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낮부터 군청 앞에 나가 농성을 한다. 그래도 ‘군청’이 있는 읍내이지만 토요일 오후면 길에는 벌써 사람들이 없다. 평일에 일곱 시까지만 하고 들어오는 까닭도 그렇다. 일곱 시, 평해로 들어가는 막차를 보내고 나면 읍내는 잠든 듯 조용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까지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책방에 맡겨두고 다니는 시위 물품 - 피켓들이며 책상, 파병철회 우산, 모금함, 자리, 문구류 따위 - 을 챙겨 군청 앞으로 나갔다. 아직 다른 분들이 나오지 않아 도토리 님과 둘이 그것들을 옮겨 농성장 모양을 갖추는데,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꽤 오랜만인 것 같다.
학교들이 하나 둘 개학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한 떼가 되어 있고, 긴 걸상에는 오늘따라 보따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는 할머니들도 참 많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종이학 피켓부터 상황판, 그림판, 구호를 적은 판 들을 군청 담장에 주욱 세워놓았다. 어느덧 피켓은 아주 많이 늘어나 군청 담장 한 쪽을 다 두를 수도 있을 정도다. 방학이어서 나와보지 못하던 학생들, 아이들이 피켓 앞에 서서 그림이며 글귀들을 들여다보았다. 군민 단식 릴레이 상황판을 보면서 이제는 일흔이 넘고 있는 사람들 이름을 살폈다. 한 아이가, “어? 저기 우리 선생님 이름도 있다.” 고 말했고, 버스를 기다리던 군인이 “야, 저어는 내 중학교 다닐 때 담임 아이가?” 하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미처 인터넷 까페에 들어가 보지 못해서 오늘 단식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나왔다. 도토리 님께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며 없는 것 같다 한다. 그러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며 “까페에 보니까 미진이가 오늘 하겠다고 쓴 것 같던데, 21일이 오늘 맞죠?” 했다. 미진이, 참 맑은 아이다. 7월 말, 조그맣게 촛불 문화제를 열 때 앞에 나가 써온 글을 읽다가 눈물을 참지 못하던 아이. 상황판에 미진이 이름, 내 이름을 써넣었다. 그러고 있으려니까 어느 새 미나가 옆에 와서 섰다. “선생님, 저도 오늘이에요”, 방학 동안은 뜸했지만 학교를 마치고 거의 날마다 정거장 시위를 함께 하던 아이. 그래, 그럼 오늘은 우리 둘이 우산 들고 있자. 나중에 나온 일다 님께 들으니 오늘 단식자는 그렇게 셋 말고도 넷이 더 있어서 모두 일곱이었다. 변성희, 남순조, 손다인, 손정인.
장날인가? 날짜를 따져보지도 않고 나는 의심 없이 장날인가 보다 했다. (지금 일지를 쓰며 날짜를 따져보니 울진 장은 2, 7장이니 장날은 내일이다.) 그만큼 사람이 많았다. 군청 건너 편 시장 골목에서 장바구니, 보따리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다른 날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보따리를 인 할머니, 자전거에 짐을 실은 아저씨, 엄마 손에 질질 끌려가는 어린애…… 그렇게 보고만 있으면 모두 정이 가는 얼굴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하는 싯귀가 자꾸만 입에 맴돌았다.
罷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속고, 빼앗기고, 억눌리고 사는 너나할 것 없이 우리는 정말 얼마나 못난 이들인가? 못난 이들은 그 못남이 비슷해서 서로 보면 즐겁고, 상처가 닮았기에 서로 위로가 된다. 끝내 세상의 가장 궂은 일, 소중한 일을 하는 못난 사람들. 우리가 먹을 것, 우리가 입을 것, 우리가 잠잘 곳을 만드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의 심부름을 해주며 기대어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아들 딸들이 저 이웃나라 사람들을 죽이러 떠났고, 그 이웃 나라의 기운 남은 이들은 집에 있는 총이라도 들고 나와 맞서서 총을 쏜다. 바그다드에 들어간 사흘 째 날, 반전평화팀은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구리 시장엘 들어갔다. 울진 읍내에 시장보다는 좀 더 큰, 마치 모래내나 청량리 어디에 있는 시장과 꼭 닮았던. 그 시장은 지금쯤 어찌되었을까, 그 시장에서 쇳그릇에 땜질을 하던 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에 드는 사이 까무룩 졸음이 스며왔다. 졸음인지, 어지러움인지 무언가 따뜻한 기운 속으로 몸이 잠겨드는 것 같았다.
