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바람, 철군의 바람!

[박기범의 철군투쟁 단식일지 27] 2004년 9월 4일

문정현 할아버지와 어린이들

맑은 토요일 아침. 오늘은 모두 부구에서 일정이 시작한다. 울진읍에서 자동차로 이십 분쯤 올라가는 곳. 오전 일찍부터 부구 중학교에서 김재복 수사님과 햇살님네 반 학급 아이들과 만남, 그리고 부구 초등학교에서 문정현 신부님과 어린이들의 만남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모두 같은 시간에 하는 거여서 함께 가는 사람들도 두 패로 나누어 가야 했다. 나는 문신부님과 함께 초등학교 교실로. 교실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줄을 잘 맞추어 앉아 있다. 아마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귀한 손님이 오니까 떠들지 말고 말씀 잘 들으라 일러 놓았나 보다 싶었다.
문정현 신부님이 부구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들과 평화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은 그 동안 억울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을 위한 일들로 살아왔다며 이야기를 시작한 뒤 군산의 미군 비행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서 미선이, 효순이 이야기까지, 그리고 도룡뇽과 지율스님, 천성산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새만금 갯벌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것들을 엮어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모두 작고 약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고, 결국은 생명과 자연, 평화로 이어지는 얘기였다. 그리고 나서 신부님은 이라크 전쟁을, 우리 나라 군대의 파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제만 놓고 보면 하나 같이 아주 심각한 이야기이지만 신부님은 아이들과 마음을 맞추며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끔 얘기를 이어가셨다. 나도 교실 맨 뒷자리 비는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새 나도 아이가 되어 신부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주 재미있는 시간, 그리고 다 듣고 나니 가슴으로 묵직하게 남는 '생명'과 '평화'.

아마 중학교 아이들과 만남을 가진 수사님도 아주 귀한 시간을 보내었을 거다. 중학교에서는 교실이 아니라 클럽활동 시간을 써서 학교 둘레 솔밭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했는데 직접 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 모습 눈에 선하다. 나중에 햇살 님께 이야기를 들으니 아이들에게 이라크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던 수사님이 자꾸만 목이 메이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저 마음이 사십 일 넘게 단식을 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고 했다.

단위 농협 앞 우산 농성

앞으로 당분간 군청 앞 정거장에서는 우산 농성이 어렵게 되었다. 핵 폐기장 찬성 농성하는 사람들이 먼저 그 자리에 집회 신고를 내 놓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농성하는 시간만큼은 양해를 해주기로 했는데, 어제 저녁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더니 그것도 못해주겠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일까지는 단위 농협 앞으로 자리를 옮겨 우산 농성을 한다.

오늘은 사람이 무척 많다. 그 동안 늘 우산 농성을 함께 하던 울진평화모임의 일꾼들은 물론 단식순례단 식구들에, 울진 중학교 평화씨앗반 아이들까지. 사람만 많은 게 아니라 피켓이며 걸개 같은 선전물도 아주 많다. 종이학으로 만든 글씨만 해도 '평화', '반전', '철군'. 거기에 조금씩 더 만들어 보태오던 피켓에 이번 단식순례단을 맞으면서 새로 더한 피켓까지 하면 길을 가득 메울 정도이다. 거기에 수사님이 청와대 앞에 계실 때 있던 걸개들까지 다 내어 걸으니 그 앞 삼거리가 아주 평화의 표정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마침 토요일인데다 학생들 마치는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농성장 앞으로 오가는 사람은 군청 앞보다 훨씬 많았다. 진작 이곳에서 했을 껄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 평화바람 단원들과 울진 중학교 아이들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단지를 건네었다. "오늘 저녁 여섯 시에 연호정에 놀러오세요", "오늘 저녁 여섯 시 평화유랑 공연이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 일을 하니 일하는 사람들도 훨씬 신이 나 보이고, 농성장 둘레 분위기도 한껏 더했다. 아마 함께 하는 이들이 얼마 없으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도 서먹해하고 어색해했을지 모르는 아이들도, 나란히 피켓을 들고 서서 꼭 읽어보고 가세요 하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평화바람 단원들도, 아이들도, 그리고 울진평화모임 일꾼들과 수사님 모두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첫 순례지인 울진읍 단위농협 앞 삼거리에서 파병철회 우산을 쓰고 앉은 두 단식자.

