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산업가스는 2003년 11월 행정법원의 정규직으로의 복직판결을 아직 이행하지 않은 채 현재 항소가 진행중이며, 노조와는 여전히 교섭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6월24일, 인사동 대성산업가스(구 대성산소) 본사 앞에서는 150여 명의 화학섬유연맹, 민주노총 안산지역 조합원들이 모인 가운데 대성산업가스 연맹 집중 집회가 진행됐다. 한편 대성산업가스비정규노조 연맹 교섭단은 대성산업가스 사장실로 진입해 교섭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해 다음날까지 밤샘 농성을 진행했다. 다음날 사측은 6월 29일 교섭을 약속했으나, 결국 교섭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햇수로 3년에 들어서는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윤효한 대성산업가스노조 부위원장과 그간의 투쟁과정을 들어보았다.
"너희는 정규직이 아닌 용역업체 직원이니 우리랑은 상관없다"
윤효한 부위원장은 2001년 해고 당시 반월 대성산소에서 5년 10개월 째 공업용 가스를 운송하는 탱크로리 운전사로 일했다. 한 달에 20일,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교대제였지만 24시간을 내리 일하거나 날을 세고 다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연봉이 1600여 만원. 반월공장의 대성 정규직 노동자들이 8시에서 5시까지 일하고 3배의 월급을 받기도 하는 엄청난 차이를 보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너희는 정규직이 아닌 용역업체 직원이니 우리랑은 상관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그러나 일정이나 업무지시는 사실상 대성이 다해왔고 윤씨는 자신이 대성의 직원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말이 용역업체지 안산 대성그룹 근처에 사무실 얻어서 책상하나 전화 하나 놓고 업체라죠. 대성 차장 부장 등 중간관리자 사표 낸 후 일인당 차량 3대씩으로 3개 회사를 차리고 소사장이라고 했어요. 아침에 얼굴만 보고 식대랑 고속도로비 타 가는 거 말고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용역회사를 설립할 시 법적인 인가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2001년 대성의 물량을 운송하는 다른 용역업체 운전사들과 8명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함께 한 비정규직노동자들 역시 대부분 5년 이상 대성에서 운전을 했던 사람들이다. 회사는 노조설립 직후 곧바로 관리자와 용역사장 등이 나서서 조합탈퇴를 종용했다.
"그리고는 2001년 10월 31일 용역계약기간이 남아있는데도 우리들이 있는 용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해 용역업체가 폐업되면서 자동적으로 해고됐지요."
2003년 11월 6일 서울 행정법원은 대성산소 노동조합의 불법파견근절과 부당해고 철회요구를 인정했다. 그러나 회사는 "죽어도 노조는 인정할 수 없다. 갈 때까지 가보자"고 버티며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먼저 간 어린 아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지난 3년간 생계의 고통과 사측의 압박에 의한 상처를 어찌 다 표현할까. 그 과정에서 8명이던 동료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위원장과 둘만 남았다.
2002년 접근금지처분 이후 대성본사를 바라보는 윤효한부위원장 |
"천막을 쳤다고 회사에서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는데 수원지법에서 받아 주데요. 당연히 정규직이어야 할 우리를 불법으로 비정규직으로 이용하고 부당해고까지 한 회산데, 회사 100미터 이내에서는 천막도 치지 말고 유인물도 뿌리지 말고 현수막도 걸리 말라는 겁니다. 집회라도 할라치면 회사는 손배 청구하겠다, 재산을 다 빼앗겠다고 협박했죠."
윤씨는 고1, 중1 아이들의 아버지다. 아내가 잡일로 적은 돈이나마 버는 것과 어쩌다 밤에 아는 사람이 부탁하는 대리 운전이다 공항 콜 벤을 대신 몰아주는 수입으로 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윤씨를 부인은 이제 내놓았다고 한다
"통장마다 마이너스가 산더미로 쌓여가지만 그래도 파탄은 아직 안 난 건 아내가 벌기 때문이죠. 혼자 벌어야 하는 집은 반년이면 손드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떠난 거죠. 회사는 그걸 아니까 미루고 미루고 우리가 지쳐 떨어 질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떠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등 떠밀려 울며 떠나고 남겨진 두 사람이 처절히 투쟁에 밀리는 사이 아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밖으로 나갔고 아이들은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작년 11월 17일 곽민형 위원장의 12살 외아들이 12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한 사람만 더 있어도 위원장님이 여기 있으면 안되죠. 내려가셔서 사모님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데.."