광목 걸개
어제 회의를 하면서 김재복 수사님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우리 모임에서도 수사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무언가를 해 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그 얘기는 청와대 앞에 함께 갔을 때 햇살 님이 먼저 꺼낸 얘기였다. 지율 스님의 단식장 둘레에 도롱뇽 그림이며 도롱뇽 엽서, 옷감을 바느질해서 만든 걸개 들이 있는 것에 견주어 수사님 단식장에는 그런 것 하나 없는 게 허전해 보인 건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지 힘을 드리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래서 얘기한 게 우리 아직도 많이 있는 종이학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드리거나 했으면 한다 하니 일다 님이 걸개 얘기를 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을 가지고 그것을 그대로 광목 천에 다리미로 다리면 훌륭한 그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했다. 얘기로 들어서 그 과정을 자세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아이들 그림을 그대로’라는 말만으로도 왠지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어제 나온 얘기였는데, 오늘 시위를 마치고 나서 몇 사람이 모여 바로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아마 어제 회의를 마치고 다들 밥을 먹을 때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밥을 먹다 얘기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당장 아이! 들 그림이 어디 있느냐 했더니 학교가 개학한 능선너머 님이 오늘 공부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그린 그림이 많다고 했다.
어제 회의를 하기 전만 해도 저마다 조금씩 답답해하면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몰라 마음들만 무거워 보였는데 그 회의에서 활동의 모습과 의미를 새로 매김하고 나니 우리 활동 자체에 힘이 붙는 것 같았다. 걸개 광목을 만들 분들은 뚝방 쪽에 있는 한터울 연습장으로 모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농성장에 앉아 있을 때부터 감겨온 졸음, 어지럼 때문에 얼마 동안은 잠을 자 주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어 서울에서 바끼통의 시치프스와 아멜리가 내려왔다. 놀러오는 거라 했지만 일부러 들러 보느라 내려왔다는 걸 안다. 시외버스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가 함께 죽변 방파제에 있는 횟집으로 왔다. 오늘따라 가게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울진, 죽변하면 대게가 이름 났다는 거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시치프스가 그렇게 대게 타령을 했으니 대게를 먹게 해주어야지 하고 부러 그리 데리고 갔다. 반찬만 해도 한 가득, 아주 맛깔스럽다. 좋아하는 음식들이 너무 많아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그거 참는 거야 어렵지 않다. 시치, 아멜리 한 잔 받아라.
한터울 연습장에서 광목 걸개를 만들던 일다 님과 도토리 님도 죽변 방파제로 왔다. 일다 님은 지난 번 서울 집회에 갔을 때 시치와 아멜리를 만난 일이 있어 구면이다. 도토리 님도 사진이나 글, 이름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그리 서먹하지 않아 보였다. 여럿이 만나니 반갑다, 게다가 한 쪽에서 이 먼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만난 거니 더욱 반갑다. 반가운 자리, 좋은 음식, 빠지기 몹시 아쉬운 자리이지만 나는 마저 정리할 것도 있고 해서 그만 횟집에서는 일어섰다.
올림픽
밤 열두 시쯤, 텔레비전을 켰더니 온통 축구 이야기다. 앞으로 세 시간 뒤에 있을 올림픽 8강 경기를 앞두고 보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지난 축구 경기들을 하일라이트로 편집해서 다시 보내주었고, 선수들이 사는 집마다 찾아가며 식구들을 인터뷰했다. 더 놀라운 것은 도시 곳곳에 있는 월드컵 운동장에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운동장에서 커다란 그림으로 보면서 응원을 펼치는가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사이 인터넷을 켤 때마다 월드컵 때와 같은 분위기를 다시 내어보자는 식의 광고가 많던 게 기억난다. 축구라면 나도 나쁘지 않다. 좋아한다. 손에 땀을 쥐고, 열심히 뛰는 선수들을 응원한다. 그런데, 정말 세상이 이래도 되나 싶다.
내가 세계 지리에 밝지 않아 그리스라면 그저 이라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일 텐데 하는 생각 정도만 했다. 그런데 언젠가 뉴스를 들어보니 아테네로 가는 선수단이 터키를 거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터키? 터키라면 이라크하고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이다. 그렇다면 정말 가깝구나. 지금 축제와 환호로 열광하는 그리스의 아테네는 나자프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의 나자프와 정말 그리 멀지 않구나. 그 거리를 이 땅으로 옮겨와 견준다면 지금 한반도에서는 어느 도시 하나를, 쑥대밭을 만들어 다 죽이고 있는데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폭죽을 쏘고, 경기 장면에 온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그런 모습 아닌가? 그래도 되는 건가?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만약 이 땅 한반도에서 그처럼 제국의 전투기가 날아와 도시 하나를 불사르고 있는데, 바로 이웃 땅에서 온 세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우리 마음이 어떨까? 지금 이라크 사람들 마음은 어떨까? 얼마나 이 세상을 원망할까?
