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군대를 보낸 나라의 백성이 걷는 길

[박기범의 철군투쟁 단식일지 24, 25, 26]2004년 9월 1일~3일)

파병연장동의안

예상 못한 바 아니었지만 국방부가 파병연장 방침을 확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리고 바로 열릴 정기 국회에서 연장 동의안을 처리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한다. 지난 해 12월 연장 동의안을 낼 때 제안 이유를 살펴보면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만 늘여 놓았다. "평화애호국가로서 테러행위 근절을 위한 미국의 행동을 지원하는 국제적 연대에 동참함으로써 세계평화와 안정에 기여함은 물론, 한-미 동맹관계의 공고한 발전을 도모하고자 파견된 국군부대의 파견기간을 1년 연장하려는 것임." 반박의 가치도 느끼지 않는다.

테러행위 근절을 위한다니? 결혼 잔치를 하는 자리에 폭탄을 쏟아 붓고, 어린아이까지 조준 사격을 하는 일보다 더 끔찍한 테러라는 게 어디 있나? 한 마을의 물과 전기를 다 끊어 놓고,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죽여대는 짓보다 더한 테러가 도무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테러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거라면 미국의 침략행위에 맞서야 한다. '세계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려면 점령군을 당장 떠나게 해야 한다.

이라크는 평화로운 나라였다. 평화를 깬 것은 침략군이고, 평화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점령군이다. 결국 '동의안 제안 이유서'에서 밝힌 내용 가운데 말이 되는 이유는 하나, '한-미 동맹관계의 공고한 발전' 그것뿐이다. 지난 번 파병 때까지만 해도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이 또한 말 안 되는 근거였지만) 까닭을 내세우면서 그렇게 고집을 피우더니만, 이제 그 잘난 '국제사회의 약속' 는 다 지켰는데 또 뭐가 무서워서 파병 기간을 연장하겠다는 것인가? 이것은 처음부터 노무현 정권의 파병강행은 누구의 강요에 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뛰어든 전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녕 그이들의 눈에는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그 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부모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을까? 어떻게 날마다 사람이 몇십 명씩 죽이고 죽는 걸 그대로 보면서 더 오래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더 죽고 죽이겠다고 하고 있는 걸까? 이미 파병을 했던 나라들도 다들 돌아오고 있거나 돌아올 궁리를 하고 있는 속에서 추가 파병에도 모자라 파병을 연장하겠다고 하니 대체 이 정권은 어디까지 가겠다는 마음일까? 연장동의안을 막는 싸움은 지금부터다. 국방부를 비롯한 정권과 여야국회는 벌써부터 안을 처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싸움을 안이 제출되는 때로 미루어두자는 발상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목숨에는 일정이 없다, 죽어가는 목숨들은 운동 일정 같은 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장날 할매들 (9월 2일, 25일째)

2일과 7일, 12일과 17일, 22일과 27일은 울진읍에 장이 서는 날이다. 지난 번 울진평화모임 계획을 새로 짜면서 선전전을 하는 것에 장날을 적극 활용하자는데 함께 동의했다. 장날이면 그냥 큰길가에도 물론 사람들이 많지만 장터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로 아주 가득하다. 그런 날이면 군청 앞도 좋지만 우리가 직접 장에 나온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얘기였다. 장터 선전전 경험이 많은 산이네 어머니가 얘기한 거였다. 산이 어머니는 농민회 일에 열심이신데, 농민회에서 선전물을 만든다거나 하면 무조건 장날 장터로 사람들을 만나러 나간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전단지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눈이 흐린 노인들이 보기에는 글씨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농민회에서 전단지를 낼 때면 몇 자 안 쓰더라도 큼직큼직한 글씨로 쓴다며 말이다.

