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먹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죽이고 있다

[마지막 단식일지 42, 43, 44(2004년 9월 19일, 20일, 21일)]이제 우리 손으로 전쟁을 끝낸다

단식 42일차, 임진각 (2004년 9월 19일)

일산 쪽을 지나 파주까지야 출판사 일로 해서 몇 차례 다녀봤지만 그 이상 들어가는 길은 처음이었다. 말로만, 텔레비전 화면에서만 보던 임진각. 자유로라는 길을 지나 임진각에 닿았다. 그저 썰렁한 공원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차장에 보니 자동차들이 꽤 많다. 일요일이라 나들이를 나온 식구들이 많아 보였고, 대절 버스로 관광을 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 추석을 앞둔 휴일이어서 더 그랬을까? 햇볕은 적당이 따사로웠고, 바람이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 순례 일정을 임진각에서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그래서 임진각의 순례 준비를 도맡은 것도 모두 바끼통 회원들이 나서서 한 일이었다. 장소를 알아보고, 허가를 맡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어느 곳 준비가 안 그랬으랴마는 바끼통 회원들이 준비하는 과정은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으니 정말 애를 많이 썼다는 걸 잘 안다. 평화의 종. 임진각 터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작은 문화제를 가질 자리는 ‘평화의 종’이 있는 곳 앞 공터였다. 외지지도 않고 바로 들머리에 있는 좋은 장소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문화제 허락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리가 좋았다. 그것도 바로 건너편에서 경계 근무를 하는 군인들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전쟁반대 문화제를 여니 말이다.

인천에서 떠난 우리가 임진각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시작하기로 한 시간보다 한 시간 가량 빨랐고, 바끼통 회원들은 주변 준비를 하느라 열심이었다. 울진에서 연가까지 내고 올라온 선생님도 장구를 메고 있고, 언제나 함께 있으면 큰 힘이 되어주는 아줌마 운영자들 타라 님, 바람 님도 일찍부터 나와 함께 일을 챙기고 있었다. 먼 길을 돌아, 먼 곳을 다니다가 식구 같은 이들이 한 자리에 있으니 와락 반가움이 일었다. 하지만 그냥 표현은 못하고 돌아섰다. 물론 오래 서 있는 거, 길게 걷는 거 이런 게 다 힘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힘 안 들 정도만이라도 곁에 가서 얘기도 나누어 보고 싶고, 그냥이라도 곁에 가 있어 보고 싶은데 시종일관 ‘너는 저 쪽 가서 앉아 있어라, 너는 가만히 있어라’ 하기만 하면 못내 섭섭한 마음도 있다. 그게 다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거 알지만 아주 꼼짝을 못하게 할 때에는 그 지나친 걱정이 오히려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설명하자니 그 설명이 오히려 지치고, 나중에는 그냥 아예 사람들하고 떨어져 있게 된다. 곁에 좀 가 있으려 하면 앉아라, 그늘로 가라, 쉬어라, 가서 누워라, 움직이지 말아라, 들지 말아라…… 하니 그게 더 힘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힘이 들어서 얼굴도 쉽게 찡그려지곤 하는데, 그걸 설명하다 보면 보나마나 얼굴을 찡그려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 아예 사람들 곁에 있지 않는 게 서로 편하다. 사람들 준비하는 데에서 나와 임진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멀리 보이는 땅, 저기가 북한 땅인가? 이렇게 갈라졌구나. 이렇게 갈라져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구나. 짚차를 세워 놓고 총구를 앞으로 겨눈 군인들 서넛이 바로 곁에 있었다. 제복은 언제나 무섭다. 제복에 철모, 총까지 있으니 더욱 겁이 난다. 조금 걸으니 망배단이라던가, 실향민들이 추석마다 모여서 함께 차례상을 올린다는 자리가 나왔다. 다음 주면 이곳에는 또 그 많은 분들이 오겠지. 송환에서 보았던 조 할아버지, 김영식 할아버지 얼굴이 갑자기 떠오른 건 왜 일까?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조심 걸었다. 마치 동네 길가에 풍을 맞은 노인이 걷기 연습을 하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바꾸어 떼면서 조심조심 걸었다. 연못이 보였다. 연못이 참 예쁘다. 곳곳에 식구들이 삼삼오오로 나와, 또는 둘이 나와서 그늘 좋은 자리에 앉았다. 보자기로 싼 도시락을 내어 놓고 김밥을 꺼내어 먹기도 했고, 어떤 식구들은 조그만 통에 담아온 포도 알을 먹기도 했다. 참 좋아보였다. 나도, 언제, 나중에 도시락을 싸서 다녀가야지. 자유의 다리. 나무다리가 하나 있다. 전쟁을 슬퍼하는 사람들, 전쟁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 그런데 이 나라는 정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도 아무도 하려하지 않는 이 전쟁에 앞장을 서서 함께 한다. 이 수많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아는 이들이 왜 그 땅,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슬픔을 생각하지 않을까? 죽은 아이를 않은 어머니, 죽은 부모의 시체 이에 엎드려 우는 아이, 형제를 잃은 사람들, 한 가족이 몽땅 죽게 되는 사람들.