축구를 원망하는 건 아니다. 축구를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다. 허나 축구 경기가 시작하기 세 시간 전부터 온갖 관련 화면들을 편집해서 내 보내는 언론, 지금 이맘 알리 사원에 천명 넘게 모여 결사항전을 각오하며 죽어 가는 이들에 대한 소식이 과연 축구 경기 하나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하는 걸까? 축구 경기 하나에 대여섯 시간을 보여주는 언론 어디에서도 전투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죽어 가는 이라크의 사람들에 대한 소식은 단 오 분도 채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또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속에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누구나 다 동의하고 있는 사실, 이라크의 다음은 한반도이다.
오늘 손석춘 기자가 칼럼에서 인용한 미 국무부의 전 북한 담당관 케네스의 말은 헛말이 아니다. “서울 사람들은 현실 세계를 모르고 꿈을 꾸고 있다. 전쟁 가능성은 매우 크다”. 미국은 은밀하게 스탤스 전폭기를 이 땅에 들여놓았고, F-15E 전폭기 대대를 다음 달 안까지 들여올 계획이다. 이 땅 하늘로 최신의 전폭기들이 모두 모이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라크의 오늘은 한반도의 내일이다.! 지금 나자프의 현실은 바로 서울 또는 대전, 광주, 부산의 그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미친개, 제국의 전투기
이튿날 아침. 단식이 길어질 수록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된다. 몸이 가볍다. 시치프스와 아멜리는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지, 일어나려면 멀어 보인다. 오랜만에 쌀을 씻고 밥을 지었다. 그래도 손님들이 왔는데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먹여야지. 밥을 앉히고, 감잎차를 한 잔 마시고, 어제 널었던 빨래를 갰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뒷집 할머니 댁으로 올라갔다. 내 유일한 식구인 개 깜비가 어제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그 댁에 놀고 있나 가 보았더니 할머니가 저기 있다고 가리키셨다. 깜비, 깜비! 깜비야. 움직이지 않는다. 그제야 할머니가 말을 하는데 아파서 그런다고, 어제 구장집 개한테 물리고 난 다음부터 저러고 있다고 한다. 깜비야, 깜비! 움직이지 않는다. 죽었구나. 굳은 몸을 안고 내려왔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 집으로 내려와 삽을 들고 지 어미를 묻었던 산으로 올라갔다.
이 녀석 깜비. 사실 ‘깜비’라는 이름의 개는 이 녀석이 아니라 이것의 어미다. 어미는 2003년 2월 18일 죽었다. 어떤 차가 올라왔는지 이 시골까지 들어와 개를 치어 죽이고 모른 척 가 버린 거였다. 그 때는 정신을 잃고 울었다. 거의 무슨 통곡처럼. 개 한 마리를 잃어 무어 그리 야단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 시골에 들어와 정을 붙인 단 하나의 목숨이었다. 개를 묻고 나흘 뒤, 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여기던 그곳 전쟁터로 떠났다. 그렇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라크에서 몇 달, 한국에 돌아와서도 집에 오지 못하고 파병철회 싸움을 하느라 서울에서 몇 달을 보낸 뒤, 근 일 년 만에야 집에 돌아왔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죽어서 내 손으로 산에 묻었던 깜비와 똑같이 생긴 개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알 수 없는 일, 내 직업이 동화작가이지만 내가 읽거나 쓴 어떤 이야기보다 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내게 일어난 거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가만 보니 다른 곳은 죽은 깜비와 다 똑같은데 앞 발 하나만이 흰털이다. 아, 깜비가 낳은 새끼구나.
어미 깜비는 죽기 두 달 전 새끼를 넷 낳았다. 그것들은 모두 한 달 쯤 지나 겨우 눈을 뜨고, 젖을 뗄 때쯤 이곳 저곳 키울 만한 곳으로 보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어미처럼 온통 검정 털인데, 앞발 하나만 흰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게 여기에 와서 살고 있을까? 내가 녀석들을 떠나보낼 때는 겨우 눈만 뜬, 겨우 젖을 뗀 강아지였으니 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 집을 찾아와 살고 있을까? 만약에 그렇게 찾아온 거였다 해도 내가 일 년이 넘도록 집을 비웠는데 어떻게 여기를 떠나지 않고 살았을까? 무얼 먹고 지냈을까? 참말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닮은 개들이 있다 해도, 아무리 모양과 털빛이 닮은 개들이라 해도 주인이라면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개를 고를 수 있다. 그만큼 짐승들은 아무리 모양이나 털빛이 닮았다 하더라도 저마다 특유의 자세, 눈빛, 교감하는 느낌 들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 새끼 깜비는 지 에미가 하는 짓을 그대로 했다. 기대어 앉거나 누울 때 발을 구부리는 버릇마저도 지 에미와 똑같이 닮았다. 신기하구나, 신기하구나 하며 나는 다시 깜비의 새끼에게 지 에미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놓고 함께 살았다. 이제는 집을 비울 때도 밥 챙겨줄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 없이 일 년이나 혼자도 어디에서 얻어먹건, 어디에서 찾아먹건 알아서 잘 살아왔으니 (조금은 무책임하지만) 알아서 찾아 먹고 있으려니 했다.
