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대의 손 |
장기투쟁사업장.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가끔 의문이 든다. 일년 삼백예순날을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자에게 장기와 단기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단 하루를 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에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노동자에게는 단 하루도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지 않을까?
노동자들의 투쟁이 백일을 넘기는 경우가 기본이 되었다. 집회에서 백일 싸움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우스개도 있다. 노동자 집회에 찾아가면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로 가득하다. 이제 웬만한 사업장 이름뿐만 아니라 조합원의 얼굴마저 다 외울 정도이다.
노동자들의 연대 집회에 가면 빠지지 않고 품앗이를 하는 사업장이 있다. 빨간 조끼에 미색 모자. 한국합섬HK지회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빠지면 집회 대오가 초라해질 정도로 자리를 꽉 메우고 있다.
품앗이의 모범
▲ 이정훈 한국합섬HK지회 지회장 |
오늘은 용기를 내어 이야기 좀 하자고 말을 걸었다. 자기 사업장 문제에도 벅찰 건데 그토록 열심히 품앗이 투쟁을 다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별 수 없이 재미없을 것 같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딱 딱 말이 끊길 거라고 생각했던 예감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말 구석구석에는 사랑으로 가득했다. 조합원에 대한 사랑, 운동에 대한 사랑, 동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정훈의 사랑은 노동운동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꽃피우고 있었다.
“제가 지회장이지만 제가 결정하는 것은 없어요. 다 저희 조합원이 결정합니다. 집회에 연대를 나가는 것도 조합원 스스로의 마음에서 나온 거지요. 저보고 조합원들이 연대투쟁에 열심인지 물어보면 답할게 없어요. 조합원에게 물어야지.”
조합원에게 물어봐라
한국합섬HK지회는 결정을 할 일이 생기면 모든 조합원이 모여 합의를 한다고 한다. 조합원의 마음이 70%이상 합의될 때까지 토론을 하고 나서 행동에 옮긴다. 작은 의견도 애정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다수의 의견을 존중한다. 행동에 옮길 때는 전원이 한마음이 되어 움직인다.
“생계가 어려운 게 제일 문제지요. 하지만 이 힘든 고통을 400여 명의 조합원이 흔들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게 바로 이 원리에요. 이 원리는 동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사랑의 힘이 조합원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것이죠.”
어느 투쟁사업장이고 조합원을 흔드는 것은 생계의 문제다. 강할 것만 같던 이정훈 지회장도 이 부분에서는 눈빛이 흐려진다.
사랑의 조직 원리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지회장으로 있다보니 책임도 크다. 하지만 생계의 문제도 당장은 조합원의 지혜로 풀어가요. 근로복지공단에서 체불임금사업장에 대한 대출이 있거든요. 아직 투쟁 기간이 짧다보니 대출로 생계의 급한 불을 끄고 있죠.”
근로복지공단의 대출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게 아니다. 신용불량이 된 사람과 정리해고가 된 사람은 이 대출마저 받을 수 없다.
“당장 생계가 어려운 조합원에 대해서는 생계투쟁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결정도 조합원들이 하죠.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은 조합원에게 이해를 구하고, 조합원은 토론을 걸쳐 결정을 합니다. 생계를 위해 참여하지 못하고 돈을 버는 조합원을 투쟁의 과정으로 인정해 주는 거지요.”
생계 투쟁
작은 결정의 과정부터 의견을 모아내는 훈련이 한국합섬HK지회를 이끌어 온 힘이다. 하지만 지회장의 고민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빨리 일을 하여 임금을 받을 수 있어야지요. 당장은 대출로 극복한다지만 혹 기간이 길어지면 생계의 문제가 쉽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도 고민하고 있고, 또 조합원의 슬기를 모아 해결해야지요.”
원칙을 지키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정훈 지회장. 그는 자본가를 싫어한다.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인간답지 못함에 있다. 여기에 맞서는 이정훈 지회장은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 한다.
“해고의 위협이 들어오자 구사대가 되어 노조와 대립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자본이 노동자끼리 갈등을 만든 것이죠. 자본은 해고의 위협과 함께 노동자를 자본의 도구로 이용하는 거죠.”
