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엄마 가슴을 시커멓게 태우게 한

[박기범의 철군투쟁 단식일지 37, 38] 2004년 9월 14, 15일

자꾸만 먹는 것 생각 (2004년 9월 14일)

여수에서 두 밤을 자고 공주로 떠나는 길, 아쉽긴 하지만 김진영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 선생님들은 20일에 서울에서 있을 전범 민중재판 발기인 총회에 꼭 올라오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순례 기간 들은 말 가운데 무엇보다 가장 힘이 된 말. 여수에서 공주, 그 길 또한 만만치 않다. 일찍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아침을 서둘러 단원들이 묵고 있는 쪽으로 갔다. 단원들은 이틀을 머무는 동안 계속 여수의 순례 프로그램을 준비한 모임의 한 분이 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들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서둘렀는지 수사님과 내가 짐을 챙겨 그 식당으로 갔을 때 단원들은 아직 아침 식사를 하기 전이었다. 상에 둘러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밥을 들고 오는 건 식당 부엌이 아니라 바깥으로 난 문이었다. 동화읽는 어른 모임 선생님 한 분이 밥솥에 반찬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아아, 아침은 이렇게 집에서 지어서 가지고 왔구나. 신부님이 묵은 김치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지난겨울에 묻은 독에서 김치를 퍼왔다고 했다. 일부러 상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데, 그런 소리만으로도 입에 벌써 군침이 가득했다.

사실 음식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참 많다. 실상사에서 자고 나오던 날이던가, 꿈에서 내가 어느 상에 놓인 음식을 마구 집어 먹었다. 꿈속에서도 의식은 있어서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배 아플 건데,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먹으면 안 돼, 안 돼 하는데 손은 멈추지가 않는 거였다. 손으로는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 자꾸만 입에 쳐 넣는 거였다. 머릿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 괴로워했지만 손과 입은 내 의지하고 다르게 음식이라는 것들을 마구 퍼 먹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괴로워하면서. 그러다가 살폿 잠이 깨어 ‘아, 꿈이었구나.’ 하고 겨우 안도를 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옆에 있는 수사님에게 “수사님 있잖아요, 내가 꿈에……” 하고 지난밤에 꾼 꿈을 이야기하니까 수사님은 “야, 나는 먹을 거 때문에 싸우는 꿈을 꿨어.” 하는 거였다. 수사님도 지난밤 꿈을 꿨는데 역시 먹는 꿈이었다고 말이다. 공양간에 차려놓은 밥을 먹는데 갑자기 곁으로 스님들이 오더니 왜 밥을 먹느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밥 먹다 말고 스님하고 같이 싸웠다. 수사님도 그 꿈에서 막 깨어나 기분이 이상하다 하고 있던 참이었다. 혹시 그날 밤 우리가 자는 방으로 무슨 귀신이라도 다녀간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같이 먹는 꿈을 꿨으니 말이다.

어제는 또 어땠는가 하면 저녁 무렵 여수 바다를 보러 바닷가로 나가는 길이었다. 요즘 차를 타고 먼 곳으로 옮겨 다닐 때마다 새삼 느끼는데 어느 거리거나 먹는 것 파는 집이 가장 많다. 여수도 다르지 않아서 특히 저녁이면 번쩍이는 먹는 집 간판이 눈에 들어오곤 하는데 왜 그랬는지 어느 순대집 간판이 자꾸만 기억이 났다. 나는 평소 순대를 그리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가만히 있어도 입 안으로 순대가 막 넘어오는 것 같은, 마치 지금 당장 입 안에 순대가 있는 것 같은, 실제로 내가 지금 순대를 먹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였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게 꼭 실제처럼 내 입 안에 순대가 들어와 있는 것 같고, 내가 씹고 있는 것 같고, 그 느낌이 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해도 자꾸만 입 안으로 순대가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게 아마 아기를 가진 어머니가 입덧을 할 때 어떤 음식이 너무너무 먹고 싶어진다던데 그게 이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했다. 아무튼 먹고 싶은 생각이 참 많이 난다. 함께 다니는 분들이 불편해하거나 미안해서 식사를 잘 못할까봐 일부러 그런 얘기는 잘 하지 않지만 정말 먹고 싶은 게 많다. 그래서 수사님하고 둘이 있으면 자꾸만 먹는 얘기다.