전쟁을 벌인 자들을 전범으로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보고 평화의 종으로 내려오니 곧 준비한 문화제가 시작했다. 꽃마차가 그 안까지 들어와 무대를 만들어 주었고, 그 곁으로 봉고차를 세우니 그 위에 걸개그림을 널어 아주 좋은 무대가 되었다. 바끼통 식구들과 지자영 선생님, 그리고 유랑단의 공작 님, 보리 님이 함께 길놀이를 여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이들이 나와 노래를 불렀다. 일부러 여수에서 올라온 선생님들이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별음자리표 아저씨가 나가 노래를 했고, 수사님과 내가 나가 말씀을 했고, 자자학교 아이들이 노래를, 코알라님과 따님이 노래를, 보리 님과 함양의 이주미 선생님이 노래를, 범기가 오카리나 연주를,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 또한 오카리나 연주를, 본디빠르기가 노래를 했다. 그리고 그 무대 앞마당에서 긴 줄을 돌리며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함께 단체 줄넘기를 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예뻤다. 앞 쪽에 앉아 있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고 있었다.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멜리와 날자가 사탕을 서너 개씩 정성껏 따로 포장해온 ‘파병철회’ 사탕, ‘이라크 평화’의 사탕을 나누어 주었고, 들머리 쪽에서는 전범 민중재판 기소인을 모았다 있었다. 그리고 구경하는 자리 곳곳에서도 마치 연못가 그늘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도시락으로 싸온 음식들을 꺼내어 먹곤 했다. 나에게 말을 할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제는 한 마디 한 마디 따로 목에 힘을 주지 않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실내도 아니고 바깥이었으니 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요사이 정말로 날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 인천의 기차길옆에서, 그리고 그저께 시흥의 샘물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마련해준 그 시간들을 보내며 더 바랄 것 없이 좋고 행복했습니다. 그래, 이렇게만 살면 돼, 이게 평화구나 하고 그 순간을 고마워하고 있노라면 오늘은 또 예순 둘이 죽었다고, 오늘은 또 백십 명이 죽었다는 이라크 뉴스가 놓여지곤 합니다. 이제는 싸움임을 명확히 하고 이 전쟁을 벌이는 자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건 내가 과격해서라거나 급진적이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날마다 수십 명씩 죽는 이들을 살리는 싸움, 전쟁을 끝내는 싸움은 바로 목숨을 살리는 싸움이고, 이 싸움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싸움일 것입니다. 이 전쟁을 벌이는 자들을 전범으로 민중법정에 세우는 기소인이 되어주십시요. 기소인이 되어주십시오…….”
9월 21일, 청와대 앞 기자회견을 앞두고.

