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로 미룰 수 없는 싸움이다

[단식일지6]2004년 8월 14일

동화의 편지

동화에게 메일이 왔다. 동화는 내가 모르던 또 많은 소식들을 전해왔다. 바그다드의 최대 빈민지역으로 200만 명이 넘게 사는 사드르 시티는 전기와 물의 공급이 모두 끊겼다 한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도 모두 막았다고 한다. 동화는 지금 사드르 시티의 상황을 4월의 팔루자와 거의 비슷하다고 말했다. 바그다드에서 ‘시티’의 개념은 우리나라의 서울이나 부산, 광주 같은 대도시로 치면 ‘구’에 해당하는 개념. 그러니 지금 사드르 시티에 전기와 물이 모두 끊겼다고 하는 건 서울의 동대문구나 관악구, 양천구나 송파구 같은 지역 한 곳에 물과 전기를 끊었다고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내가 알기로 바그다드에는 모두 5백만 정도가 산다고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사드르 시티는 (흔히 빈민지역이 그렇듯) 인구밀도가 몹시 높은 곳일 것이다.

지금 사드르 시티가 봉쇄되어 있다는 것은 서울로 빗대어 본다면 못잡아도 ‘성북, 강북, 노원, 중랑, 동대문구’를 더한 만큼의 지역이 꽁꽁 막혀 있다는 것이다. 전기와 물이 끊기고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 모두 막혔다. 50도를 넘나드는 불볕에도 선풍기 하나 돌릴 수 없고, 해가 지면 암흑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가능한 죽음에 대한 공포. 동화는 편지에서 사드르 시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이부터 나이든 분들까지 모두 몰타다 사드르의 사진을 들고 나와 미군에 대한 결사항쟁을 다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래봐야 구역의 청년들이 집안에 두고 있던 소총을 들고 필사 저항을 하는 정도겠지만, 그거라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동대문구가, 동작구가,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가 빛과 물과 길이 완전히 막힌 상태에 놓여 완전 몰살이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분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 이라크 땅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들은 최소한의 명분도 없다. 그저 꿈틀거리기라도 하면 그 땅의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키고 있다. 그네들이 전파하겠다는 ‘자유’와 ‘해방’, ‘민주주의’란 세상 가장 잔인한 약탈이고 침략이고 살육일 뿐이다. 나는 죄 없는 이라크 민중의 죽음만큼이나 제국의 총알이 되어 전쟁터에서 죽어 시체가 된 미군을 볼 때 또한 마음이 아팠지만, 오늘 동화의 편지를 읽으면서는 절로 바그다드에 있는 저항군들을 응원했다. 힘내라고 응원했다. 결국 그 말은 미군 하나 더 죽이라는 소리에 다름 아닌데,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응원을 했다. 나도 망가지고 있다, 함께 미쳐가고 있다. 다 미쳐가고 있다.

아부알리, 아마르

그랬구나. 지난여름 민중지원활동을 하러 들어가 지내던 알 마시뗄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 사람들이 나자프 출신이라 한다. 아부알리 아저씨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운전기사 노릇을 해준 분인데 언제나 우리를 식구처럼 아껴주었다. 어떤 준비된 친절함이나 필요에 의한 친절함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박하게 우리를 좋아해주던, 오래 사귄 이웃 같은 아저씨. 동화 편지에는 아저씨 친척들이 나자프에 많이 산다는 얘기가 있었다. 아부알리 아저씨 뿐 아니라 함께 활동을 하던 아마르의 친척들도 그곳에 많다고 했다. 9일까지 모두 360명 사망, 12일 56명 사망에 160명 부상, 13일 165명 사망. 나는 또 지금 아부알리 아저씨의 친척이나 아마르의 친척이 그 숫자 안에 있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나를 보았다. 자꾸만 나는 이 죽음들 앞에서 나와 같은 국적의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의 안전에 먼저 마음이 간다.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어 그런 걸까? 그래, 솔직히 말해 좀 전 동화의 편지에서 아부알리 아저씨와 아마라의 친척들이 나자프에 산다고, 동화도 그 분들을 따라 나자프에 가서 차도 마시고 축구도 했다는 얘기를 보니 마음이 더 크게 울렁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더 죽일 것인가? 세상은 왜 이 말도 안 되는 학살에 침묵하고 있는가? 게다가 내가 국적을 둔 이 나라는 왜 동참을 하겠다고 하는가? 이렇게 민간인들을 초토화 시키고 있는 걸 보고도 재건이라 우길 텐가? 이라크에 들어간 모든 점령군은 악마가 되고 만다, 사람 죽이는 기계가 되고 만다. 제발 돌아와라, 어서 끝내라.