공주 시내 파병철회 캠페인

순례단원들이 밥을 다 먹고 이제 공주로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여수에서 꼭 받아야 할 택배가 아직 오지 않았다. 순례를 다니면서 작은 공연이나 집회, 캠페인 때 쓸 유인물을 울진에서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준 것인데 벌써 어제 도착했어야 할 게 아직 오지 않았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니 여수로 보낸 상자가 안산으로 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다시 여수로 보낸다 하는데 그게 오늘 오전 아홉 시 이십 분이면 된다고 했다. 다시 공주로 택배를 보내 달라는 방법도 있지만 아주 받아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전화를 걸었더니 열 시 반이나 되어야 온다는 거다. 말을 자꾸 바꾼다. 그냥 집에서 있으면서 물건을 기다리는 거라면 그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지치고 바쁜 걸음, 그것도 열 명 가까운 대식구가 움직이는 걸음을 이렇게 붙잡으니 책임감 없이 일하는 회사가 참 야속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있나, 기다려야지. 기다려서 유인물 상자를 받아 출발한 게 열한 시. 생각보다 두 시간이나 늦어 출발을 했다. 4시부터 거리 캠페인을 하기로 했으니 여유가 없다.

잠이 들어 있다가 휴게소에 들르면 깨고, 다시 잠이 들어 있다가 휴게소에 들르면 잠깐 깼다. 차를 오래 타면 몸이 아주 힘들다. 수사님은 더욱 힘들어 보인다. 아니, 사실 50일차가 가까워져 오면서 수사님은 부쩍 힘들어했다. 아침 시간에는 조금 개운해 보이지만 바깥을 조금 다니다 보면 얼굴에 힘든 기색이 가득, 조금 쉬다가 또 조금 움직이면 힘든 얼굴이 되곤 했다. 눕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고, 거리 공연을 위해 나갔다가도 봉고차에 들어가 등받이를 뒤로 젖혀 그 위에 눕곤 했다. 그런데 몇 시간씩 차를 타니 찡그린 얼굴이 펴지지 않는다. 차를 오래 타고 나면 나 또한 그렇다. 기운 없는 거야 매 한 가지이지만 거기에 몸이 저린 것처럼 아프기까지 하다. 흔들리는 낡은 봉고차에 긴 시간 몸을 싣고 있으려니 몸이 정말 힘들었다.

그렇게 네 시간 반이 걸려 내린 곳은 공주교대. 정문에 들어가자마자 문정현 신부님 강연을 알리는 펼침막이 눈에 띄었고, 게시판마다 선전물들이 보였다. 누가 따로 나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것들을 보니 반겨 맞아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4시부터는 캠페인 정도를 하다가 6시에 신부님 강연을 하는 걸로 계획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바로 꽃마차에서 걸개와 펼침막, 피켓,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받은 전단지와 책상, 나누어줄 버튼 들을 내 놓고 캠페인 준비를 했다. 한참 내려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서울에서 전범 민중재판 운동을 하는 이도 내려왔고, 평화박물관에서 영상 기록을 준비하는 이도 내려왔다. 어느새엔가 공주교대 학보사 기자도 나와 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띠리리리리 울리는 손전화 소리. “어, 기범아. 어디쯤 왔니?”, “네에, 저희 벌써 학교에 들어와서 캠페인 준비하고 있어요.”, “학교? 우리는 지금 정문 앞에 있는데.”. 이쪽 순례 일정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신 황금성 선생님 전화다. 아, 우리가 잘못 안 모양이었다. 오후 네 시 캠페인, 그리고 여섯 시에 신부님 강연이라 해서 우리는 둘 다 교대에서 한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캠페인은 공주대, 강연만 교대인가 보았다. 그래서 서둘러 부린 짐을 싣고 공주대로 넘어가니 정문에는 이곳 고장의 분들이 깃발과 피켓 따위를 들고 나와 우리를 마중 나와 있다. 꽃마차와 함께 우리가 들어가니 손뼉으로 반겨주었다.

그런데 내려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니 아직 4시 캠페인에 대한 계획도 뚜렷하게 잡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학교에 들어가서 캠페인을 한 번 쯤하고, 시내 어디를 가서 또 한 번 캠페인을 하다가 자리를 옮겨 캠페인을 하고 강연을 했으면 좋겠다는……. 시간도 벌써 네 시 반이라 얼마 남지도 않았거니와 그렇게 옮겨 다니면서 캠페인을 하자면 정작 캠페인보다 꽃마차에서 짐을 올렸나 내렸다 하느라 시간이고, 힘이고 다 쓰지 싶었다.