어머니 댁

해가 기울 무렵 행사를 모두 마치고 흩어졌다. 이제 순례단 일정은 내일 대학로의 <전범 민중재판을 위한 발기인 총회>와 모레 아침 청와대의 기자회견만 남겨두었다. 그러니 나는 짐을 따로 챙겨 서울 어머니 댁으로 갔다. 수사님도 합정동의 댁으로 간다 하셨고, 그런 식으로 해서 순례단은 이 날부터 따로 하게 되었다. 어머니 댁에 도착하니까 저녁 여섯 시 반 쯤. 우리 어머니는 경희대와 외대 앞에서 벌써 십 오년도 넘게 하숙집을 하고 있다. 지금은 외대 후문 쪽 반지하 하숙집.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언제나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한다. 짐을 가지고 들어가니 마침 학생들 저녁을 먹는 시간, 식탁 가운데에는 커다란 닭도리탕 솥이 놓여 있고 붉은 빛 양념으로 김이 모락모락난다. 가스렌지 위에서는 프라이팬 위에 놓고 부침개를 부치고 있다. 얼굴은 아주 해골이 다 되어 돌아온 아들, 차려준 음식이라도 먹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으니 엄마 마음이야 오죽할까. 그저 엄마와 마주 웃기만 했다. 엄마한테 언제나 나는 언제나 못할 짓만 한다.

단식 43일차, 서울 (2004년 9월 20일)

오전에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 다녀오게끔 되어 있던 일정이 취소되었다. 그래서 좀 더 푹 쉴 수가 있었다.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는 건 더욱 힘들다. 몸이 무거운 데다가 머리가 어지러워 곧 휘청이게 된다. 일어나 앉은 뒤에도 어지럼증을 가라앉힌 뒤 다시 일어서고, 일어선 뒤에도 다시 어지럼증을 잠잠하게 해야 비로소 움직일 수가 있다. 시간을 더 갖게 된 오전에는 그 동안을 되돌아보는 글을 짧게 한 편 썼다. 함께 동인 모임을 하는 곳에 보낼 것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가까운 책방을 찾아 나섰다. 대학 교정을 가로질러 가는데 다들 활기에 넘치는 걸음인데 나는 비쭉하게 마른 몸으로 환자처럼 걸으려니 괜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순례단하고 함께 다닐 때에는 덜 했는데 이렇게 사람 많은 곳으로 혼자 섞이려니 말이다. 갔다가 반가운 책 한 권을 만났다. 쓰보이 사카에가 지은 <<스물네 개의 눈동자>>. 작가는 반전운동에도 깊이 간여한 일본의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작가라고 되어 소개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한 작은 마을에서 한 교사가 그 마을의 아이들, 마을 사람들과 겪는 이야기라도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인간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나는, 그래서 오히려 더욱 진실과 감동을 가르쳐 주게 하는 작품이라고 칭찬이 대단했다. 둘레 어린이문학 공부를 하는 분들은 우리의 비길만한 작품이라 하면서 꼭 읽어보기를 권했다. 하지만 절판이 된 것이 아닌데도 책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 잘 알려지지 않아 팔리지 않아서 그랬는지 커다란 책방에도 없다고 하던 것이다. 그러던 게 출판사를 달리해서 나와 있었다. 그래서 못 보고 있던 거라 더욱 반가웠다. 문학은 세상과 싸울 힘이 되긴 되는 걸까? 이제는 대 놓고 부활하고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생각만 해도 무섭다.

<전범 민중재판을 위한 발기인 총회>

원래는 대학로 마로니에에서 오가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자리로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구석에서 몇 사람 모여서 하는 회의가 아니라 누구나 구경을 하기도 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도 있는 총회, 그 앞뒤로 문화공연도 넣어 함께 즐기며 하는 총회를 준비했다. 그런데 비가 왔고, 비는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실무를 준비하는 분들은 급하게 장소를 알아봐 대학로에 있는 흥사단 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확정된 장소 연락을 받은 게 저녁이 다 되어서였으니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는다 해도 오시겠다 한 분들이 일부러 따로 인터넷을 확인해서 오기에는 너무 늦다.

