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2년 현재 연 수익 11조 700억 원, 부채비율 68%. 세계 최대의 브랜드 컨설팅 그룹「인터브랜드」사와 미 경제주간지「비지니스위크」의 ’04년「세계 100대 브랜드」발표에서 그 가치가 125억불로 평가되어 세계 21위의 브랜드로 선정. 수치만으로 보면 가히 초일류 기업이다. 건실할 뿐만 아니라 돈도 잘 벌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업이다.
게다가 이 기업은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너무나 인간적인 나머지 고객으로 하여금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할 정도이다. 물론 고객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저 정도의 수익을 올릴 정도면 상당한 고객들이 이 기업의 제품을 ‘또 하나의 가족’처럼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대강 눈치들 채셨겠지만 이 기업은 다름 아닌 삼성이다. 1938년 자본금 3만 원의 삼성상회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 굴지의 대그룹으로 성장한 바로 그 삼성.
2.
2002년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뽑은 가장 일하고 싶은 회사 1위, 2003년 한국의 훌륭한 일터 1위. 2002년 국내 매출액만 4조 5,787억 원, 당기 순이익만 국내에서 5,865억 원. 삼성 내에서도 선도적인 사업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기업. 삼성 SDI다. 삼성전관으로 출발하여 디스플레이와 모바일 기술에서 세계 수위를 다투고 있는 기업이다.
역시 튼튼한 재무구조를 자랑하면서 돈도 많이 버는 동시에, 에너지 절약에서는 다른 기업의 모범사례로 꼽히는가 하면, 국제노동기구의 기준에 따라 아동노동이나 강제노동과 같은 인권침해행위 금지라는 원칙을 세우고 국내외 사업장에 적용하고 있는 인권선도업체이기도 하다. 사원을 극진히 아끼는 마음은 삼성 SDI의 ‘노사불이(勞使不二) 철학’으로 나타난다. 삼성 SDI의 인력개발팀장은 ‘우리 회사의 경쟁력과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원천은 노사불이 철학에서 시작됩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다.
3.
‘노사불이의 철학’까지 가지고 있는 삼성 SDI는 추상적 철학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고객만족을 위한 ‘또 하나의 가족’이란 구호는 고객뿐만이 아니라 사원까지도 그 가족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리하여 삼성 SDI의 노사는 ‘철학’을 공유하면서 ‘가족’으로 거듭난다. 삼성 SDI는 노동자를 ‘가족’같이 대하면서 ‘노사불이’의 끈끈한 정을 나누기 위하여 간혹 ‘불법납치, 감금, 협박’과 같은 행위를 하기도 한다. ‘가족’이 되는 데는 일정한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내가 부족할 경우가 있나보다.
그리하여 부족분을 채우기 위한 회사측의 노력은 ‘외부 문제세력 동향관리, 문제사원 밀착 감시, 퇴근 후 감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 수년 간 삼성 SDI의 이와 같은 노력은 지치지 않고 계속되어 왔으며, 급기야 올 7월 ‘핸드폰을 이용한 위치추적’이라는 진화된 형태의 가족사랑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사망한 사람의 신원을 도용하여 불법적인 복제폰을 만들고, 친구 찾기 서비스를 이용하여 표적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파악하는 추적관리프로그램이 가동된 것이다. 현직 사원뿐만 아니라 퇴직사원 및 사원의 가족까지 추적되었다. 삼성 SDI의 극진한 가족사랑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4.
삼성 SDI의 극진한 가족사랑을 경험한 당사자들은 의외로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겪었으며, 그 결과 핸드폰 추적을 한 가해자를 수사해달라는 고소까지 제기하였다. 고소가 이루어지자 삼성 SDI는 혐의 일체를 부인하였고,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종내 입을 다물고 있다. 아마도 검찰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듯 하다. 이에 호응하여, 검찰은 이 사건을 ‘가족’간의 문제라고 판단했는지 수사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고 있다.
혐의 일체를 부인한 삼성 SDI는 신기하게도 ‘가족’에 대한 관리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고소 당사자인 현장 노동자들에게 감시원을 붙여 밀착 관리하는가 하면, 엉뚱한 곳으로 인사발령을 내고 정작 발령처에서는 발령받은 바가 없다면서 원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소취하를 공공연히 요구하면서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들을 하고 있으며, 동료직원들을 동원하여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지은 죄가 없는 당사자 치고는 너무 오바하는 것이 아닌가?
5.
더 웃기는 것은 다른 ‘가족’들의 모습이다. 소위 ‘삼성맨’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한 채 동료들의 고통을 방관하고 있다. 방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사측을 대변해 고소인들을 왕따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을 선도하는 집단으로 스스로를 위치지우는 자랑스런 ‘삼성맨’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고소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거다. 이들은 고소인들이 처한 상황이 결코 자신들에게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수원을 거점으로 하는 삼성 SDI와 삼성전자는 생산기지를 외국 및 다른 지방으로 이전하기 위해 구체적인 진행을 하고 있고, 사업 진척에 따라 자신들의 고용상태가 일시에 붕괴될 위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들이라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에도불구하고 이들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무뇌 삼성맨’을 양산한 것이다. 폭력과 탄압, 기만과 사술로 보위된 삼성의 ‘무노조 경영’ 신화는 세계 초일류 브랜드의 소속직원들을 주체성 없는 ‘무뇌 삼성맨’들로 전락시키면서 오로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뇌가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동료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 ‘무뇌 삼성맨’들은 회사 측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회사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특별관리대상 ‘가족’들에게 분노하는 듯 하다.
0.
세계 초일류 기업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종양처럼 도사리고 있는 이 반인권적 패륜행위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근저에는 ‘삼성맨’들의 조신한 자기관리가 있었다. ‘무노조 경영’ 철학이 만들어 낸 ‘무뇌 삼성맨’들의 모습이다.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는 동료들은 이 유능한 ‘무뇌 삼성맨’들에게 있어서 ‘가족’이 될 수 없는 낙오자들일 뿐인 것이다.
반인권적 패륜행위를 자행하는 사측에 대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오히려 사측을 옹호하는 한 ‘삼성맨’들은 ‘무뇌 삼성맨’일 뿐이다. 사측의 부당한 요구에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삼성맨’은 정말 극극극극소수일 뿐이란 말인가?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추상같은 법집행을 담당해야할 검찰이 이렇게 축 처져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삼성 앞에만 서면 검찰도 ‘무뇌 검찰’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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