평화바람과 함께 하는 캠페인은 그저 피켓만 들고 행진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나 영상 같은 볼거리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니 한 자리에서 무얼 하자면 준비하는 데에도 애가 많이 들거니와 아예 어느 한 자리에 터를 잡은 채 오가는 시민들을 만나는 일이 훨씬 효과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 지역 실무를 맡아서 한 분하고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어찌할까 하다가 공주 시내에 주로 캠페인을 많이 한다는 네 거리로 나갔다. 나가보니 공주 시내는 여느 도시 못지않게 상가도 요란했고, 사람들도 많았다. 꽃마차에서 다시 책상을 내려놓고, 펼침막과 걸개를 내려 걸고, 피켓과 전단지 버튼 따위 시위 물품들을 내려 캠페인을 시작했다. 해밀 님과 공작 님이 마이크를 들고 시민들에게 우리가 하는 캠페인에 대해 선전을 했지만 그 소리는 잘 전달되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 음반가게며 화장품 가게, 옷가게, 노래방 들에서 손님을 끄느라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다른 때에는 꽃마차가 평화바람 노래만 틀어 놓아도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둘레로 모여들곤 했는데 복잡하고 시끄러운 공주시내에서는 그게 영 어려웠다. 자리가 허락한다면 ‘거리의 가수’ 별음자리 아저씨도 노래를 몇 곡 불렀을 텐데 그건 전혀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어서 전단지를 건네는 선전전은 톡톡히 할 수 있었다. 오늘 오전에 우여곡절로 해서 전단지를 받았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영 힘들기만 했을 것이다. 공주의 농민회에서 나온 분들,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분들, 전교조에서 나온 분들, 공주대학교 학생들까지 지역에서 나온 분 여럿에 순례단원들이 모두 나서서 피켓과 유인물로 선전전을 했다. 순례를 마칠 때까지 쓰라고 만든 유인물은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 반도 넘게 다 나누어 주었다. 나는 여수에서 차를 타기 시작해 공주까지 오는 동안 차 안에서 너무 힘이 들어서 처음에는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는데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러 나오니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기운이 났다. 그래서 유인물을 들고 마치 울진 군청 앞에서 사람들을 만나듯이 “파병에 반대합니다, 꼭 읽어보세요.”, “전쟁에 반대합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하고 오가는 분들께 유인물을 건넸다.

공주고등학교 평화 이야기

시내 캠페인을 마치고 바로 공주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분명히 공주교대에는 오늘 여 섯 시부터 문정현 신부님 강연이라는 펼침막도 걸려 있고, 그런 내용으로 된 벽보도 곳곳에 붙어 있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갑자기 공주교대 측에서 문신부님 강연을 허락할 수 없다 하여 장소를 옮긴 것이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대학이 얼마나 변했기에 총학생회에서 준비한 강연을 학교에서 못하게 할까? 내가 학교를 그만두던 7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오후에 공주교대에 짐을 내렸다가 약속 장소를 잘못안 걸 알고 공주대로 부랴부랴 갔을 때 우리 꽃마차가 정문에 들어서니까 정문 수위 아저씨가 우리를 나가라던 일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학교에서 나가게 하라고 연락이 왔다는 거다. 정말 기가 막힌 일. 대학이 외부인을 못 들어오게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 이 어이없는 일들을 잇달아 겪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야 우리가 하고 다니는 활동 정도에는 경찰도 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대학 당국이 나서서 못하게 하다니, 대학 안에서 학생회의 자리 또한 그 정도뿐이 안 된다니. 오히려 군사독재 시절보다 못한 대학 풍경 아닌가? 정말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서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 자리를 준비한 분들은 급하게 공주고등학교의 강당(대학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히려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환영하면서 허락해주었다 한다.)으로 자리를 옮겼고, 공주교대에서는 원래 강연을 열려고 한 장소에서 6시부터 그 자리에서 학교 쪽을 규탄하는 집회를 한다고 했다.

시간이 되면서 사람들이 한 분 두 분 모였다. 지난 번에는 대전에서 울진까지 찾아와주셨던 류귀애 님과 동훈이, 동민이가 왔다. 동민이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교복을 입은 채다. 아직 충청권의 순례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류귀애 선생님이 아는 분들에게 연락을 하면서 이 일을 도와주느라 애를 많이 쓰셨다. 그래서 논산에 계신 선생님 한 분께 연락을 해서 준비해 보기도 하고, 천안 아산 쪽으로 연락해 준비해보려 하기도 했지만 여건이 모두 여의치 않았다. 강당으로 올라가니 계순옥 선생님도 벌써 와 계셨다. 아직 빈 강당에 조금 더 앉아 기다리다 보니 여섯 시가 조금 지나니까 금세 꽤 넓은 강당이 꽉 찼다. 첫날 울진 연호정에 모인 사람들 수에 버금갈 정도였다. 아마 시작할 때쯤 해서 막 모이게 된 분들은 다들 퇴근을 하고 나오는 교사 분들이지 싶었다. 공주에서도, 부여에서도, 논산에서도 마음을 함께 하는 분들이 그곳 공주 고등학교 강당을 따뜻하게 채웠다.