아직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걷기에는 무리다. 택시로 총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시작 시간을 한 시간 남짓 남겨두고 있을 때쯤. 수사님도 벌써 와 계셨고, 다른 단원들도 도착해 있었다. 민중재판을 준비하는 실무자 분들도 행사장 준비를 하느라 바삐 오갔다. 안에 들어가 안건지로 나누어준 자료집을 살피고 있으니 어느 덧 강당이 가득 찼다. 글쎄, 강당의 삼분의 일이나 차려나 생각한 것하고는 아주 달랐다. (나중에는 총회가 시작한 뒤에도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어 강당 뒤 통로까지 메울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보통 어떤 운동의 방향이나 내용을 결정하는 걸 보면 모임의 소수 대표자들이 모여 결정을 하는 예가 많은데 그것이 아니라 실제로 운동을 함께 할 이들이 누구라도 모여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는 자리로 만들겠다는 준비측의 의지가 눈으로 확인되는 것 같았다. 개회 선언과 민중의례부터 시작해서 그 동안의 경과보고, 단식평화순례단의 영상물 보고와 단식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바로 이어진 안건 해설과 토론. 민중재판이라는 것이 아직은 내게도 낯설기 때문에 자료집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그 내용이 아주 또렷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그냥 어떤 것이다, 어떤 방향이다, 어떻게 해 나가는 모양이구나 하는 정도랄까. 일단 그 기본 내용과 방향, 의의에 대해서는 십분 동감을 하고 있기에 나는 그 동안 순례 길에서도 이 민중재판 운동을 알리는데 가장 힘을 주었고, 이후에도 이 운동을 잘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또다시 앞으로 이 운동의 방향이나 방식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들었지만 아직도 막연한 느낌이 다 가신 건 아니었다. 그런 부분들은 앞으로 하나하나 채우며 구체화해나가야 할 것이다. 아니, 그건 그냥 구상이나 계획을 놓고 하는 토론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가고, 일을 벌여가는 실천 속에서야 비로소 채워지고 다듬어질 것이다. 중요한 건 실천이다.

총회가 시작할 무렵 웃는 달 누나가 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총회에서 계획안을 설명하는 게 끝날 무렵 웃는 달 누나가 말이 너무 딱딱해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어, 이 문제는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가 단식순례를 하면서 다닌 함양의, 남원의, 여수의, 부여, 춘천, 시흥, 인천의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이 운동을 설명한다면 이 운동은 애초 기획처럼 ‘전쟁에 반대하는 평범한 일상 시민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는’ 일에는 실패할 거라 생각한다. 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운동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운동을 대중의 언어로, 생활의 언어로 하는 데에는 많이 무심하고, 많이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제가 나의 언어로 받아진다는 것은 곧 그 문제가 내 문제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 문제가 다른 언어, 낯선 언어로만 들린다면 그 문제는 남들의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고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일

총회 중간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시간에는 풀무질 책방 은종복 아저씨가 나가 얘기를 했다. 아저씨 마음은 누구보다 절실하다. 정말로 진솔하게, 마음을 다해 얘기하는 모습. 책방을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책방에 오는 학생들에게 기소인이 되게끔 할 거라고, 한 천 명 만들면 되느냐고 얘기를 하기도 했다. 꽉 찬 강당을 둘러보니 뜻밖으로 바끼통 분들이 꽤 여럿 와 있었다. 고마리 선생님도, 산들바람 선생님도. 총회에서는 중간 중간 구호를 외치곤 했는데 아무래도 그 정서를 어색해할 분들이 있을 것 같아 그게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구호를 함께 이치고 힘을 북돋고 하는 것을 모두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면서도 구호를 외치는 정서와 그것에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지니게 되는 사람들이 더욱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자리라는 건 가능하지 않은 걸까 하는 생각했다.