인간성이 없는 자본
회사는 구사대에게 지급하는 임금과 조합원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차별하였다고 한다. “노동자끼리 분열과 대립을 계속 일으켜 노동조합을 공중분해하겠다는 뜻이죠. 자신의 밥그릇만을 챙기려고 쉽게 돌아서는 사람을 보면 배신감보다 안타까움이 앞서요.”
▲ 코오롱 집회에 연대 나온 HK 조합원 |
“너무도 슬프고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구조조정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싸우자는 이야기만 해서는 극복할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동료에 대한 신뢰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운동의 자세와 관점이 바뀌지 않고서는 300일, 500일 싸워도 이길 수 없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자본과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싸우자는 이야기만 해서는
한국합섬HK지회가 연대에 열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의 존엄성을 생각하며, 동지를 믿고 어려움을 헤쳐가려는 자세. 멈춰있지 않고 나를 먼저 혁신하려는 마음. 다른 사업장의 어려움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단걸음에 달려가는 까닭이다.
단결과 연대는 투쟁의 불확실함을 깨고, 희망을 얻는다고 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전망을 자연스럽게 보게 해 준다고 힘을 주어 이야기를 한다.
“저희 지회가 운동의 개별화를 막아내고 투쟁을 집중하는데 작은 기여를 하였으면 합니다. 특히 현재의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로 껴안아야 합니다. 작은 힘들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싸울 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과 이론이 아닌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모여서 싸워야
수첩은 덮여 있었다. 고민하며 실천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수첩을 미처 펼치지 못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운동의 미래에 확신이 차 있는 목소리를 내 가슴에 연필로 침을 발라 꼭꼭 적을 수 있었으니.
▲ 코오롱 집회 후 이웅렬 회장집 진격투쟁, 앞에 함께 서서 몸싸움을 하는 HK 조합원들 |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종이에 담기에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었으니. 그의 이야기는 글로 전달할 수 없다. 실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행간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중반에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를 다녀오면 뿌듯한 힘을 얻어 내려왔습니다. 나약하고 방황할 때 서울 집회 한 번 참석하고 오면 정신이 번쩍 들었거든요. 요즘 조합원들이 서울 집회를 참석하고 내려오면 그때처럼 힘을 얻지 못해요. 민주노총의 대오는 더 커졌는데….”
이정훈. 그는 서둘러 구미공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한다. 멀리 고속열차가 보인다. 긴 여운이 기차 바퀴의 쇳소리를 내며 내 가슴을 후빈다.
"공장 망친 사람을 다시 법정관리인으로"
한국합섬HK 법정관리의 문제점을 듣다
화섬연맹 한국합섬HK지회는 방만한 계열사 운영과 연이는 해외투자의 실패로 찾아온 경영위기를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일방적인 정리해고를 실시하려는 회사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정훈 지회장은 “회사의 위기를 노동조합과 대화로 풀려는 자세보다는 노조 깨기에 덜 혈안이 되어있다. 구사대를 꾸려 노노갈등을 유발하고, 파업을 유도하고 있다. 3월에는 조합이 파업에 들어가지 않자 회사는 관리직을 출근시키지 않고, 노조가 불법파업을 한다며 거짓 핑계로 직장폐쇄를 했다”고 한다.
직장폐쇄와 관련하여 대구지방노동청 구미지청은 노동자의 파업으로 인한 직장폐쇄로 볼 수없는 휴업이라며, 회사의 휴업을 철회할 것을 지난 4월 19일 통보하여왔다. 하지만 회사는 지난 5월 휴업을 철회하는 대신 법정관리 신청에 들어갔고, 법원이 지난 6월 27일 법정관리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정훈 지회장은 “법원에 의해 법정관리가 받아들여진 것은 환영한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경영의 무능으로 한국합섬을 위기로 만든 박노철 한국합섬 전 회장을 법정관리인으로 선임하는 것은 한국합섬을 살리겠다는 의지로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한국합섬의 주채권사인 삼성과 신한은행은 박노철 회장의 법정관리 선임을 철회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회사의 일방적 휴업으로 거리로 내몰린지 100일이 넘은 한국합섬HK지회 조합원들은 7월 4일 집회를 열어 주채권사의 박노철 회장 선임의 부당성을 알려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