오카리나 연주. 봄이던가, 부여의 황금성 선생님 댁에 갔을 때 찻집에 가서 본 일이 있는 청년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찻집에 와서 오카리나 연주를 한다는 그이는 꼭 음반에서 듣는 것처럼 그렇게 연주를 잘했다. 실은 처음에 황금성 선생님께 이쪽 순례에 대한 의논을 드리면서 순례단과 고장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드는 작은 공연 같은 것도 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드릴 때 예를 들면서 말한 게 ‘그 때 그 찻집에서 오카리나를 불던 분’도 나와서 연주도 하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부여 아닌 공주에서, 그것도 문화제가 아니라 강연회 자리인데도 이렇게 와서 성의껏 연주를 했다. 그이는 그저 연주를 하기 전에 곡명 정도만 얘기할 뿐 따로 어떤 말도 더 하지 않았지만 그이가 부는 소리와 선율에 마음을 맡기다 보면 평화의 기운으로 잠기는 것 같았다. 그이가 세 곡이나 연주를 하고 내려간 뒤 황금성 선생님이 무대에 올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꽃다지> 첫 번째 노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노래. 두 노래 다 다른 자리에서 여러 번 들어보았지만 그 강당에서 듣는 느낌은 아주 남달랐다. 선생님도 다른 때 같지 않게 많이 긴장을 하신 것 같았다. 선생님이 꼭 잡아준 손의 느낌이 지금도 온전히 남아 있는 듯 하다. 별음자리 아저씨가 주문 같은 노래 <앗쌀람 알라이쿰>과 <총을 내려라!>를 했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 오늘은 강연장에서 열변을 토하는 강연을 했다. 그리고 두 단식자의 인사와 전범 민중재판 운동을 준비하는 분의 기소인단 모집에 대한 소개. 오늘은 문정현 신부님부터 강연의 초점을 전범 민중재판에 두어 말씀을 했고, 거기에 두 단식자도 그것에 대한 간절한 바람, 그리고 바로 이어서 실무를 준비하는 분의 소개가 뒤를 이으니 어느 정도 짜여진 느낌으로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강연을 마치고 난 뒤 나가는 문 앞 책상에서는 많은 분들이 전범재판소 설립을 위한 발기인이 되겠다는 서명을 하고 나갔다. 전쟁은 끝난다, 우리가 원한다면!

금강, 신동엽

지난 밤 강연을 마치고 수사님과 나는 먼저 계순옥 선생님 자동차를 타고 부여로 넘어왔다. 나머지 단원들은 강연장에 온 분들과 함께 공주 시내의 음식점에서 함께 어울려 저녁을 먹은 뒤 들어왔다. 다른 숙박시설을 준비한다는 것을 황금성, 계순옥 선생님은 일부러 집으로 데려와 함께 자자고 했다. 그리고 너무 편안하게 쉴 수 있게끔 해주었다. 두 분 선생님을 닮은 집, 두 분 선생님의 삶의 방식이 집 곳곳에 배어 있다. 선생님들은 단원들에게 1층에 있는 방 셋과 마루를 모두 내어주고 지붕 위에 놓은 컨테이너 방으로 올라가 주무셨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단원들과 함께 작은 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는데 된장 냄새가 얼마나 구수한지, 일부러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소박한 밥상, 잡곡밥에 여러 가지 나물과 김치, 선생님 댁에서 먹는 밥은 정말 신기하게도 어떤 기름진 고기 음식보다 더 맛이 있었다. 선생님은 일부러 학교 수업까지 뒷 시간으로 바꾸어 놓고 오전 시간 우리 순례단원들을 데리고 가까운 금강에 데려다 주었다. 길게 이어진 코스모스 길, 고요히 흐르는 강물, 강렬하지 않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햇살, 그곳에서 눈을 감아 몇 시간이고 잠이 들었으면 했다. 금강을 보고 난 뒤 옮겨 간 곳은 신동엽 시비가 있는 자리. 선생님이 들려주는 신동엽 시인의 생애와 시비에 얽힌 사연들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옮겨 시인이 살았던 생가까지.