총회 마지막 순서의 노래 공연은 정말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를 한 번에 다 거둘만 했다. 말로만 듣고 있던 ‘아콤다’ 밴드의 노래 공연. 그 가운데 노래를 부르는 일은 출판사에서 몇 번 인사를 한 일이 있는 출판 노동자이다. 그러니 ‘아콤다’는 전문 노래패라기보다는 저마다 자기 생활이 따로 있으면서 취미 모임으로 있는 노래패이다. 풍동은 꽃이다, 풍동은 밭이다, 풍동은 꽃이다, 풍동은 밭이다… 를 되풀이하더니 똥똥똥똥똥똥똥 하면서 시원하게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했다. 풍동 철거를 두고 만든 노래라는 건 그냥 들어도 알 수 있다. 아주 유쾌하고 재미난, 그리고 가벼운 노랫말인데도 이 노래를 듣다 보면 가벼운 웃음에 후련한 웃음이 동시에드는가 하더니 그 웃음 아래에 있는 현실의 아픔까지 절절히 느껴졌다. 이어서 부른 두 번째 노래는 ‘임금님은 우리 눈과 귀를 속이고, 임금님은 우리 눈과 귀를 속이고’ 하는 후렴구가 되풀이 하는 노래, 노래 중간에 임금님은 노무현으로 바뀌기도 했다. 신이 났다. 좋은 노래친구들을 알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아콤다에 이어진 별음자리 아저씨의 노래들. 아콤다 단원들을 비롯해 조약골, 평화바람의 보리, 공작 님이 함께 흥을 내니 한바탕 자유로운 판이 벌려졌다. 그래, 평화는, 우리의 싸움은 이랬으면 좋겠다. 언어와 정서를 이른바 ‘운동권’의 그것에 갇히게 한다면 결국 운동은 스스로를 좁혀드는 것뿐이다. 내용은 너무나도 훌륭하고 올바른데 불구하고,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펼치는 언어와 정서가 낯설어 고립된다면 그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나?
9월 20일 흥사단 3층, <전범민중재판 운동 발기인 총회>에서 안건 심의를 모두 마친 뒤 이어진 아콤다의 공연.

쓰다 보니 너무 내가 느끼던 어떤 아쉬움이나 내 개인 느낌 위주로 총회를 스케치한 것 같다. 사실 나는 이 총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주 힘을 받았다. 아주 뿌듯하고 뭔가 커다란 희망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전쟁은 끝난다, 우리가 원한다면! 더 이상은 원하는 것을 마음 속 바람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단식 44일차, 이제 새로운 시작 (2004년 9월 21일)

생각하면 정말 긴 걸음이었던 것도 같고, 단숨에 달려온 것 같기도 하다. 44일의 단식, 솔직히 나로서는 내 몸이 이렇게 버텨낸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분명코 그 힘은 그 동안 고장마다 만난 사람들의 마음, 이 운동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왔을 것이다. 이제 오늘 청와대 앞에서 그 길을 매듭짓고, 우리 스스로 전범을 재판하는 새로운 싸움의 시작을 연다. 그 자리에서 수사님과 나는 전범 민중재판의 기소인 1호가 되어 나름의 기소이유서를 각각 발표하는 것으로 기자회견을 대신하기로 했다. 막상 기소장을 쓰려 하니 하고픈 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했다. 어디 노무현과 부시, 블레어가 저지른 이 전쟁의 범죄 행위가 한두 가지인가? 그것들을 다 늘어놓자면 끝도 없이 길어질 터였다. 이 전쟁 앞에서 나는 무엇을 가장 괴로워했을까 하는 것을 가만 가만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해 봄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이라크로 들어가던, 그리고 그곳에서 전쟁을 겪던 기억부터 두 해 가까이 이 전쟁을 끌어안고 산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처음의 마음, 그리고 나를 끝까지 붙들게 하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찾으면서. 쓰는 시간이야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쓰기까지가 너무 오래 걸렸다. 다 쓰고 나니 어느덧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어제 오늘 회사에 휴가를 내놓고 같이 다니는 시치프스와 saba를 아침에 만났다.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 먼 들머리부터 경찰들 움직임이 바쁘다. 차를 한 대 한 대 세우고 보내주곤 하더니 우리가 탄 택시는 못 들어가게 잡아 세운다. 못 갈 까닭이 없지 않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여 단식평화순례단이라 하니 택시를 돌리게 한다. 우리는 분수대로 가는 길이라고, 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기로 되어 있다 하니 회견장이 이 자리로 바뀌었다면서 내리라 한다. 어리둥절해 자리에 내렸다. 평화바람 쪽에 연락을 취하고, 이곳저곳 전화를 걸었다. 기자회견 장소가 바뀐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게 막힌 채 서 있는데 그 길로 들어오던 방송 기자들도, 회견장에 함께 하러 온 단체 분들도 모두 막혔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다. 그냥 가로막는 것이다. 건장한 전경들을 몇 겹으로 세워두고 꽉 막아 놓았다. 몇 분이 화를 참지 못해 거칠게 항의하고 길을 트라고 요구했지만 꿈적도 않는다. 그네들 대답은 단 한 가지, 위에서 시켜서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던 길에서는 길을 막았지만 반대편으로 돌아들어오는 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사님과 신부님, 평화바람 단원들을 비롯해 그 쪽으로 들어온 사람들, 기자들은 이미 안 쪽에 모여 있다고 한다. 공작 님께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니 샛길을 알려주면서 그리로 해서라도 하나 둘씩 살짝 들어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 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청와대 분수대 가까이에서도 분수대 앞이나 예전 수사님이 농성을 하던 사랑방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건 여전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권력의 둥지 가까이에 오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그 자리에 자리를 깔고 앉았고, 그 자리에서 단식평화순례를 마치는, 그리고 전범민중재판 운동의 1만인 기소인 모집 선언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 자리에 온 분들은 저마다 우산을 들고 하늘을 가렸다. 전범 국가의 국민으로 하늘을 떳떳이 볼 수 없다는 뜻의 나름의 표현이다. 수사님과 내가 앉은 앞에는 십 수대의 사진기가 잠깐도 쉬지 않고 계속 셔터를 눌러대었다. 문정현 신부님이 평화순례단의 경과보고를 하는데 그동안 들려온 고장, 그리고 그 고장의 사람들, 그리고 말 못하며 힘들어하던 기억들이 느린 그림처럼 지나갔다. 가슴 속에 있는 어떤 것이 받쳐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민중재판을 준비하는 박준도 씨가 전범 재판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뒤 바로 단식자 둘의 기소이유서를 읽는 순서가 되었다. 먼저 내가 읽을 순서, 나는 기소장을 읽기 전에 기자들 앞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을 몇 마디 덧붙였다. 순례를 하면서 나는 몸무게가 십오 킬로그램 빠졌지만, 내가 단식을 하고 순례를 하는 그 기간만 해도 이라크 인들은 천오백 명이 넘게 죽었다고. 평화순례의 그 걸음은 밥을 굶은 단식자들의 걸음이 아니라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이라크인들의 걸음이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기소장을 읽어나갔다.