지난 번 회의 때 약속한 것처럼 오늘은 저녁에 군청 앞에서 하는 농성 대신 오전 일찍 장에 나가 선전전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장날 장터라고 아무 시간이나 다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니었다. 오전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가 가장 많고, 점점 빠지기 시작해서 점심때가 지나면 사람들이 많이 빠진다. (아, 물론 그래도 장이 서지 않는 날보다야 많은 건 물론이다.) 어휴, 할매들, 아지매들도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장날 선전전은 출근 시간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 피아노 학원을 하는 바하 님, 풍물 강습을 하는 바라 님, 농사를 짓는 산이 어머니와 내가 함께 하기로 한 거지만 그래도 아홉 시에서 열 시는 조금 벅찬 듯 했다. 그래서 정한 시간이 열 시에서 열 한 시.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평지 책방으로 나갔다. 산이 어머니가 먼저 나와 계셨다. 조금 있으니까 건너편 피아노 학원에서 바하 님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왔다. "세수도 못하고, 바지만 갈아입고 나오는 길이에요." 그래도 잊지 않고, 아니 잊지 않았더라도 꾀부리는 것 없이 세수도 못한 채로라도 뛰어 나오니 반갑고 좋다. 바라 님은 요즘 전수가 계속되고 있어서 하루 서너 시간뿐이 못 잘 정도로 바빠서 나오지 못했다. 아침 선전전이든 저녁 농성이든 다들 자기 할 일이 바쁜 데도 무리해서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무리해서 일을 하게 되면 차츰 그게 부담이 되고, 억지로 움직이는 게 되고, 그래서는 오래 가기 어려울 거기 때문이다. 산이 어머니와 바하 님, 그리고 나 셋이서 전단지와 피켓을 들고 시장으로 갔다.

와아아. 장 구경은 그냥 아무 살 것이 없어도 그저 즐겁다. 포도가 아주 달아 보였다, 사과가 아주 맛나 보였다. 쪼그리고 앉아 껍질을 벗기는 도라지도 향이 아주 좋아 보였고, 손수레 그득 멸치와 쥐포, 오징어포들이 쌓였다. 올밤이라고, 햇밤이라고 할매 한 분이 아주 맛이 있다고 한 되 들고 가라고 한다. 마음 같으면 바로 칼로 벗겨 날밤으로 오둑오둑 깨물어 먹었으면 했다. 일찍 나온 할매들은 그래도 그날 쪽으로 자리를 펴고 앉았고, 조금 늦은 할매들은 할 수 없이 뙤약볕 쪽에 늘어앉았다.

손수레 하나는 그 자리에서 손수 구워 만든 생과자를 가득 쌓아 놓았다. 아저씨는 아주 바삐 과자 반죽을 짜면서 계속 구웠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있는, 입에 넣기 전에 구운 과자 향이 먼저 더 즐겁게 해 줄 것 같은 그런 과자였다. 다른 데 어디 옷가게, 신발가게, 그릇가게 같은 데로는 눈도 가지 않는다. 장에서 파는 음식은 눈을 감고 손에 집어도 모두 달디단 꿀맛일 것 같았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끊이지 않으면서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전단지를 한 장씩 드렸다. 전쟁에 반대합니다, 네에, 전쟁하지 말라고요, 우리 나라 군인들을 그 몹쓸 전쟁터에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얼른 오게 해야지요. 거 가서 우리 군인들 죽는 것도 문제, 그 나라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게 될 것도 문제, 하여튼 어서 오게 해야지요. 어떤 할머니는 입을 벌리기까지 하고 열심히 듣는다.

아, 그런데 고민. 할머니들 가운데 많은 분이 글을 모르시는 것 같았다. 건네드리면 전단지를 받기야 받지만 읽지 못해 보이는 표정이 금세 눈에 보인다. 그럴 때는 괜히 종이 전단을 드려서 할머니를 위축되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워낙 장터에 사람들이 많기도 해서 한 분 한 분 모두 손에 전해드릴 수도 없었지만, 그런 마음이 든 다음부터는 그나마 좀 더 젊은 아줌마들이나 아저씨들에게 전단지를 드렸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할머니 한 분이 부르며 손짓을 했다. "그기 먼데, 나도 함 조바라. 줄라믄 다 주야지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그라마 대나?" 할머니가 섭섭했나 보았다. 아이 참, 어떻게 하나.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먼저 손짓해서 그것 좀 줘 보라고, 뭐하는 거냐고 물어주시니까 기분이 좋았다. 네에, 전쟁하지 말라고요, 전쟁터에 보낸 우리 나라 군인들 냉큼 돌아오게 하라고요.