오늘의 단식자는 사십 일일이 되는 수사님과 이십 칠일이 된 나, 그리고 서울에서 나흘째 굶고 내려온 saba, 그리고 평화씨앗반의 다섯 아이들. 짓궂은 평화바람 단원들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수사님과 나를 약올린다고 더 맛난 얼굴로 먹었다. 씨앗반 아이들 옆에 가서도 일부러 더 얄미운 얼굴짓을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약오르기는커녕 재미있다. 앞으로 내내 힘든 걸음이겠지만 이렇게 웃으면서 다닌다면 하나 힘든 줄을 모르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하는 것, 함께 웃는 것, 재미있고, 즐거운 것, 평화의 본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다만 지금 힘든 것은 그 '함께'라는 것이 '우리끼리 함께'이기 때문이다. 이라크를 침략한 대가로 얻은 '우리끼리만 함께'. 이라크 사람들은 그 '함께 웃고, 함께 즐거운 것'에 들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끼리 함께 웃으며 살겠다고 이라크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있다. 우리 군대를 되돌아오게 하는 날까지 우리는 웃으면 웃는 침략자가 되는 것이고, 맛난 것을 먹으면 맛난 것을 먹는 침략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야 저마다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꾸며 살려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 모두 침략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죄를 우리에게까지 뒤집어쓰게 만든 자 누구인가, 우리는 원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를 침략자로 만들어버린 자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침략자로 살고 싶지 않다, 이라크 백성들의 핏값으로 먹고 누리며 살고 싶지 않다. 철군하라!


서울에서, 대전에서

우산 농성을 마친 뒤 평화바람 단원들은 연습을 하러 갔다. 지난 해 12월부터 전국 유랑을 시작한 평화바람은 그 사이 삼십 개 가까운 도시로 평화의 신바람을 일으키며 다니다가 지난 5월 29일 평택에서 한 평화축제를 끝으로 두 달 가까이 공연을 쉬고 있었다. 두 달만에 다시 시작하는 유랑을 단식순례단과 함께 하는 것이고, 그 첫 공연이 오늘이었다. 평화바람이 공연 연습과 무대 설치 준비를 하는 동안 울진 모임 일꾼들도 선전물을 더 만들고, 풍물 장단을 맞추어 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마침 울진 모임 일꾼들이 거의 풍물 모임을 함께 하는 분들인데, 이 분들도 함께 맞추어 본 게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길놀이를 들어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맞추어 봐야 했다.

그 사이 나는 지회 사무실에서 사흘 동안 밀려 있던 일지를 썼다. 사흘이라고 하는데 마치 하루처럼 정신없이 지났다. 기억을 더듬으니 그래도 어제 그제 일들은 떠올리겠는데 사흘 전 일은 아무리 생각에도 희미했다. 그저 정신없이 바빴다는 기억 뿐.

그렇게 잠깐 컴퓨터 앞에 앉아 정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여러 통 왔다. 기범이 형! 하는 동훈이 목소리. 대전에 사는 중학생 아이다. 지난 해 대학로에서 소망나무 단식을 할 때에는 평일에 학교에 현장활동을 간다는 허락을 받아 어머니, 동생과 함께 단식장에 찾아오기도 했던 아이. 그 때 대전에서 서울로 찾아왔을 때도 크게 놀랐는데 오늘은 울진으로 왔다. 현동 쯤 지날 때 오고 있다는 전화가 왔고,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울진에 왔다.

동훈이에게 전화가 온 뒤에는 서울에서 <전범 민중재판 운동>을 알리러 함께 하러 온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분이 내려왔고, 대항지구화행동에서 일하는 분이 함께 왔다. 바끼통의 saba도 우연히 그 버스를 같이 타 셋이 내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는 동해 쪽에 볼 일이 있어서 머물다가 내려왔다는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왔고, 사과꽃과 시치프스가 내려왔다. 사람들에게 전화를 받고, 마중을 나가고 하니 시끌시끌하니 무언가가 되고 있구나 싶었다. 우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무얼 하고자 이렇게 작은 몸짓으로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있는 걸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얼마나 소중한가 다시금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작은 몸짓이지만 우리는 그만큼 평화로 한 발짝씩 더 다가서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한국군 철군도 이루어내고, 이라크 전쟁이 끝나는 날도 하루라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평화의 바람, 철군의 바람

연호정에 나가니 우와! 나는 '이곳이 울진 맞나, 여기가 연호정이 맞나?' 할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화바람 꽃마차에서 장비를 내려 무대를 만들었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매어 피켓들로 마당을 둘렀다. 걸개들은 되는대로 자동차 위에도 널고, 나무사이에도 묶고 하니 누더기 같은 그 모양새가 오히려 자유로운 잔치판의 맛을 한껏 살려주었다.

