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주춤하면 힙합이 앞장서나니

[서평] 박형주,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 나름북스, 2022.

어느새 힙합은 멋지지 않다고 했다. 그럴 수 있겠다. 롤렉스와 벤틀리 말고는 자신을 증명할 방법을 모르는 것 같은 이들과 비치와 머더퍽커가 없으면 말을 할 줄 모르는 애들이 ‘쇼미더머니’에 나와서 디스 배틀을 하고, 이내 카메라가 꺼지면 방금까지 서로를 향한 인신공격을 퍼붓던 사람들이 ‘형님’, ‘동생’하면서 패거리를 짓는 게 사실 멋있지는 않다. 정말이지 ‘쇼미더머니’가 세상을 망치는 중일까.

‘쇼미더머니’가 세상을 망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마치 힙합이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 아니면 안 된다는 양 힙합을 추켜세운다. 탄압받던 흑인들의 유일한 저항 수단, 컨셔스한 가사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일침만이 오직 힙합의 본질이라는 듯. 그러나 힙합이 처음 ‘힙합’이란 이름을 갖게 됐을 땐 이건 명백히 파티 음악이었다. 마리화나를 물고 술에 취해 춤을 추고 플러팅을 날리는 그 파티에서 트는 가장 신나는 음악. 어쩌면 나무위키의 중2병들이야말로 세상을 망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힙합이란 게, 실은 힙합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오직 단 하나의 서사를 지니지는 않는다. 다양한 맥락과 역사가 교차하며 쌓여온 것. 세상 모든 것에 ‘원래 그런 것’이란 없는 법이다. 원래 그런 것이란 없다는 사실만이 원래 그런 것일까. 하물며 수십 년간 (어쩌면 그보다도 더 길게) 수많은 사람이 향유하고 갖고 놀고 뒤틀었다 또 변용하는 과정을 거치는 예술과 문화라는 것에는 특히 더 원래 그런 것이 없겠다. 그러니까 힙합은 어느 래퍼의 말처럼 폭력적인 잡종 문화이기도 하고,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기도 하고, 머니스웨그와 파티, 섹스와 마약의 동반자기도 하다. 그냥 요즘 유행하는 유행가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힙합을 비롯해 모든 사안의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만 꽂힐 순 있겠지만, 어느 부분만 있는 것처럼, “머니 스웨그와 쩌는 라임으로 무대를 찢는 것만 리얼 힙합, 나머지는 다 가짜, 페이크 래퍼”라거나 “힙합이야말로 저항정신의 상징, 돈 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 국힙(한국 힙합) 지질이” 같은 소리를 하며 자기 세계를 좁혀가는 것만이 조심해야 할 일이다.


혁명이 주춤하면 예술이 앞장서나니

미국에 사는 아프리칸들이 시작한 힙합은 물론 저항의 상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힙합이 원래 그래”라기보다는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들의 노래, 그보다는 차라리 “노래란 것이 원래 그렇기 때문”에 가깝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흑인의 수감률, 백인과의 임금 격차, 혐오와 편견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노래가 아름답고 희망차긴 어려울 테니까. 힙합의 골든에라라고 불리는 90년대 미국에서 18세에서 64세까지의 흑인 노동자 임금은 같은 나이 백인 노동자 임금의 39.2%에 그쳤다. 이 수치는 시간이 지나 2008년엔 27.9%까지 떨어졌다(Becky Pettit, 《Invisible Men》, Table 4.3, 2012).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무릎에 목을 짓눌려 사망한 사건이 고작 2년 전인 2020년에 벌어졌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노래란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우리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우리의 삶을 위해 투쟁한 이들을 샤라웃(Shout out, 힙합에서 존경이나 동경의 대상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말)한다는 이야기인 것은 자연스럽다. 저항하기 위한 저항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일상이 곧 저항일 수밖에 없는 것.

그건 사실 비단 미국의 힙합음악에만 드러나는 특징은 아니다. 자기 삶의 회한과 고통을,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표현한 노래와 몸짓은 어디에나 있다. 물론 한국에도. 꽃이 피고 지도록 미싱이 돌아가고 있다고 노래했고, 한낮의 더위 같은 시련을 지나 서러움 버리고 광야로 가겠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죽도록 일해도 가난한 노동자, 인권과 자유 따위는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던 시대의 민중들의 노래.

노래란 그런 것이었다, 삶을 반영하는 일. 삶이란 그렇다, 내게 주어진 고통과 억압을 극복해내는 일. 그 일들을 노래하는 일이란 그 형태가 무엇이든 어디에서 누가 만들었든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노래와 예술의 본령이란 삶의 형태를 모사하는 것. 그렇다면 인권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 가사는 다 노래와 예술이 아닐까. 그럴 리 없다.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과 가락이란 모두에게 다 다를 테니까. 가끔은 술에 취해 (어쩌면 술 말고 다른 것에 취해) 춤을 추고, 섹스하고, 신나게 떠들고 노래 부르는 것이 삶을 지탱시켜주고 위로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이 어쩌면 예술의 본질일 수 있겠다. 오늘의 삶을 위로하는 일, 내일의 삶을 기대하게 하는 일.