장날 선전전을 많이 해 보았다는 산이네 어머니는 역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앞장서고 다니며 아저씨들 할머니들을 만났다. 바하 님은 곁에서 피켓을 들고 함께 했는데, 가끔 뒤를 돌아보면 아저씨, 이건 어떻게 해 먹는 거예요? 할머니 그건 얼만데요? 하면서 장구경에 더 신이 났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나도 마음에 흥이 나고 좋았다. 조금 더 걷다 보니까 푸성귀를 내놓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이 집에서 가져온 떡인지 떡을 돌려 드셨다. 자, 이거 하나 먹어봐. 아, 맛있겠다. 오늘 장에서 본 것 중 젤로 먹고 싶은 거, 일등은 그 떡이다.
장터 골목골목에서 할머니들을 만났습니다. 산이 어머니는 할머니들의 기억 속 전쟁 이야기를 되살리게 해주었습니다. 그라모, 안 돼지, 사람 직이는 전쟁은 하모 안 되지.

집회신고

한 달 단위로 끊어 집회 신고를 내다보니 8월말까지 신고기간이 끝이 나 다시 9월 집회 신고를 내려 했다. 물론 자리는 군청 앞 버스정거장 그 자리. 그런데 그 자리를 핵폐기장 유치에 찬성하는 '울진발전포럼'에서 한 발 앞서 집회 신고를 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산 농성을 할 때 군청 주차장에 근사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더니 집회 신고까지 그리 낸 거였다. 그래서 일단 그 쪽에 양해를 얻어 우리가 저녁 때 농성하는 시간에는 양해를 해 달라고 했더니 얼마든지 그러라 하는 대답을 얻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안정적으로 한 자리에 더 집회 신고를 내야겠다 싶어 그 쪽에서 신고를 내놓은 15일까지는 단위 농협 앞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16일 뒤로는 다시 군청 앞 버스 정거장.

그게 왜 15일까지인가 하면 아마 핵페기장 유치를 결정하는 절차에서 군수가 신청을 하는 게 15일까지인가 보았다. 그러면 그 때까지 군수가 신청한 지역들 가운데에서 선정을 하는 모양이다. 다행인 건 울진 군수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흔들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치 찬성 쪽 사람들이 이렇게 온힘을 다해 농성을 벌이고, 방송차를 타고 다니며 외치고 하는 까닭 또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다.

경찰서에 들어가 우선 날마다 하는 집회 신고는 그렇게 내놓은 뒤 순례단이 온 뒤에 평화바람과 함께 하는 공연에 대한 신고를 내려했다. 그건 문화행사로 보면 되니까 신고를 따로 안 해도 상관없다는 게 경찰들 얘기다. 나중에 다른 소리나 없으면 그만이다. 아무튼 경찰 쪽에서는 우리 모임이 무척이나 성가신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

며칠 전에는 까페에만 올린 평화바람에 대한 소식을 봤는지 모임 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누가 오느냐, 몇 사람이 오느냐, 왜 오느냐 따위를 물었다는 거다. 역시 오늘 집회 신고를 내러 간 자리에서도 내가 다른 경찰과 집회 신고서를 쓰는 사이 바하 님 곁에 붙어 사람들의 숙소부터 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물었다. 바하 님이야 아무런 의심 없이 친절하게 계속 답을 해주었고, 내가 끼어 들어 더는 대답하고 싶지 않으니 그런 것 더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 문제로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불쾌했다. 자신을 왜 공권력으로 보느냐는 거다. 더 할 말이 없다.

평화와 놀아요!