풍경(風景)

신동엽


쉬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쉬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화창한
도오꾜 교외 논둑길을
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
이국 병사는
걷고.

히말라야 산록
토막가 서성거리는 초병은
흙 묻은 생고구말 벗겨 넘기면서
하루삔 땅 두고 온 눈동자를
회상코 있을 것이다.

순이가 빨아 준 와이사쓰를 입고
어제 의정부 떠난 백인 병사는
오늘 밤, 사해(死海)가의
이스라엘 선술집서,
주인집 가난한 처녀에게
팁을 주고.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 핀,
지중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엔,
온 종일, 상륙용 보오트가
나자빠져 딩굴고.

흰 구름, 하늘
젯트 수송편대가
해협을 건느면,
빨래 널린 마을
맨발 벗은 아해들은
쏟아져 나와 구경을 하고.

동방으로 가는
부우연 수송로 가엔,
깡통 주막집이 문을 열고
대낮, 말 같은 촌색시들을
팔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
동방대륙에서
서방대륙에로
산과 사막을 뚫어
굵은 송유관은
달리고 있다.

노오란 무꽃 핀
지리산 마을.
무너진 헛간엔
할멈이 쓰러져 조을고

평야의 가슴 너머로.
고원의 하늘 바다로.
원생의 유전지대로.
모여 간 탱크 부대는
지금, 궁리하며

고비 사막,
빠알간 꽃 핀 흑인촌
해 저문 순이네 대륙
부우연 수송로 가엔,
예나 이제나
가난한 촌 아가씨들이
빨래하며,
아심 아심 살고
있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도로에 사고가 나서 아주 오래 걸렸다


이 엄마 가슴을 시커멓게 태우게 한

더 머물고 싶던 부여를 떠나 다시 덜컹이는 봉고를 타고 세 시간이 넘게 걸려 서울에 올라왔다. 자동차만 타면 정말 몸에 힘이 하나 없다. 휴게소에 두 번을 섰는데 한 번은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없어서 내리지도 않고 있었고, 두 번째 휴게소에서는 차에서 내려 몸을 구부린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차를 오래 타다 내리면 아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럼증이 심하다. 어느만큼 동안은 걷는 것도 마음처럼 되지가 않는다. 조금 움직이고 나서야 그나마 움직임이 편해지곤 한다. 자동차 안에 있는 세 시간은 괴로웠다. 내일 춘천으로 가기 전, 오늘은 서울에서 하루를 준비하며 머문다. 단원들은 모두 합정동 쪽에 있는 어느 수도원으로 가기로 했는데 나는 그 동안 밀린 빨래도 있고, 짐도 추려야 하고 해서 어머니댁에 들르기로 했다. 봉고차는 바로 합정동에 내리고 나는 그곳에서 어머니 댁으로 오혀고 했는데 오히려 자동차가 길을 잘못 들어서 나를 우리 어머니 댁 앞에 내려주고 가게 되었다.

차에서 짐을 내리고 보니 보따리만 모두 일곱 개. 차에서 내린 곳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십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데 그게 참 애매했다. 조금 더 멀 것 같으면 택시를 타겠고, 그보다 가까울 것 같으면 억지로라도 끌어안고 가겠는데 말이다. 한 번 다 들고 움직여 보려 했더니 몇 걸음만에 짐이 손에서 빠져나간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이리 좀 나와주세요.” 키가 작은 어머니는 뛰듯 쫓아 나왔다. 그리고는 가장 큰 가방부터 셋을 등에 지고 한 손씩 들더니 앞장 서 걷기만 하신다. 그리고는 나를 한 번 보고 “으유~”. 나도 그냥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엄마는 “누굴 위해 그렇게 굶는 거야?” 했고, 나는 “응? 그거야 나를 위해서지, 그리고 엄마를 위해서.”. 엄마는 다시 “으유~”다. 더 다른 말은 없다. 그게 다다. 내일은 어디로 가느냐, 가방에는 뭐가 들었느냐, 들어가자마자 씻고 좀 자라, 타 먹는 건 안 떨어졌느냐……. 오늘 밤은 엄마 집에서 푹 쉬어야겠다. 엄마, 엄마도 기소인단이 되면 되겠다. ‘우리 아들을 이렇게 밥도 못 먹게 하지를 않나, 전쟁터로 날아가게 하지를 않나, 거기에 파병까지 해서 이 엄마 가슴을 시커멓게 태우게 한 노무현 대통령을 기소한다’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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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ODSITE

    좋은사이트이네요.
    구경잘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