안 돼, 가지 마.

편지 중간에 동화는 아부알리 아저씨한테 나자프로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볼 거라 했다. 안 돼. 가지 마라, 동화야. 그렇다고 동화가 있는 곳이 안전한 곳은 아니다. 지난 1일 동화가 사는 가라데에서 커다란 폭발 공격이 있었고, 7일에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시내 중심가 쉐라톤 호텔 옆에 폭발 공격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받은 편지에는 공터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바로 몇 시간 전에 그곳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폭탄 공격이 있었다고 전했다.

동화는 내가 지난겨울 대학로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던 때 이라크에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녀석이 한 첫 마디는 “형, 이라크에 다시 가자!”는 거였다. 동화는 그 뒤로 단체 들을 돌며 준비했고, 봄부터는 최소한 경비부터 자신이 마련을 해야겠다며 새벽 인력시장을 나가며 건설 날품 일을 하며 다시 이라크로 떠날 것을 준비했다. (이라크 활동과 관련한 이동화 씨에 대한 소개와 올 6월 재출국한 것에 대한 글은 바끼통에 쓴 글<내 마음의 평화 이동화>를 참고하세요.) 그러던 중 평화바닥(http//:peaceground.prg)라는 모임이 꾸려지면서 현지 활동에 대한 한국 쪽 지원과 연계를 마련했지만 지금은 재정마련이 무척 벅찬 상태라고 한다. 이라크 현지가 훨씬 불안해지면서 월 100만원 정도로 생각하던 생활비가 3배 가까이 뛴 데다, 한국군이 파병을 하게 되면서 집을 구하는 문제나 이동을 하는 문제에 더욱 어려움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평화바닥에서 조정해서 올린 재정계획을 보면 활동에 드는 편의를 가장 줄이더라도 기본 식의주와 이동에 필요한 경비가 몇 곱절로 뛴 까닭에 경비 마련이 급하다. 지금 한국인에 대한 테러위협까지 급격히 높아진 마당에 돈이 모자라다 하여 차를 타고 움직여야 할 곳을 걸어 움직인다거나 위험이 더 높은 쪽으로 숙소를 구한다거나 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 우리가 동화를 다 지켜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더 위험한 처지에 들게 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을 거다. 후원금이, 여러 사람들의 후원금이 급하다.

집세(숙박) 200불 -> 600~900불
통역, 차량, 가이드 비 350불 -> 200불
활동비 (통신 등) 200불 -> 100불
생활비 150불 -> 300~400불

“이동화의 이라크 현지활동에 필요한 활동비 모금에 조금씩 보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동화 씨는 지금 해오고 있는 것처럼 이라크 현지에서 사귀며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한국으로 전해줄 것입니다. 또한 단기간의 조사나 감시가 아니라 앞으로 최소 2년 동안 현지에 머물며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었을 사람들의 눈으로 점령의 참모습과 전쟁 이후의 현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동화의 이라크 반전평화활동, 기록활동, 이라크 민중연대활동을 위한 후원 계좌
<우리은행 697-285428-02-001 이동화>