내일 순례단이 시작하는 날, 울진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날부터 눈코 뜰 새가 없다. 오늘도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일다 님이 까페에 올려놓은 것만 해도 열 한 가지나 되었다. 물론 모여 일을 하면서 거기에 몇 가지 일이 더 붙었다. 순례 기간 동안 강연, 간담회 같은 일정 다시 확인, 숙소에서 열 명 넘는 식구가 지낼 이불이나 밥해 먹을거리 준비, 음식 준비, 선전물 덜 된 것 마무리, 보도자료 준비, 울진에서 준비할 길놀이나 걸개 그리기, 페이스 페인팅 따위 프로그램 준비, 순례와 민중재판을 중심으로 한 피켓 새로 만들기……. 나도 더불어 며칠 동안 몇 시간 못 자고 지냈다. 이상하게도 몸에 무리를 크게 느끼지는 않는다. 정신 없이 일을 하다보면 나부터가 내가 그리 오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지냈다는 걸 잊곤 한다.

오늘은 오전에 장날 선전전을 했기에 저녁 농성을 뺐으니 다른 날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빈다 생각했다. 그런데 할 일과 시간을 견주고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들 이 일에만 매달린다 해도 기본으로 하는 다른 일들이 있으니 저마다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다섯 시쯤 책방으로 나가니 윤희, 미미, 현미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하고 함께, 도토리 님하고 같이 우리가 손으로 그린 그림일기 포스터를 붙이러 다녔다. 일다 님이 도안해서 만든 인쇄한 포스터도 예뻤지만 그 곁에 나란히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짝을 지워 붙여 놓으니 한결 눈에 띄고 예뻤다.

하지만 속상한 건 어제 저녁 곳곳에 붙인 포스터들이 몇 장은 벌써 떼이고 없는 거였다. 일부러 사람들 많은 곳만 골라 꼭 스무 장도 안 되게 붙인 거였는데 그 가운데 몇 장이 벌써 떼였으니 말이다. 책방 옆 담에 하나, 피아노 학원 앞에 하나, 우체국 앞에 하나, 농협 게시판에 하나, 그리고 연호정, 시외버스 터미널……. 휴. 연호정까지 다녀오고 나니 다리에 힘이 너무 빠졌다. 무척이나 많이 걸었다. 힘이 없기는 없구나. 길가 어느 마트 앞에 내놓은 걸상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그리고는 도토리 님과 아이들에게 포스터 붙이는 일을 부탁했다. "평화와 놀아요!" 순례단 울진 일정의 제목이다. 포스터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다. 정말 신나게 놀게 되었으면 좋겠다. 평화는 노는 거다, 예쁜 거다, 편안한 거, 조화로운 거다.

침략군대를 보낸 나라의 백성이 걷는 길 (9월 3일, 26일째)

오전 기자회견을 마쳤을 즘 해서 수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다 마치고 벌써 차를 탔다고 한다. 한남대교를 건너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있다고 했다. 수사님과 평화바람 단원들은 서울에서, 그리고 평화바람의 꽃마차를 타고 오는 푸념 님과 팔공산 님은 익산에서 떠났다. 순례를 시작한다, 시작한다 긴장이 되기도 하고 몇 날 동안 정신없이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막상 사람들이 떠나 내려온다고 하니 아무 것도 준비가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수사님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할 무렵, 울진에서도 동시 기자회견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고 나 또한 순례의 길에 오르는 글을 써서 보도자료를 내었다.

침략군대를 보낸 나라의 백성이 걷는 길

- 철군과 종전을 바라는 단식평화순례를 떠나며

전쟁을 막겠다고 들어간 지난 해 봄, 이라크는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어디를 가나 눈 맑은 아이들이 뛰어 놀았고, 도시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은 아주 순박했습니다. 시장에는 눈빛이 깊은 노인이 오랫동안 다루었음직한 연장으로 손잡이가 떨어진 물건을 조심스레 고치고 있었습니다. 티그리스 강가를 거닐면서 만난 연인의 모습은 마치 우리 한강 둔치에서 보던 연인들을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이 전쟁이 빼앗은 목숨은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저마다 가장 소중한 삶을 지닌, 가장 사랑하는 식구를 가진,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가장 소중한 목숨. 날마다 최소 스무 명, 지금까지 모두 사만여 명.