[기소이유서]
노무현 대통령을 전범으로 기소합니다.
박기범

나는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일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이들과 같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그려보기도 하지요. 아이들이 그리는 세상 속에는 우리가 끝내 지키고 가꾸어야 할 가치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것이든 이 세상 무엇보다 목숨이 귀한 세상,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사는 세상, 힘이 센 자들이 힘 약한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세상, 힘을 가지고서 힘 약한 이들의 것을 빼앗지 않는 세상,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지 않는 세상……. 그러나 지난 이라크 전쟁이 시작한 뒤로 더는 아이들 앞에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가꾸어오던 자유니 평화니 생명이니 민주니 하던 말들이 모두 거짓말이 되어 곤두박질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군대마저 침략군대로 보낸 뒤에는 이 땅의 어른으로서 더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미! 안함, 괴로움으로 아이들의 눈을 바로 마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못난 결정으로 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아이들조차 모두 침략군대를 보낸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침략자, 학살자, 약탈자. 한국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이 전쟁에 반대한다 한들, 아무리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라 한들 우리가 쓰고 누리는 모든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이라크 인들의 핏 값과 목숨 값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내 나라 대통령을 전쟁범죄자로 기소를 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고 한국군의 파병을 반대했지만 이 나라 대통령은 끝내 우리 모두를 침략자, 학살자, 약탈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기어이 나를 범죄자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침략자로 내몬 죄목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기소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나라 정권은 침략군을 보내는 것으로 그 동안 내가 아이들과 함께 가꾸고 배워온 평화와 자유, 생명과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을 몽땅 짓밟고 뭉개버렸습니다. 이 모든 세상의 아름다운 가치들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탐욕과 거짓, 힘센 자들만의 이익과 폭력을 올려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전범으로 기소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탐욕과 거짓, 폭력! 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만든 죄, 우리 아이들의 꿈을 모두 빼앗아간 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기소의 까닭은 지금도 날마다 죽어가고 있는 이라크 인들의 시신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죽이고 있는 그 땅의 사람들, 그 땅의 아이들, 그 땅의 꿈들, 그 땅의 노래들, 그 땅의 목숨 가진 것들. 노무현 대통령은 그 모든 것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대낮에도 헬기를 타고 가면서 민간인들에게 기총 사격을 하고 있고, 밤에 잠든 틈을 타 융단폭격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평균 최소 스물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 끔찍하고 엄청난 짓들을 부시, 블레어와 함께 벌이고 있는 자가 바로 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나라 대통령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청와대 앞으로 오는 길까지 나라 안 곳곳을 돌며 참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하나 같이 모두 평화를 바라고 전쟁을 끝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면 마땅치 않아도 그저 잠자코 따르던 순박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요. 하지만 더는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순박한 이들이 손수 나서서 이웃 나라 백성을 학살한, 우리를 침략자로 만든 이 나라 대통령을 심판하려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당장 한국군은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은 멈추어져야 하고, 모든 점령군은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어서 이라크 인들에게 머리 숙여 용서를 빌고 책임을 져야겠지요. 깊이깊이 뉘우치고, 갚아야 할 것이 있다면 몇 배로라도 갚아야 할 것입니다.