구장 집에는 아주 큰 개가 산다. 사람이라도 겁을 먹게 되고 마는 도사견 같기도 하고 사냥개나 싸움개 같은 그런 개가 산다. 구장 댁은 우리 집에서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가야 있는 곳이어서 그 개가 거의 내려오는 일이 없는데, 석 달에 한 번쯤은 우리 마을 쪽에도 내려와 마을을 휘젓고 다닌다. 들에 일을 나온 할머니들도 겁에 질려 꼼짝 못하고 멀리 가기만 기다리고 설 정도이다. 어미 깜비가 살았을 때에도 몇 차례나 깜비를 잡을 듯이 쫓아와 내가 장대를 들고 나가 겁을 줘서 쫓은 일이 있다. 한 번 그러고 나면 다시 몇 달 그런 일이 없어서 금세 잊곤 했는데, 어제는 내가 농성장에 나간 새 그 개가 왔던 거다. 그것도 두 마리. 깜비의 죽은 몸에는 잇자국이 커다란 못자국처럼 깊이 박혀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심장에 박혀 있다. 아까 내가 할머니 댁에 올라갔을 때, 할머니는 그 때까지 개가 죽은 줄 몰랐으니, 적어도 하룻밤은 그 몸으로 앓다가 간 모양이다. 얼마나 아팠니, 깜비야.
하지만 깜비를 안고 산에 올라가 묻으면서 지난번처럼 그렇게 목놓아 울지는 않았다. 팔 하나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가슴팍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슬프고 눈에 밟히지만 이번에는 우느라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저 세상의 죽어 가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날 뿐이었다. 그리고 구장 집 개, 그 개는 최소한 자기 먹이를 마련하느라 물어 죽인 것도 아니다. 그저 죽이는 본능, 그것 하나로 지보다 몸집이 작고 약한 개를 죽인 것이다. 그 개가 미워 자꾸 머릿속으로 생각하다 보니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포로를 학대할 때 미군이 들이대던 그 군견하고도 닮은 것 같다. 미친개들, 이 세상의 미친개들. 지금 이라크 땅에는 구장 집 개와 같은 미친개들이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나? 전폭기라는 날개를 달고, 미사일과 폭탄이라는 이빨과 발톱을 거느리고 그 땅에 사는 목숨을 다 죽이고 돌아다닌다. 나자프라는 고장 한 곳에서만 해도 엊그제부터 사흘 동안 일흔 일곱 명을 죽게 했다. 날개달린 미친개가 되어 도시 곳곳에 사람이 꿈틀이면 이빨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폭탄을 쏟아놓았다.
지 에미와 똑같다싶게 닮았지만 깜비는 에미보다 착한 개였다. 어차피 ‘착하다’는 말도 인간 기준에서 ‘착하다’이겠지만 적어도 새끼 깜비는 그랬다. 누가 버릇을 들인 것도 아니지만 문을 활짝 열어도 집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고, 곁에서 고기를 구워 먹어도 달라고 보채는 일이 없었다. 그저 애닯게 눈을 맞추고 가만히 꼬리만 흔드는 그런 개였다. 요사이, 내가 단식을 시작한 뒤에는 농성장에 나갔다 올 때만을 기다려주던.
지난 번 에미 깜비가 죽은 일을 두고도 나중에 어른들은 그런 말씀을 했다. 그 애가 액운을 대신 했나 보다고, 네가 겪을 나쁠 일을 그 개가 막아준 것 같다고. 그랬을까, 그래서 나는 폭격이 떨어지는 그 도시 방공호 속에서도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그러면 혹시 이번에도 내가 밥을 굶고 있어서 무언가를 대신 하느라 다시 그런 일이 생긴 걸까? 그런 거니, 깜비야? 생각할 수록 가슴떼기가 떼어져 나가는 것 같다. 어린 깜비를 에미 깜비 묻은 자리 곁에 묻었다. 흙을 봉긋이 덮고 밟으며 반야심경을 읊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역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깜비를 묻고 내려오다가 다시 마음이 붙잡혀, 삽을 땅에 짚으며 다시 올라갔다. 깜비야, 잘 자. 약하고, 가난하고, 힘없이 살다 간 목숨들은 반드시 더 좋은 세상으로 가게 될 거다. 거기에서 좋은 목숨들 만나서 고운 숨 다시 쉬렴. 고작 한 마리 개이기는 하지만 유일하게 기대어 살던 목숨 하나를 싸움개의 이빨에 떠나보내며 나는 저 먼 땅에 죽어가는 순한 목숨들을 다시 생각했다. 이 죄를, 이 죄를 어떻게 다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