기어이 한국군마저 그 침략과 학살의 땅에 군대를 보냈습니다.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침략군대를 보낸 나라, 아무런 죄 없이 평화롭게 사는 이웃 나라 백성을 학대하고 학살하고 삶의 자리를 통째로 엉망으로 만드는 침략군의 나라.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국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라크의 어린이를 죽이고 있고, 내가 이웃 나라의 백성들 위로 폭탄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토록 애원하고, 그토록 바랐건만 이 나라 정부는 우리를 모두 침략자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침략군대의 선발대가 떠나고 난 뒤부터는 이곳 바닷가 촌에서도 밥을 굶고 길로 나섰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 나선 것이 아니라 저마다 하루를, 이틀을, 또는 그보다 더 여러 날을 곡기를 끊으며 용서를, 평화를, 철군을 바랐습니다. 한 끼 밥을 굶는 것으로라도 그만큼의 생명을 함께 나누고 싶었고, 침략군대를 보낸 나라의 백성이 된 참혹함과 죄스러움을 그렇게라도 빌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금이라도 파병을 철회하라는, 보낸 군대를 모두 되돌아오게 하라는 간곡한 외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곳 작은 도시에서도 벌써 백 명이 넘는 이들이 함께 밥을 굶으며 마지막 소리 없는 외침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외침에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보통 사람입니다. 바닷가 가까운 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하는, 또는 장에 나와 장사를 하거나 회사를 다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서 군림할 줄만 아는 어떤 이들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밖에 보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내 배를 불리기 위해 남을 해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값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전쟁은 어서 그만 두게 해야 합니다. 침략군으로 떠나보낸 한국군은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은 한 시라도 미룰 수 없는 일, 하루라도 먼저 끝내게 할 수 있다면 스물 가까운 목숨을, 이틀을 먼저 끝낸다면 마흔이 넘는 목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 서울에서는 사십 일 째 곡기를 끊고 평화 기도를 하고 있는 김재복 수사님이 그 순례의 길을 울진으로 내려옵니다. 그것으로 '철군과 종전을 바라는 단식평화순례'의 첫 걸음을 울진에서 시작합니다. 저 또한 수사님과 더불어 이라크인들에 대해 용서를 비는 마음과 죄스러움, 그리고 한국군 철수에 대한 간절한 바람으로 그 마음과 마음을 잇는 길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길을 걷는 걸음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함께 겪던 아이들, 동무들, 순박한 눈빛들이 가슴으로 아프게 밟히겠지요. 그 길에서 만날 평화의 마음들로 부디 한국군의 철군과 이라크의 진정한 평화를 당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4년 9월 3일
이라크인들에 대한 용서와 한국군 철수를 바라는 단식 스물 엿새 째
박기범 드립니다.


군청 앞, 수사님, 평화바람

군청 앞 농성, 오늘은 주로 농성을 함께 하던 분들이 한 번은 다 모여서 풍물을 맞추어야 할 텐데 시간이 없다 해서 모두들 그리로 갔다. 익산에서 출발한 푸념 님, 팔공산 님은 먼저 도착을 해 있어서 저녁 군청 앞 농성은 나와 중학생 아이들, 그리고 두 분들이 했다. 늘 하던 것처럼 나는 자리를 깔고 파병철회 우산을 들고 앉았고, 중학생 아이들은 피켓을 들고 섰다.