힙합이란 음악에 거창하고 대단한 정의를 덧씌우기보다는 힙합을 포함한 우리의 노래와 예술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다. 무엇이 힙합이냐는, 힙합이 어떤 장르냐는 도식적인 질문이 실은 힙합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셈이다. (일종의 컨셔스 아티스트이자 리릭시스트였던) 백기완 선생께서는 말씀하셨다, 혁명이 주춤하면 예술이 앞장서는 것이라고. 혁명이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빚어가는 일이라면, 우리가 선 땅에서의 고통을 노래하고 내일을 상상하는 힙합은 그 고통이 무엇이고,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지, 어떤 누구를 샤라웃하는지와 상관없이 혁명과 다르지 않다.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은 힙합이 받는 오해에 대한 변론이다. 한국에서 힙합은 ‘철없는 남자애들의 돈 자랑뿐인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물론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여성혐오적 가사, 머니 스웨그, 자유로움과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 반지성적인 태도까지, 2022년 한국의 주류힙합은 언젠가부터 멋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저자는 그런 못난이들을 꾸짖기보다는 대신 많은 이들이 보지 못했던 힙합의 또 다른 부분들을, 그러니까 힙합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의 삶을 응원하고 위로했고, 때로는 가장 격렬한 무기가 됐으며 어떻게 세상을 모사하고 또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예술로서 세상의 곁에 있었는지를 말함으로써 힙합을 변호한다. 힙합에 대한 가장 차분하고 급진적인 변호.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에는 저자의 의견이나 분석은 없다. 그저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랄만한 뮤지션들의 음악과 그 음악의 사회-사상적 배경과 그 음악에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랄 뮤지션의 음악을 소개할 뿐이다. 예술과 음악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누구는 무엇에 의해 형성됐는지를 담담히 살펴보는 것으로 힙합이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의 우리는 잘 몰랐던 일면을 소개하고 있을 따름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미국 국가예술 훈장 수훈자이자 그래미에 평생 공로자로 헌액된 ‘칼립소의 왕’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의 이야기다. 벨라폰테는 팝과 재즈를 기반으로 노래하는 가수지만 힙합을 사랑하는 할아버지(1927년생, 송해 할아버지와 동갑이다)이기도 하다. 평생을 흑인 인권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온 사회운동가인 벨라폰테는 영향력 있는 대중 예술가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 않는 제이지(Jay-Z)와 비욘세(Beyonce)를 ‘디스’하며 차라리 소수자를 대변하는 백인 브루스 스프링스턴이 더 흑인 같다고 말했다. 제이지는 발끈하긴 했지만 이내 벨라폰테와 이야기를 나누며 갈등은 해소됐다. 2020년엔 제이지가 벨라폰테가 수여한 ‘진실의 문지기 상’을 받기도 했다. 벨라폰테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인종주의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쿠바에서 흑인 래퍼들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전하며 힙합이 인종주의와 불의에 저항하는 음악이라고 설명했다. 벨라폰테가 다시 쿠바를 방문했을 때 쿠바의 래퍼들은 벨라폰테에게 꽃다발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벨라폰테 덕분에 힙합이 쿠바의 문화와 쿠바의 혁명을 표현하는 참된 예술 양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 힙합과 예술과 혁명을 사랑하는 활동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책의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나스(NAS)는 힙합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래퍼를 꼽으라 하면 이견 없이 언급되는 사람 중 하나다. 나스는 ‘Stay Chisel (Solo Version)’에서 “영양가도 없이 기름기만 낀 랩을 듣지 말고 듀보이스, 볼드윈, 차비스, 아사타, 존 호프 프랭클린, 안젤라 데이비스를 읽으라”고 했다. 듀보이스(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는 나스가 평생을 두고 샤라웃한 학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흑인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가였고, 범아프리카 운동을 기획하는 사상가였다. 듀보이스는 1963년 8월 27일에 죽었고, 그다음 날인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모인 20만 명의 민중이 듀보이스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틴루터 킹은 “I Have a Dream”이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이 집회의 기획자 중 한 명은 해리 벨라폰테다. 듀보이스의 자장은 나스뿐 아니라 힙합씬 전반에 자리 잡고 있다. 켄드릭 라마와 함께 힙합씬 최고의 리릭시스트로 평가받는 루페 피아스코는 흑인이 차별받지 않는 역사를 상상한 곡 ‘All Black Everything’에서 듀보이스를 ‘헌법을 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루페 피아스코는 나스의 영향을 받아 래퍼가 됐고, 피아스코의 첫 앨범을 만들어준 것은 제이지다. 듀보이스에서 벨라폰테로, 나스와 제이지로, 피아스코로.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을 읽고 있자면 흑인운동과 힙합은 서로 관계 맺고 이어지며 계속됨을 알 수 있다.

Job of resurrectors is to wake up the dead
소생자의 일이란 죽은 이를 일으키는 것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을 단순히 표현하자면 ‘흑인 운동사와 관계맺은 힙합의 역사’다. 그러나 역사란 말은 그렇게 단순할 순 없다. 담담히 그저 뮤지션들과 흑인운동 활동가,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은 흑인운동의 ‘주체’인 흑인들의 삶과 혁명을 드러내는 예술로서의 힙합을 그저 ‘관찰’한다. 그러나 관찰의 결과는 삶과 혁명을 드러내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리스너들과 스피커들(사실 리스너와 스피커는 언제나 같은 사람들이다)을 일으킨다. 삶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의 예술과 힙합. 저자는 힙합을 “가볍고 즐거운 예술이자 심원하고 혁명적인 예술”이라고 했다. 힙합이란 원래 무엇이라고 따지기 전에 가볍고도 심원한 예술의 본령을 즐기면 될 일이다. 나의 삶을 드러내고 내일의 혁명을 꿈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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