2004년 9월 21일

곡기를 끊고 사십사일 째,
이라크 평화를 위한 단식평화순례를 마치면서
아이들 앞에 부끄러운 침략국가의 동화작가가 씁니다.

9월 19일 임진각, 전범민중재판 기소인을 모았다.

미사, 점심, 병원, 미음

농성을 하던 청와대 앞 분수대 안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까지는 허락을 해주기로 경찰과 이야기가 되었다. 기자회견을 모두 마친 뒤 수사님과 신부님, 그리고 순례단원들과 함께 해온 이들이 함께 예전 그 농성장으로 들어갔다. 지율 스님이 계시던 곳, 그리고 지율 스님과 김재복 수사님이 한 지붕 두 식구가 되어 함께 단식하던 곳. 깨끗하게 치워진 이곳에 다시 와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나야 두 번 면회 다녀간 것 말고 이제 겨우 세 번째 왔는데도 이런데 수사님은 어떨까 싶었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천둥까지 치면서 아주 센 비가 내렸다. 잔디밭 같은 곳에 둘러앉아 했으면 좋겠지만 자리가 여의치 못해 비만 살짝 피하는 곳에서 둘러서서 미사를 시작했다.

나로서는 처음 가져보는 미사다. 형식이고 내용이고 아무 것도 모른다. 순서에 따라 신부님의 말씀들이 이어졌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돌아가며 포도주를 묻힌 얇은 밀떡을 하나씩 먹는 차례가 되었다.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 서 있기만 하는데 수사님도 줄을 서 따르면서 밀떡을 입에 넣었다. 먹어도 되는가 보다. 이래서 내가 44일만에 가장 처음 먹은 음식은 미사를 볼 때 먹은 밀떡 한 조각이 되었다. 입 안에서 살살 녹여 목구멍으로 넘기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미사를 마치는데 마칠 때쯤 하여 문정현 신부님 목소리가 많이 떨렸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가까운 어느 곳 밥집으로 갔다.

저마다 버섯 전골에 김치찌개, 된장찌개, 생선구이가 상에 올라오는데 그건 앞으로 두 달 동안도 그림에 떡일 뿐이다. 그것 대신 내 앞에는 쌀뜨물을 내어 따라온 음료수 병이 있다. 며칠 전 내게 쌀뜨물을 두 모금 넘기게 했던 이주미 선생님이 싸온 거다. 나도 어서 밥을 먹고 싶다. 저 얼큰한 것들, 저 구수한 것들을 먹었으면 좋겠다. 다들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정말로 저마다 갈 곳으로 모두 헤어졌다. 평화유랑단의 꽃마차는 전북 익산으로, 수사님은 가톨릭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여의도에 있는 어느 병원으로, 나는 시치, saba와 함께 성수동에 있는 성수의원으로 갔다. 성수 의원은 <인도주의 의사 실천협의회>라는 모임을 이끄는 우석균 선생님이 계신 곳인데 지난겨울 단식을 할 때에도 몸을 돌봐주신 선생님이다.

