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어느 가게에 놓인 스포츠 신문을 보다가 오늘 밤 아테네 올림픽을 개막한다는 걸 알았다. 요사이에는 텔레비전은 물론 종이 신문을 통 볼 수가 없었으니 그 쪽에는 아주 깜깜했다. 면면마다 지면 가득 올림픽에 대한 특집기사들이 있다. 올림픽, 월드컵, 나도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리면 좋아하는 종목을 빼놓지 않고 보던 편이었다. 더구나 결승이나 메달을 앞둔 마지막 경기에서 드라마틱하게 역전과 재역전을 되풀이하는 장면이라도 나오면 숨이 막히도록 흥분이 되고 손에 땀을 쥐었다. 운동 경기, 그 자체로 무엇이 그리 나쁘겠나? 돈에, 권력에, 패거리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세상의 승부들에만 질려하다가 그나마 정직한 승부, 최선을 다하는 모습,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 지켜지는 게 운동 경기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운동 경기에 더욱 매료되는 것 같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올림픽이 내걸고 있는 표어 가운데 하나가 ‘전 세계인이 함께 하는 평화의 제전’ 어쩌고 하는 말을 어려서부터 질리도록 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그 말이 그럴듯해 보였다. 개막식을 보면 그 많은 나라의 선수단이 저마다 적게는 수십에서 수백 명씩 줄을 지어 경기장에 입장한다. 올림픽 말고 세상 어떤 모임에 그 많은 나라의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 가지 일을 도모하는 게 또 어디에 있나? 그야말로 세계인들이 함께 하는 축제라는 말이 정말 그럴 듯해 보였다.
오늘은 따로 뉴스를 검색해 보지 못했는데 지금 YTN을 켜니 자정에 하는 프라임 뉴스가 막 시작했다. 역시나 첫 뉴스는 몇 시간을 앞둔 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이야기다. 아나운서와 기자가 들뜬 목소리로 올림픽 개막을 이야기하고, 개막식의 사전 행사를 소개하는 동안 화면 아래로는 이어질 뉴스 제목들이 줄줄이 지나갔다. 미군이 나자프와 쿠트에 총공세를 퍼부어 165명이 죽었다고 한다. 시아파 지도자 알 사드르가 부상을 당했다는 제목이 그 뒤를 이었고, 아랍국들이 미국에게 나자프에 대한 공격 중단을 촉구했다는 제목 들이 뒤를 이었다.
한 쪽에서는 공습과 폭격으로 160명이나 되는 이들이 하루아침에 죽어나가도, 한 쪽에서는 ‘전 세계의 평화’를 내걸고 잔치를 벌인다. 이라크의 하늘에는 미사일 공습의 불꽃이 솟고, 아테네의 하늘에는 온갖 화려한 폭죽이 수를 놓는다. 양심이 있다면 적어도 ‘평화’라는 말은 쓰지 마라. 폭격의 잿더미 아래 깔려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짓이겨진 사람들의 신음이 들리지 않는가?
이 전쟁의 가장 큰 책임은 물론 부시와 미 행정부, 그리고 한국의 노무현 정권을 비롯한 침략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정권들에게 있지만 나자프의 미사일을 외면한 채 아테네의 폭죽에 환호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다. 분명 이 올림픽에도 눈물을 짓게 하는 장면, 드라마틱한 경기와 선수들의 뒷얘기들이 있을 것이다. 눈물을 짓게 할 이야기도 있을 거다. 허나 아테네에서 벌어지고 있는 운동 경기 앞에서 손에 땀을 쥐는 사이 나자프, 바그다드, 팔루자에서는 땀이 아니라 피가 터져 죽어가는 이들이 이어질 것이다. 아테네의 짜릿한 승부에 온 마음을 빼앗기는 사이 이라크에 사는 이들은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무책임한 추측이 아니라 오늘만 해도 그렇다. 전 세계에서 모인 운동선수 몇 천 명, 그리고 관객 십여만 명이 모여 축제의 불꽃을 터뜨리고 있을 때, 나자프에서는 오늘 하루 165명이 미사일 공습으로 비명과 함께 죽어갔다.
YTN 화면 바닥으로는 계속해서 한 줄 뉴스가 지나간다. 기름값 오르는 게 ‘오일쇼크’ 때에 버금간다는 제목이다, 그 뒤로 기름값 오름세 때문에 물가가 엄청나게 압박을 받을 거라는 뉴스다. 정말 이것저것 다 버리고 ‘경제동물’의 입장에서라도 석유를 둘러싸고 벌이는 이 전쟁과 점령은 어서 끝내게 해야 한다. 파병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반전이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니 기업도 어서 ‘파병철회, 점령군 철수’에 나서기를 권한다. 전경련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더 많은 이윤이 목적이더라도 당장 반전의 대열에 함께 해야 한다.
울진평화모임
오늘 단식자는 권일 선생님과 권미희 선생님 부부. 권일 선생님이 사는 후포는 울진읍에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인데 군청 앞 농성을 하러 나오셨다. 그리고 그 둘레에 바라 님 부부와 일다 님 부부, 햇살 님과 도토리 님, 박영숙 님 들이 함께 섰다. 나는 농성장으로 나가는 게 삼십 분 정도 늦었는데 바쁜 걸음으로 서둘러 가고 있는데 피켓을 들고 선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모금함에 돈을 넣으며 함박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 보면 그저 신이 난다, 힘이 난다.
시위를 마친 뒤 다 같이 군청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울진평화모임 두 번째 회의. 군민 릴레이 단식과 군청 앞 시위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자동차에 붙일 파병철회 스티커, 내일부터 서울에 올라가 집회에 참여하는 일, 재정 마련 문제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6월 말부터 8월 초까지 한 달 반 가까이는 이렇다할 회의가 없어도 모자람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회의가 없었는데, 나는 오늘로 두 번째인 이 모임의 회의가 참 재미있다. 역시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의논하면 보이지 않던 길도 보인다. 즐겁게 회의를 마쳤다.
내일 서울 집회에 올라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며칠을 망설였는데 결국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버스를 대여섯 시간이나 타고 올라가야 하는 길이니 그냥 이곳에서 몸을 아끼면서 농성장을 지키는 게 나을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힘을 모아야 할 때에는 미력하나마 함께 하는 것이 옳겠다 싶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어쩌면 내 마음에는 서울에 올라가 한 뜻으로 싸우고 있는 전국의 많은 이들 모습을 보고 함께 하며 힘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앞질렀는지 모른다.
어제도 저녁 무렵부터 뒷목 쪽으로 약간 뻐근하면서 머리가 무거웠지만 자고 일어나니까 가벼워졌는데, 지금도 밤이 되니 피로가 뭉치는 것 같다. 내일은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그만 자야겠다. 오늘, 최소한 165명이 죽었다.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하루라도 늦출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젠장, YTN 화면 아래로 흘러가는 뉴스에 정동영이 통일, 외교, 안보라인의 총괄 책임자가 되었단다. 한나라당보다 더 꼴보수가 되어가고 있는 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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