아들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고이는 위원장을, 틈만 나면 정신이 나간 듯이 있는 위원장을 지금 더 힘든 상황일 아내의 옆에 있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윤씨는 너무 아프다고 했다.
작년 11월 6일 행정법원 승소 판결, 사측의 승계거부, 11월 17일 곽위원장 아들 사망. 윤씨는 직접적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정당한 복직요구와 정규직으로의 승계를 외면한 대성산소 자본도 결코 아이의 죽음과 무관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상처를 헤집을 수 없어 차마 곽위원장에게 저간의 사정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곽위원장에게 이 싸움은 이제 더 이상 고용승계 싸움만이 아닌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 아닐까 생각했다.
"알짜배기 흑자 기업에서 두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복직 문제를 3년을 넘게 그것도 법에서 인정한 복직을 안 받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대성은 대성석탄 그룹으로 시작해 작은 단위 계열사 50개를 거느린 알짜배기 회사다. 윤씨는 대성그룹이 IMF때도 까딱없는 흑자 기업이었다고 했다.
"회사가 진짜 어려워서였다면 이렇게 물고늘어지지도 않습니다. 근데 대성에서는 똑같은 형태로 소사장제에 용역을 부리고 있습니다." 죽어도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회사의 말. 결국 두 명의 노동자를 복직시키는 비용의 몇 수십 수백의 비용이 들더라도 정규직화의 선례만은 남길 수 없다는 것이 회사의 의도라고 윤씨는 분개했다. 그 과정에서 가정이 파탄나고 사람이 죽어나가더라도 말이다.
버티는 이유, "비정규직도 승리할 수 있다"
"더 많은 싸움에 가서 연대 해야되는데 조합원이 둘이서 우리 일마저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아쉽죠. 조합원 둘이서 싸우는 거니 움츠리고 뛸 여력이 없는 거죠. 워낙 자체동력이 약하니까 연대요구도 어렵고 요구에도 사실 한계가 있구요."
시골서 농사짓다 오른쪽 검지를 절단 당하고 외국서 막일을 하다 귀국해 늦결혼을 했다는 윤씨. 대성에서 알뜰살뜰 아이들 키울 저축하며 일하고 싶었던 그. 도무지 비정규직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윤씨가 3년여 장기투쟁의 생존자로 남았다.
"이 싸움 꼭 승리할 겁니다. 비록 두 명이 함께 하지만 지노위, 중노위, 재판까지 가서라도 비정규노조도 끝내는 승리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후발 비정규직 노조가 우리처럼 벼랑에서 투쟁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게 정말 제가 버티는 이유입니다."
집회장 한 켠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윤씨는 삼일동안 노숙을 해서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날거라고 연신 미안해했다. 윤효한씨에게서는 가진 것 없이 태어나 남의 것 억지 탐해본 적 없는 노동하는 자의 땀내음, 마땅한 자신의 것을 찾고자 맨몸으로 싸우고 있는 이 땅 진정한 사람들의 삶내음이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행정법원 대성가스 불법파견인정, 정규직 복직 판결 | ||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003년 11월6일, 2년을 넘게 끌어오던 대성산업가스(구 대성산소)의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사건에 대하여 “정규직으로 복직”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서, 대성산업가스비정규노조(구 대성산소용역기사노조, 위원장 곽민형)의 주장이 정당함을 인정했다. 행정법원은 "불법파견의 경우 형식을 사내하청 혹은 용역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 해도 사용사업주가 직접 고용한 것으로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곽씨 등의 사용자는 D사가 아니라 용역업체이므로 D사로부터 부당하게 해고당했다는 주장은 이유 없다’고 주장하나 이 용역업체는 모든 업무처리에 D사의 통제를 받았으므로 사실상 D사의 부서나 마찬가지”라며 “D사와 곽씨 등 사이에 실질적 근로관계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용역업체는 곽씨 등과 매년 계약을 갱신해 오다 이들이 만든 노조가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시점에서 ‘사업부진’을 이유로 폐업을 선언하고 해고한 것은 D사가 노조활동을 이유로 이들을 부당하게 해고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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