맥박이 많이 떨어지고, 약간의 심부전이 있다고는 하지만 단식일 수에 견주면 오히려 좋은 상태라고 한다. 그 정도 단식이면 더 나빠졌어야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며 말이다. 곁에서 걱정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가 미음을 다려 놓으셨다. 건더기 아무 것도 없는 미음 한 대접을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맛은 무슨 맛, 그저 쌀 냄새가 조금 나는 정도였을 뿐이지만 내게는 아주 꿀맛이었다. 이제 먹는다.

나는 이제 먹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죽이고 있다.

나는 이제 먹지만 이라크 사람들은 여전히 죽는다. 이 단식으로, 그리고 이 걸음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을 끝내고 한 목숨이라도 더 살리는 데에 돌 하나라도 얹기는 한 걸까? 그 동안 우리는 만나며 다녔다. 어떤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평화를 바라는 그 소박한 가슴들을, 전쟁은 안 된다고 말하는 시장터 할매들을, 그리고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시민들을. 그러한 분들을 만나는 걸음걸음은 희망이었다. 8월 3일 선발대의 출국, 그리고 8월 28일 본대의 출국, 그야말로 우리는 침략국가의 백성이 되고야 만 그 때부터 오히려 거꾸로 반전과 철군의 운동은 잦아들었다. 아니, 거의 멈추기까지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오히려 더 흩어진 마음까지 다 불러 모아 하루라도 빨리 우리 군대를 돌아오게 했어야 할 시점부터 거꾸로 철군 운동은 멈추어졌다.

이 절망에서 순례단이라는 것이 시작되었고, 그 절망이 있었기에 배고픔을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른다. 희망을 찾아다니는 길, 커다란 이름 내놓고 말을 앞세우며 하던 사람들보다 곳곳에서 풀뿌리가 되어 진정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길이었다. 진정 풀뿌리가 되고, 희망이 되는 작은 모임들을 만나러 다닌 길이었다. 그리고 이 순례단이 그러한 희망의 풀뿌리들을 잇는 작은 고리가 되고자 했다. 어떻게든 그 희망들을 그러모아 목숨을 살리는 이 일을 하루라도 앞당기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울진, 영주, 함양, 남원, 여수, 공주, 춘천, 시흥, 인천, 임진각, 서울. 오히려 다니는 곳마다 순례단은 감동을 얻었다.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희망을 확인했다. 날마다 오늘은 몇 십 명이 더 죽었다는, 오늘은 어떤 공격이 있었다는 사막 땅의 소식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아주 깜깜한 절망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불안하게 시작한 전범 민중재판 운동 또한 조금씩 탄력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야기할 자리만 있으면 한 마디 한 마디에 안간힘을 넣어 말한 것이 기소인이 되어 달라는, 더는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일을 우리 스스로 하자고 호소했다.

저마다 가슴에 평화로운 마음을 가꾸는 것 또한 소중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음속의 꿈과 바람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 있다. 더구나 이 정권은 지난 일 년 반 동안 우리의 촛불, 우리의 서명, 우리의 청원, 우리의 절규를 모두 외면하기만 했다. 더는 해주기를 기다릴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일, 우리 스스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하는 것. 그 일을 함께 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제 발기인 총회를 거치면서 오늘로 민중재판 운동을 힘있게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굶으며, 만나며 다닌 일이 의미 없지 않다면 이 민중재판 운동이 시작할 수 있는 작은 발판이 되었다는 것일 거다. 단식은 마쳤지만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다. 전범을 민중법정에 세우는 일, 그리 해서 철군을 하루라도 앞당기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 목숨을 살리는 일을 이제 시작한다.

단식은, 그리고 단식순례는 스스로에게도 잔인했고, 곁에 있는 분들에게도 잔인한 못할 짓이라는 말들을 하곤 했다. 정말 그랬다. 그래서 함께 다닌 순례단원들을 비롯해 마음을 함께 하던 많은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많다. 다 갚을 수 없는 고마움 또한 컸다. 내가 끝까지 순례의 길을 마칠 수 있던 것은 앞서서 외로이 걷고 있던 김재복 수사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끔찍한 이라크의 소식들. 서울은 며칠 비가 내리더니 아주 많이 쌀쌀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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