서울로 오는 길

서울에 왔다. 울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까지 모두 열둘이 모였다. 능선너머, 햇살, 일다, 도토리 해서 전교조 선생님이 넷, 그리고 농민회 식구인 김태규, 박영숙 님과 산이, 겨레 넷에 나와 우리집에 왔던 손님까지 넷이다. 선생님들 넷이 한 차에 탔고, 태규 아저씨네 네 식구와 우리 집 네 식구는 모두 태규 아저씨의 트럭에 탔다. 7월에도 한 번 울진 식구들과 함께 광화문 파병철회 집회에 올라왔지만 오늘은 더 많았다. 이렇게 여럿이 함께 길을 나서니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는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어? 이게 뭐야? 트럭 안에 예쁜 피켓이 보였다. 갑자기 피켓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아래에 써 놓은 명의가 멋지다. 하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산’이고 또 하나는 ‘전쟁을 반대하는 겨레’라고 되어 있다. 산이는 2학년, 겨레는 다섯 살 먹은 태규 아저씨네 아이들이다. 아, 예쁘다. 태규 아저씨네 네 식구를 보면 늘 참 멋지게, 예쁘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두 차로 해서 영주까지 나와 영주에서 대절 버스에 올랐다. 전교조 경북지부에서 빌린 버스인데, 우리도 다 그 버스를 탔다. 영주에서 나온 분들, 안동, 상주, 봉화, 의성... 함께 모여 이 버스를 타고 올라간다. 서울에서 살 때에는 광화문이나 여의도, 또는 어느 대학에서 전국 집회를 할 때 지방에서 올라온 대절버스들이 늘어선 걸 보면서 참 대단들 하다 하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늘 그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데모하러 올라가는 버스.
전쟁을 반대하는 겨레, 울진 군청 버스정거장 앞 시위 때 사진. 피켓은 울진군민들 파병철회를 바라며 접은 종이학을 붙여 만든 것입니다


광화문

함께 올라온 전교조 선생님들은 함께 움직이는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 저녁 일곱시 ‘반전평화자주통일대회’에 들른 뒤 연대로 움직여 그곳에서 교사대회를 갖고 다음 날 815행사들에 참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버스가 서울에 닿으면 조금 늦더라도 대학로 만민공동회로 가 보고 싶었는데, 버스가 광화문에 닿았을 때는 벌써 일곱 시 반이 다 되었다. 아쉬웠다. 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파병철회의 목소리들이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운데는 진정을 다 걸고 해 가는 단위나 개인들이 여전히 있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벌써 한 풀 꺾여 들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철군의 구호는 옳으니 현실적으로 철군은 어려우니 11월 국회에서 있을 파병연장동의안을 막는데 주력’ 해야 한다는 논리가 먹혀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지금은 쉴 때이고, 최소한 유지만 하면 되는 것이고 11월이 오면 그 때 대대적으로 불사르면 파병연장을 막고, 철군을 이룰 수 있는가? 그야 말로 편안한 소리다. 지금부터 사그라든다면 11월이 온다 해서 어떻게 대대적인 운동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9월, 10월 쉼 없이 줄기차게 압박하고, 파병반대의 요구를 더 단단하고 크게 불려갈 때에야 겨우 11월 싸움에서 해 볼만 한 것 아닌가? 그게 더 현실적인 것 아닌가? 게다가 지금 이라크를 보라. 하루에도 몇 십, 몇 백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전쟁반대 싸움은, 철군과 파병철회 싸움은 어느 기간 동안 하다말아도 좋을 정세 싸움이 아니다. 필요한 정세에 하고, 정세가 만들어지면 하는 그런 싸움이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한 시라도 미룰 수 없는 싸움, 종전과 철군은 앞당기면 앞당길수록 수백 명의 목숨을 더 살릴 수 있는 싸움이다. 오늘만 해도 오늘 바그다드 북쪽 사마라에서 13명이 죽었다, 힐라 지역에서는 8명이 죽었다, 그리고 팔루자에는 공습이 계속되어 4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미루어 두어야 하는 싸움이라 말할 수 있는가? 당장, 지금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

광화문 집회는 뒤로 갈수록 내가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관념적인 선언으로 2005년 통일원년을 이야기한다고 통일이 올 수 있나? 내가 대학에 다니던 93, 94년에도 95년을 통일원년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다. 해방 50주년을 통일원년으로, 희년이 되는 95년을 통일원년으로. 그 때 듣던 구호에서 해방 50주년이 해방 60주년으로, 95년이 2005년으로 바뀐 것 말고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서울 어머니 댁에 왔다. 어머니가 깔아주는 이불은 편안하다. 솔직히 오후가 되면 저녁나절은 몸이 좀 힘들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개운해진다. 엄마는 내가 다시 단식을 하고 있다는 말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지었다. 그러면서 어디, 마로니에에서 한 거 갔다 오니? 하셨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니까 나 서울 온다 해서 뉴스를 지켜봤다 한다. 엄마도 이제는 이라크 문제, 파병 문제에는 전문가가 다 되어간다. 늘 믿어주기만 하는 엄마가, 고맙다.