두 분은 전단지를 들고 오가는 분들에게 나누어 드렸다. 군청 주차장 안에서 하는 폐기장 유치 찬성 농성 때문에 농성장이 산만하다. 날이 갈수록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듯하고, 그 분위기는 뭔가 간절함이 깃든 것 같기 보다는 어떤 험악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우산 아래에 앉아 있는데 누가 곁에 와서 사진을 찍고, 말을 묻는다. 울진 신문 기자라고 소개를 했는데 전단지를 들고 있으면서도 묻는 말이 영 엉뚱하다. 그래도 처음 보는 이를 내가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다른 이들이 묻는 것처럼 대답을 했다. 그러고 있으니 또 웬 양복 차림의 중년 아저씨가 와서 몇 마디 말을 걸었다. 그런데 대하는 모습이며 태도가 사람을 불쾌하게 했다. 울진타임즈 대표라는데 지난 총선에 출마를 했고, 그 때 공약이 이라크파병반대, 핵폐기장반대를 내걸었다는 거다.

그런데 그 분 모르긴 몰라도 지금은 핵폐기장 유치 운동을 앞장서서 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핵폐기장 반대라고 하는 이들은 쥐새끼같은 사람들이라니 뭐니 하면서 아주 말을 함부로 한다. 게다가 오늘 문정현 신부님이 오신다니 자기가 홍근수 목사와 친분이 있다는 둥, 문정현 신부를 잘 안다는 둥 아주 거들먹거리며 이야기를 하는데 더 말을 섞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군청 앞 농성을 마칠 시간 즈음 김재복 수사님과 평화바람이 군청 앞에 도착했다. 거의 일곱 시간 걸린 길. 너무 반가워 인사를 하려는데, 그 때까지 둘레에 있던 두 사람이 먼저 신부님께 알은 체를 하며 나선다. 무슨 십년지기라도 만나는 것 같다. 뒷 이야기는 더 못하겠다. 이 먼 길, 험한 길을 오신 수사님과 신부님, 평화바람 단원들이 울진에 와서 맞은 첫 환영은, 봉변까지는 아니겠지만 너무도 황당한 이상한 사람들의 접대였다. 그이들은 나중에 신부님과 수사님, 단원들에게 함부로 된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미안하고, 속상하고. 나는 도무지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체 땀만 흘렸다. 하필 이런 날 농성장에 지역에서 얘기가 될만한 분들이 아무도 없는 바람에.

수사님은 아주 건강하고 밝은 얼굴이었다. 수사님과 손을 꼭 잡았다.

울진에서 첫날 밤

자리를 옮겨 저녁을 하고,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고, 전교조 사무실로 옮겨 울진 일정에 대해 함께 검토했다. 우리가 짠 일정이 생각보다 빡빡해 보였나 보다. 솔직히 우리는 일정을 쉼 없이 잘 만들어드리는 게 오히려 예의일 것 같아서 우리에게 조금 무리일 것 같아도 열심히 일정을 더 채우려 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평화바람 공연 다니는 사정을 조금 들으니 그게 또 아니었다. 몇 가지 일정은 다시 조정하고 다듬어 처음보다 짜여진 일정을 만들었다. 깔끔하고 시원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하게 나눈 이야기는 순례단의 전체 일정에 대한 이야기.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전국을 다 도는 것으로 하되 대도시 중심이 아니라 각 도마다 작은 모임이나 공동체에서 소박하나 알뜰하게 평화를 일구어 가고 있는 이들이 있는 곳을 찾아 방문하면서 전국 일정을 짜자는 거였다. 후보 지역으로 도마다 한두 군데 씩 몇 군데가 얘기되었다. 그 가운데 울진에 머무는 동안 더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서 최종일정을 확정하는 것으로 결론.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니, 그 경험과 지혜를 나누니 훨씬 좋다. 그렇게 어울려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내일부터는 아침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실 강연부터 해서 정말 바쁘게 움직인다. 바쁠 거라는 게,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게, 오히려 기쁘다. 출발!


[단식일지23]내 안의 미국, 우리 안의 미국
[단식일지20,21,22]길을 떠날 준비
[단식일지18,19]불안한, 너무나도 불안한
[단식일지17]스물 넷의 목숨, 사만 명의 목숨
[단식일지16]자이툰 본진 출국, 28일
[단식일지14,15]힘내라, 이라크! 힘내자, 철군!
[단식일지13]미친개, 제국의 전투기
[단식일지12]이제는 싸움의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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