풍물 모임의 길놀이로 공연의 앞마당이 열렸다. 늘 일꾼모임에서 봐왔던 분들이지만 풍물을 하는 모습으로는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잘 놀았고, 훨씬 흥이 났다. 그것으로 시작한 공연. 보리 님과 고철 님, 밥 님, 반지 님의 익살스런 노래 공연에 울진 아이들이 리코오더로 부른 <살람 알라이쿰>,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노래에, 춤에, 문정현 신부님의 거리연설에……. 별음자리표 아저씨는 언제 울진에 내려왔는지 무대에 나왔다. 주문처럼 후렴구를 되풀이하는 '전쟁을 반대해 평화를 사랑해, 전쟁을 반대해 평화를 사랑해~' 와 '총을 내려라 총을 내려, 총을 내려라 총을 내려~'. 어두워졌고, 불을 밝혔지만 꽃마차 무대 앞에 앉은 사람들은 떠나지 않고 자리를 가득 메웠다. 서울에서 하는 ! 공연도 보았고, 그 밖의 큰 도시에서 하는 모습도 사진으로 보았지만 그 어떤 곳보다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즉석에서 미진이가 동무들하고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동훈이는 아주 멋진 휘파람 연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깜짝 놀라게 한 부구 중학교 아이들의 사물 공연에 보리 님과 고철 님이 방방 띄워준 마지막 공연, 그리고 풍물 모임의 난장. 할머니들도, 아주머니들도, 꼬맹이 아이들도 신이 나서 어울려 뛰고 놀았다. 뛰고, 놀고, 춤추고, 웃고. 그만 마치기가 아쉬웠지만 그만 인사굿을 하고 자리를 마쳤다. 공연을 모두 마친 뒤에는 누가 같이 하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들 함께 정리를 하고 쓰레기를 주웠다. 신나서 방방 뛰고 놀 때는 그게 평화라 생각했는데, 다 같이 정리하고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니 그게 또 평화다 싶었다.

지난여름 이라크에서 알마시뗄 놀이방을 열던 날, 개관식이라 하여 작은 행사를 연 일이 있었다. 해피패밀리라는 이라크 대학생이 모인 아동극 동아리가 인형극을 했고, 우리는 한쪽에서 꼭 오늘 한 것처럼 페이스페인팅을 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다. 지난봄 바그다드 타흐리 광장에서는 꼭 오늘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걸개를 그렸듯이 그 때는 이라크인들과 함께 걸개를 그렸다. 광장에 나와 구경을 하던 사람들, 아이들, 이라크 경찰은 물론 군인까지 붓질을 했고 한 마디씩 바람 따위를 적었다.

그 때도 꼭 오늘처럼 행복했다. 이런 평화의 기운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땅에, 이렇게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 하늘 위로 어떻게 폭탄을 쏠까 생각했다. 하지만 저 무지막지한 이들에게 그런 의심 따위는 너무 순진하기만 한 거였다. 다 죽이고, 다 망가뜨리고, 다 빼앗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아니, 더 악랄하고 집요하게 하고 있다. 문득 이 평화순례가, 이 평화의 신바람이 진정으로 가야 할 곳은 피 흘림이 있는 이라크 땅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 즐겁고 신나는 평화의 신바람, 우리가 이 신바람? ?진정으로 나누어야 할 곳은, 이 평화의 기운을 전해야 할 곳은 더 아픈 사람들, 더 슬픈 사람들, 더 괴로운 사람들이 있는 땅이어야 할 것이다. 이 전쟁통이라면 그건 다름 아닌 바그다드와 팔루자, 나자프와 쿠프. 지금 울진을 시작으로 떠나는 이 순례의 길이 부디 그 땅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불어라 평화의 바람, 그리고 철군의 바람!
밤이 무르익도록 이어진 연호정 단식순례단과 울진군민들의 평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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