[단식일지5]아테네의 환호와 나자프의 절규
[단식일지4]파병반대 투쟁은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
[단식일지3]그곳은 광화문과 명동, 종로
[단식일지2]반대만 하지말고 찬성좀 합시다. '노무현퇴진찬성!'
[단식일지1]꽃처럼, 나무처럼, 우산을 들고 간절하게...파병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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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종복

    며칠 전 박기범 님이 제가 일하는 책방에 왔었다. 울진에서 일하는 활동가 한 분과 같이. 나는 책방 2층에서 저녁밥을 먹느라 입 속에 먹을거리가 물려있었다. 박기범 님은 그 날로 9일째 굶고 있었다. 그리고 지율 스님은 48일째 굶는 날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세상에는 자기 아닌 것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나마 맑고 밝아지는 것은 아닐까.
    얼마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평화가 올까.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것들이 죽어야 경제개발을 멈출 수 있을까. 혹시 지구의 목숨이 끝나는 날 까지 이런 일은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나도 오늘 밥 한 끼 굶어야 겠다. 내가 한 끼 굶는 것이 세상의 평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 마는 적어도 내 안의 부끄러움을, 이런 모진 살육의 세상에 살아있다는 부끄러움을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아, 지율 스님! 제발 이제 몸을 추스리세요. 더러운 세상을 혼자서 껴안으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지 마세요. 우리 끝까지 살아남아 좋은 세상 올때 까지 힘을 모아 다시 일어서요.
    박기범 님, 우리가 이라크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순수를 찾아가는 것이지요. 11월에 있을 정기 국회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는 바로 이 곳에서 끝임없이 파병 철군을 외쳐야 한다는 생각에 동감이에요.
    우리들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것은 비록 몸뚱이와 작은 평화의 마음 뿐이지만, 여기서 나오는 살아있는 것을 아끼는 소중한 기도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거예요. 작지만 애틋한 사랑과 평화의 뜻이 모여 세상은 조금씩 아름다워질 거예요.
    우리 모두 조금씩만 더 힘을 내요. 그리고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평화의 씨앗을 뿌려요. 서로가 힘이 되도록 북돋우어 주어요.

    2004년 8월 20일 새들이 지져귀는 아침에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 은종복

    며칠 전 박기범 님이 제가 일하는 책방에 왔었다. 울진에서 일하는 활동가 한 분과 같이. 나는 책방 2층에서 저녁밥을 먹느라 입 속에 먹을거리가 물려있었다. 박기범 님은 그 날로 9일째 굶고 있었다. 그리고 지율 스님은 48일째 굶는 날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세상에는 자기 아닌 것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나마 맑고 밝아지는 것은 아닐까.
    얼마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평화가 올까.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것들이 죽어야 경제개발을 멈출 수 있을까. 혹시 지구의 목숨이 끝나는 날 까지 이런 일은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나도 오늘 밥 한 끼 굶어야 겠다. 내가 한 끼 굶는 것이 세상의 평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 마는 적어도 내 안의 부끄러움을, 이런 모진 살육의 세상에 살아있다는 부끄러움을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아, 지율 스님! 제발 이제 몸을 추스리세요. 더러운 세상을 혼자서 껴안으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지 마세요. 우리 끝까지 살아남아 좋은 세상 올때 까지 힘을 모아 다시 일어서요.
    박기범 님, 우리가 이라크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순수를 찾아가는 것이지요. 11월에 있을 정기 국회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는 바로 이 곳에서 끝임없이 파병 철군을 외쳐야 한다는 생각에 동감이에요.
    우리들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것은 비록 몸뚱이와 작은 평화의 마음 뿐이지만, 여기서 나오는 살아있는 것을 아끼는 소중한 기도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거예요. 작지만 애틋한 사랑과 평화의 뜻이 모여 세상은 조금씩 아름다워질 거예요.
    우리 모두 조금씩만 더 힘을 내요. 그리고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평화의 씨앗을 뿌려요. 서로가 힘이 되도록 북돋우어 주어요.

    2004년 8월 20일 새들이 지져귀는 아침에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