아, 위드 유. 아이 원어 고우투 코리아, 위드 유…….

잘들 있니? 잘 먹고는 있니? 미안하다. 미안.

아이들

서울에서 아이들이 내려왔다. 벌써 언니는 중2, 동생은 4학년. 고모네가 가끔 와서 돌봐주기는 하지만 꼬맹이 자매 둘이서 채송화처럼 사는 아이들이다. 아이들하고 본지도 논지도 오래된 데다 방학이라고 어디 한 번 함께 가지도 못해서 마침 회사에서 휴가를 얻은 사과꽃이 아이들과 함께 내려왔다. 많이 컸다, 녀석들. 6월에 광화문 촛불 집회할 때 한 번 같이 가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하루 몇 시간 본 것 빼고는 이렇게 며칠 같이 지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아 재미있게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이지만 단식을 하고 있어 그게 걱정이다. 아이들 먹을거리 하는 것도 그렇고, 물에라도 들어가 놀 것도 그렇고. 그래도 아이들을 만나 너무너무 반갑다. 이 먼 데까지 오다니, 몇 시간 걸렸어? / 여섯 시간. / 우와아, 찬희 울었구나? / 안 울었어. / 와, 바다다. / 오빠네 바닷가야? / 응.

아이들 내려온 시간이 마침 농성장 나갈 시간이어서 아이들하고 다 같이 농성장으로 같다. 시작 시간보다 조금 늦어서 벌써들 우산을 들고, 자리를 깔고, 피켓을 들고 계셨다. 오늘은 사람이 많다. 우연하게도 팔월 초 열흘 남짓 동안은 그 동안 농성장 도우미로 자주 나오던 분들이 연수나 집안 일, 다른 볼일들로 멀리 나가 계셨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 동안 일이 바빠 못나오던 분들이 얼추 다 돌아와서 그런가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 단식자는 모준규, 지자영 선생님 부부와 모미라 선생님, 윤희, 상렬이, 그리고 나. 오전부터 일다 님이 농성 우산을 새로 꾸민다고 열심이더니 색깔이 든 비닐천을 오려 붙이고 매달고 해서 예쁘게 새로 꾸몄다. 오늘 우산을 든 모준규 님은 울진에서 풍물 강습을 하면서 문화 운동을 하는 분인데 여기에서는 누구나 ‘모사부’라 부른다. 모사부가 우산을 들고 선 곁으로 지자영 선생님, 도토리, 햇살, 박영숙 님이 줄을 이어 피켓을 들고 섰다. 집집마다 아이들도 총출동이 되어서 뒤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서울서 온 식구들도 그 곁에 가서 피켓을 들고 섰다. 7월 10일 광화문 집회에 함께 다녀온 햇살 님과 일다 님은 그 때 서울에 가서 바끼통 식구들을 만나느라 사과꽃을 한 번 보아 서로 얼굴을 안다. 함께 인사를 나누고, 채송화 자매들도 인사를 하고 나까지 해서 넷이서 종이학 피켓을 들었다. ‘반’, ‘전’, ‘평’, ‘화’. 한 글자씩. 6월 한달 울진 군민들이 접어 모은 종이학을 붙여서 만든 글씨판. 넷이 그렇게 들고 섰으니 할머니 두 분이서 이쁘다고, 이쁘다고 칭찬이다.

바닷가

햇살 님네 식구에 모사부 님 식구, 그리고 도토리 님에 서울 서 온 손님들까지 모두 저녁을 하러 함께 갔다. 일부러 손님 대접을 한다고 간단히 먹는 밥이 아니라 어쩌다 바깥에서 먹는 그런 음식점을 간 거였다. 상은 근사하게 차려졌고, 단식자 셋은 상 끝에 앉았다. 먹는 사람은 먹는 사람대로, 안 먹는 사람은 안 먹는 사람대로 불편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저 자연스럽게 여기면 그렇게 어울리는 게 더 좋다. 근사한 저녁을 마친 뒤에는 나곡 바닷가로 나갔다. 여기에 살아서 맨 바다 구경을 하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서울서 온 채송화 자매는 아주 좋아라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나도 좋다. 다른 날보다 별이 더욱 많았다. 그 바닷가라고 좋은 음식과 술이 빠질 리가 있나? 바닷사람이 잡아온 석화에 멍게를 놓고 소주를 따랐다. 술이 한 순배 두 순배 돌고, 아이들 뛰어다니며 노는 걸 보다가 노래를 불렀다. 7월 29일 군청 앞에서 파병철회 문화제를 할 때 몇 식구는 노래를 준비해 불렀는데, 햇살 님(한영선 선생님) 식구가 부른 노래는 별음자리 아저씨의 ‘전쟁을 반대해’였다. 밤은 더 어두워졌고, 별은 더 밝았고, 함께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게임을 하듯이 비행기를 몰아 게임처럼 폭탄 떨구면
게임처럼 건물이 무너지고 게임처럼 사람 죽겠지
시커먼 하늘이 번쩍거리면 폭탄들이 유성우처럼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지겠지 게임처럼 게임처럼
전쟁을 반대해~ 전쟁을 반대해~
평화를 사랑해~ 평화를 사랑해~

[단식일지2]반대만 하지말고 찬성좀 합시다. '노무현퇴진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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